79회 한능검 심화 23번 해설 – 조선 정조

23번 문제

23. 밑줄 그은 ‘이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설치되었다.

②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일어났다.

③ 청과 국경을 정하는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되었다.

④ 이인좌를 중심으로 소론 세력 등이 난을 일으켰다.

⑤ 신류가 조총 부대를 이끌고 흑룡강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조선 영조 때 준천사를 설치하여 청계천을 준설함으로써 청계천의 범람 피해와 하수처리 문제를 해결했다.

또한 균역법이 시행되었다.

 

①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설치되었다.

조선 정조 때 장용영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일어났다.

조선 현종 때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기해예송,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청과 국경을 정하는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되었다.

조선 숙종 때 백두산정계비가 건립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이인좌를 중심으로 소론 세력 등이 난을 일으켰다.

1728년 조선 영조 때 이인좌의 난이 발생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신류가 조총 부대를 이끌고 흑룡강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조선 효종 때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두 차례에 걸쳐 변급과 신류 각각이 지휘하는 조총 부대가 출병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조선 후기
영조의 탕평 정치
  • 1728년 이인좌의 난 발생
  • 탕평 정치 실시. 탕평책.

탕평비

  • 탕평비 설치 – 1742년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한 탕평비가 건립되었다. 탕평책을 펼쳐 붕당의 다툼을 없애려 한 영조의 의지가 담겨 있다.
  • 준천사를 설치하여 청계천을 준설함으로서 청계천의 범람 피해와 하수처리 문제를 해결
  • 산림 존재 불인정
  • 서원 대폭 정리
  • 이조 전랑 권한 약화
  • 균역법 시행
  •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편찬
  • 신문고 부활
조선 후기
정조의 탕평 정치
  • 조선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
  • 탕평 정치 시행
  • 초계문신제 실시 –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
  • 규장각 설치 – 규장각은 학문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구. 서얼 출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
  • 장용영 설치 –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 한양과 수원에 설치
  • 수원 화성 건설
  • 신해통공 실시 –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도성 안에서 시전 상인이 아닌 난전의 상업 활동 허락
  •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규장전운’, ‘무예도보통지’ 등 수많은 책 편찬
  • 중국에서 <고금도서집성> 수입
조선 후기
붕당 정치 전개
  • 정여립 모반 사건

붕당 정치 초기에는 동인이 우세한 가운데 정국이 운영되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발생
↙    분화     ↘
북인(급진파) 남인(온건파)
서경덕, 조식 이황, 이언적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 인조 반정(1623년)

광해군의 지지 세력인 북인은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다.

또한 북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광해군의 영창 대군 살해와 인목 대비 유폐 등으로 결국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과 북인은 몰락하였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 산림이란 이름으로 재야에서 그 여론을 주재하였다.

산림

시골에 은거해 있던 학덕이 높은 학자 가운데 국가의 부름을 받아 특별 대우를 받던 사람으로 붕당 정치기의 사상적 지주였다.

 

  • 예송

현종 때까지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된 채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 1차 예송

1659년 기해예송.

기년복 1년.

효종이 죽은 뒤 자의 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1년을,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첫째 아들로 대우하여 3년을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1년설이 채택되었다.

당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 2차 예송

1674년 갑인예송.

기년복 1년.

효종비가 죽은 뒤 또 자의 대비의 복제가 문제 되었는데, 서인은 9개월설을, 남인은 1년설을 주장하여 1년설이 채택되었다.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이 약화되고 남인 중심의 정국이 운영되었다.

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
  • 북벌론 제기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하여 표면상 사대 관계를 맺고 사신이 왕래하면서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였으며, 어영청을 중심으로 국방력을 강화하고 북벌을 준비하였다.

그 후,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 움직임이 제기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 북학론 제기

이 시기에 청은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중국의 전통 문화를 보호, 장려하고 서양의 문물까지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조선 사신은 귀국 후에 기행문이나 보고서를 통하여 변화하는 청의 사정을 전하였고,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였다.

이후 학자들 중에도 청을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조선 정부는 청의 수도인 북경에 정기적으로 연행사를 파견했다.

 

  • 백두산 정계비

한편,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에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여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1712년 조선 숙종 때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웠다.

이 정계비에서 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 정묘호란(1627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용골산성)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 병자호란(1636년)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강화도에서는 김상용이 항전 끝에 순절하였다.

 

  • 북벌 운동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였으며, 어영청을 중심으로 국방력을 강화하고 북벌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 나선 정벌(1654년, 1658년)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변급과 신유가 지휘하는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79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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