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회 한능검 심화 31번 해설 – 갑오개혁, 을미개혁

31번 문제

31. (가)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① 청과 일본이 톈진 조약을 맺었다.

② 한성 사범 학교 관제가 반포되었다.

③ 서재필 등이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④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⑤ 함경도 덕원 지방의 주민들이 원산 학사를 설립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과정에서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한 이후 친일 성향의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그리고 을미개혁이 추진되었다. 이후 건양이라는 연호를 사용하고, 태양력을 사용하였다.

 

① 청과 일본이 톈진 조약을 맺었다.

1884년 갑신정변이 진압된 후, 청⋅일 양국은 조선에서 청⋅일 양국군이 철수할 것, 그리고 장차 조선에 파병할 경우 상대국에 미리 알릴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을 체결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한성 사범 학교 관제가 반포되었다.

1894년 제2차 갑오개혁 이후 정부에서는 교육입국 조서를 발표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후에, 한성 사범 학교를 세워 인재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서재필 등이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1896년에 창립된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을 발행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서울과 부산을 연결하는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함경도 덕원 지방의 주민들이 원산 학사를 설립하였다.

1883년에 원산(덕원부)에 관민이 합심하여 기금을 모아 원산 학사을 설립하고 최초로 근대 교육을 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제1차
갑오개혁
제1차 동학 농민 봉기 후,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로 조선 정부는 이를 반영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통해 경제적 이권 탈취와 함께 침략의 기반을 닦기 위해, 일본은 조선에 대하여 내정 개혁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일본군이 먼저 철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결국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경복궁을 점령하고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1894년). 그리고 일본은 친일 내각을 수립하여 조선에 대한 내정 간섭을 했다.

교정청

조선 정부가 독자적으로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로 주로 조세 개혁을 결정하였다.

  • 제1차 갑오개혁

일본은 흥선 대원군을 섭정으로 하는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했다.

김홍집 내각은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를 반영하고자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국가의 주요 정책에 대한 개혁을 추진하였다(제1차 갑오개혁, 1894년 7월).

일본은 청⋅일 전쟁 중이라 조선에 내정 간섭할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비교적 자주적인 개혁이 가능했다.

군국기무처

입법권을 가진 초정부적인 개혁 추진 기구이다

  • 주요 개혁 내용
    • 정치
      • 개국 기원 사용
      • 기존 6조에서 8아문으로 개편
      • 궁내부를 신설하여 왕실 사무와 행정 사무 분리
      • 과거제 폐지
    • 경제
      • 탁지아문으로 재정의 일원화
      • 조세의 금납화
      • 도량형의 개정 통일
      • 은본위 화폐 제도를 채택
    • 사회
      • 공·사노비 제도를 혁파하고 신분제 폐지
      • 과부의 재혼 허용
      • 조혼 금지
제2차
갑오개혁
  • 배경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유리해지자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일본에서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였다.

1894년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여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 제2차 김홍집 내각

고종은 종묘에 나가 독립 서고문을 바치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이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의 성격을 지녔다.

홍범 14조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 왕실 전범(典範)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의 법칙과 종친과 외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3. 임금은 각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고, 종실(宗室), 외척의 내정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나누어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5. 의정부(議政府) 및 각 아문(衙門)의 직무, 권한을 명백히 규정한다.

6. 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징수하지 아니한다.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의 관할에 속한다.

8. 왕실의 경비는 솔선하여 절약하고, 이로써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9. 왕실과 관부(官府)의 1년 회계를 예정하여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10.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1. 총명한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 기예를 견습시킨다.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을 실시하여 군제의 근본을 확립한다.

13. 민법, 형법을 제정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 주요 개혁 내용
    • 정치
      • 내각제 도입
      • 8아문을 7부로 고쳐 내각을 편성
      • 지방 행정을 8도를 23부로 개편
      • 재판소 설치
      • 지방관 권한 축소(사법권과 군사권을 배제, 행정권만 행사)
    • 사회
      • 교육 입국 조서 반포
    • 군사
      • 훈련대와 시위대 창설

 

  • 중단

당시 일본이 삼국 간섭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내각 대신들, 특히 내무 대신 박영효의 주도하에 단행되었다.

그러나 민비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된 박영효가 민씨 일파에 의해 실각됨에 따라 개혁은 중단되었다.

삼국 간섭

한반도와 만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도록 만든 사건

을미개혁
  • 을미사변(1895년)

삼국 간섭 등으로 박영효가 실각한 뒤, 친러 성향의 제3차 김홍집 내각이 성립되었다.

이 때, 명성 황후는 친러파와 연결하여 일본의 침략 세력을 제거하려 하였고, 이에 일본은 낭인을 동원하여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다.

 

  • 제4차 김홍집 내각

을미사변 후 친일 성향의 제 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되었다.

이후 을미개혁이 추진되었다.

 

  • 주요 개혁 내용
    • 정치
      • ‘건양’ 연호를 사용
    • 사회
      • 태양력 사용
      • 종두법 실시
      • 단발령 실시
      • 소학교 설치
      • 우체사 설치
    • 군사
      • 친위대와 진위대 설치

 

  • 중단
    • 을미의병

개항 이후 계속된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침략과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항일 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 아관파천

1896년,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파천이라고 한다.

을미의병과 아관파천으로 인하여 을미개혁은 중단되었다.

근대 교육의
발달

  • 원산학사

1883년에 원산(덕원부)에 관민이 합심하여 기금을 모아 원산 학사을 설립하고 최초로 근대 교육을 했다.

 

  • 동문학

1883년에 정부는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을 설립하였다.

 

  • 육영 공원

1886년 정부는 육영 공원을 세워 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 세 사람을 초빙하여 주로 현직 관료와 상류층의 자제들에게 신지식과 외국어를 가르쳤다.

좌원과 우원을 구분하여 학생을 선발하였다.

 

  • 배재 학당와 이화 학당

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도 정부의 협조를 얻어 배재 학당, 이화 학당 등을 세워 신학문과 서양 문화 및 영어 등을 가르쳤다.

이화 학당은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으로 건립되었다.

 

  • 한성 사범 학교

갑오개혁 이후 정부에서는 교육 입국 조서를 발표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후에, 한성 사범 학교(1895년), 외국어 학교, 소학교 등을 차례로 세워 인재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 학교(1908년), 정주에 오산 학교(1907년)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독립 협회
  • 배경 – 아관파천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

  • 열강의 이권 침탈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권층은 친러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외세의 침투가 계속되어 나라의 자주권이 크게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 독립 협회 창립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년).

  • 독립 협회 활동
    • 독립문과 독립관

독립 협회는 첫 사업으로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자주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는 등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독립 협회는 독립관에서 교육과 산업 진흥, 자주독립 등의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민중을 계몽하였다.

 

  • 자주 국권 운동
    • 만민 공동회

이 무렵, 러시아의 침략적 간섭은 여전하였다.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파견하고, 한러 은행 설립, 절영도 조차 등 이권 침탈을 시도하였다. 또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독립 협회 회원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1898년).

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종로 광장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의 자주 독립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수시로 만민 공동회를 열고, 외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 및 토지 조차 요구 등에 대항하여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려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국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다.

 

  • 자주 민권 운동
    • 국민 참정권 운동

자주 국권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증대되고 민권 의식이 고양되어 자유 민권 운동도 전개되었다.

나아가,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국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독립 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하여,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 참정 운동과 국정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 같은 활동을 통하여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 자강 개혁 운동
    • 관민 공동회

1898년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켜 관민 공동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백정 출신인 박성춘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열강의 이권침탈 방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 헌의 6조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및 정치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관민 공동회의 헌의 6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 중추원 관제 반포(1898년)

독립 협회는 정부와 협상을 벌여 관선 의원과 민선 의원을 같은 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설립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 독립 협회의 해산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은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 독립 협회도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정부는 황국 협회를 이용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였고, 결국은 병력을 동원하여 민중들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였다.

황국 협회(皇國協會)

전국의 보부상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보수 세력은 이들에게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게 한 다음, 이를 빌미로 독립 협회를 해산하였다.

 

  • 독립 협회의 의의

독립 협회의 활동은 민중을 개화 운동과 결합시켜 근대적 민중 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근대 문물의
수용

  • 전신

1885년 서울-인천, 서울-의주 전신선이 가설되었다.

 

  • 우편

1884년 우정총국을 설립하고 근대적 우편 제도를 실시하려 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중단되었다.

정부가 우체사를 설립하면서 우편 사업을 다시 시작하였고, 1900년부터는 국제 우편 업무(만국 우편 연합 가입)도 실시하였다.

 

  • 전화

1898년 경운궁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덕률풍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 전기

1887년 경복궁에 최초로 전등을 설치하였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 전기 회사인 한성 전기 회사가 설립되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기 사업을 주도하였다.

묘화라고 불리기도 했다.

 

  • 전차

1899년 한성 전기 회사는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운행하였다.

 

  • 철도

경인선(1899년), 경부선(1905년), 경의선(1906년)이 차례로 개통되었다.

철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 의료 시설
    • 광혜원(제중원) → 세브란스 병원

1885년 갑신정변 때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한 알렌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후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립하였다.

제중원은 나중에 세브란스 병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광제원 → 대한의원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건의로 정부가 관립 의학교와 광제원(1900년)을 설립하였는데, 광제원은 대한 의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 근대 시설
    • 박문국

1883년 박영효의 주도로 박문국에서 한성순보를 발간하였다.

    • 기기창

1883년 기기창에서 서양 무기를 제조하였다.

    • 전환국

1883년 전환국에서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였다.

 

  • 건축
    • 독립문

독립문은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서 건립되었다.

 

    • 덕수궁 석조전

르네상스식의 건물인 덕수궁 석조전이 건립되었다.

 

    • 명동 성당

1898년 중세 고딕식의 건물인 명동 성당이 세워졌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79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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