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회 한능검 심화 35번 해설 – 국채 보상 운동

35번 문제

35. 밑줄 그은 ‘이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① 대한 천일 은행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② 대한매일신보 등의 지원을 받아 확산되었다.

③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모금 활동을 주도하였다.

④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하였다.

⑤ 자작회, 토산 애용 부인회 등의 단체가 참여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907년 서상돈, 김광제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① 대한 천일 은행이 설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개항 직후부터 일본의 금융 기관이 침투하고, 일본 상인에 의한 고리 대금업이 성행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 자본으로 은행들을 설립하였다.

1899년 대한 천일 은행이 세워졌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대한매일신보 등의 지원을 받아 확산되었다.

국채 보상 운동 당시 대한매일신보 등의 언론 기관이 모금을 주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가 모금 활동을 주도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교육에 대한 한국인들의 요구가 높아졌고, 제2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한국인의 힘으로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만들어졌다(1922년 11월).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백정에 대한 사회적 차별 철폐를 목적으로 하였다.

1923년 백정 출신들은 경상 남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고,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자작회, 토산 애용 부인회 등의 단체가 참여하였다.

1920년 조만식, 이상재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여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하였고, 1923년 관세령 폐지 이후 서울에서도 조선 물산 장려회가 만들어지는 등 물산 장려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학생들은 자작회를, 부녀자들은 토산 애용 부인회를 만들어 물산 장려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국채 보상 운동

  • 배경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시설 개선 등의 명목을 내세워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는데, 1907년까지 들여 온 차관 총액은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경제적 예속화 정책에 저항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 국채 보상 운동
    • 전개

1907년 서상돈, 김광제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금연과 금주로 모은 돈과 반지, 비녀 등을 성금으로 냈으며, 여러 단체와 대한 매일 신보 등의 언론 기관도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 결과

일제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인해 국채 보상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근대 금융 자본
  • 근대 금융 자본

개항 직후부터 일본의 금융 기관이 침투하고, 일본 상인에 의한 고리 대금업이 성행함에 따라,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우리 자본으로 은행들을 설립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행, 한성은행, 대한 천일 은행 등이 세워졌다.

 

  • 조선 은행

최초로 설립된 조선 은행은 관료 자본이 중심이 된 민간 은행으로서, 국고 출납 업무를 대행하고 지방에 지점도 두었으나, 곧 폐쇄되었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배경

1910년대 한국인 교육은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에 치중되었고,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한국인도 많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교육에 대한 한국인들의 요구가 높아졌고, 제2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한국인의 힘으로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 전개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만들어졌다(1922년 11월).

이를 바탕으로 출범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는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

 

  • 결과

그러나 일제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방해하고, 잇따른 자연재해로 모금 운동이 어려워지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하였다.

한편 일제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교육하고 한국인의 교육열을 무마하기 위해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

형평 운동

  • 배경

갑오개혁 때 신분 제도가 폐지됨에 따라 그 동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백정도 평등한 지위를 얻었으나 백정 출신에 대한 사회적 차별과 냉대는 일제 강점기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총독부는 새 호적을 만들면서 백정 출신을 호적에 ‘도한’으로 써 넣거나 붉은 점을 찍어 차별하였다. 학교 입학 통지서에도 백정 신분을 밝힘으로써 입학이 거부되거나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일도 많았다.

 

  • 조선 형평사 창립

1923년 백정 출신들은 경상 남도 진주에서 조선 형평사를 창립하고, 평등한 대우를 요구하는 형평 운동을 펼쳐 나갔다.

더 나아가 조선 형평사는 다른 분야의 사회 운동 단체와 협력하면서 파업, 소작 쟁의 등에 참가하는 등 항일 민족 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 구호

공평은 사회의 근본, 모욕적 칭호를 폐지하자!

 

  • 기출 자료
물산 장려 운동
  • 배경

1920년 회사령 철폐 이후 경성 방직 주식회사,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 등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동시에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가 철폐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인 자본가들의 위기 의식이 높아졌다.

1923년 일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를 폐지하여 일본 상품이 한국에서 더 싼값에 팔릴 수 있도록 하였다.

 

  • 목적

이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민족 산업과 자본을 보호·육성하여 민족 경제의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 단체

1920년 조만식, 이상재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여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하였고, 1923년 관세령 폐지 이후 서울에서도 조선 물산 장려회가 만들어지는 등 물산 장려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학생들은 자작회를, 부녀자들은 토산 애용 부인회를 만들어 물산 장려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 구호

물산 장려 운동은 ‘조선인이 만들 것을 입고, 먹고, 쓰자’, ‘조선 사람 조선 것’,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활발히 진행되었다.

 

  • 결과 및 한계

물산 장려 운동은 기업의 생산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상품 가격만 올려놓는 경우가 많아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물산 장려 운동은 점차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79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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