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회 한능검 심화 14번 해설 – 고려 여진 정벌, 고려 대몽 항쟁

14번 문제

14. (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가) 윤관이 포로 346구와 말 96필, 소 300여 마리를 바쳤다. 의주와 통태진·평융진에 성을 쌓고, 함주·영주·웅주·길주·복주, 공험진과 함께 북계 9성이라 하였다.

(나) 그해 12월 16일에 처인부곡의 작은 성에서 적과 싸우던 중 화살로 적의 괴수인 살리타를 쏘아 죽였습니다. 사로잡은 자들이 많았으며 나머지 무리는 무너져 흩어졌습니다.

① 외침에 대비하여 광군을 조직하였다.

② 서희의 활약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③ 이제현이 만권당에서 유학자들과 교유하였다.

④ 묘청 등이 칭제 건원과 금 정벌을 주장하였다.

⑤ 압록강에서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가) 1107년, 예종 때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면 지역에 동북 9성을 설치ㅎ했다.

(나)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했다.

 

① 외침에 대비하여 광군을 조직하였다.

947년 고려 정종 때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광군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했다. 설치 당시의 병력은 30만 명이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서희의 활약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993년 고려 성종 때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하였다.

서희의 담판 외교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이제현이 만권당에서 유학자들과 교유하였다.

1314년 고려 충선왕 때 원에서 만권당을 설치하여, 이제현 등 고려 유학자와 조맹부 등 한족 출신 유학자를 불러모아 서로 교류하게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묘청 등이 칭제 건원과 금 정벌을 주장하였다.

고려 인종 시기 묘청·정지상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했다.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묘청 세력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묘청의 난, 1135년).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압록강에서 도련포까지 천리장성을 축조하였다.

1018년 거란의 3차 침입 후,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고려
여진 정벌
숙종 때 윤관의 지휘 아래 여진 정벌군을 파견하였으나 실패하자, 윤관의 건의를 받아들여 별무반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

별무반 –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편성

1107년, 예종 때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 정벌을 단행하여 여진족을 물리치고, 동북면 지역에 동북 9성을 설치

1115년, 예종 때 강성해진 여진족은 금을 건국. 금은 거란을 멸망시킨 뒤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고,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이 금과 무력 충돌을 피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임

고려
몽골의 침입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을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저고여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는 단절하였다.

 

  • 몽골의 1차 침입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은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강화 천도),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킴

 

  • 몽골의 2차 침입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

 

  • 몽골의 5차 침입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후가 충주성에서 관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

 

  • 피해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

 

  • 개경 환도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 종결. 1270년, 고려 원종 때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

 

  • 삼별초의 항쟁

1270년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몽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삼별초

최우가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으로 구성

고려
서경 천도 운동
  • 서경 천도 운동

고려 인종 시기 묘청·정지상 세력은 풍수지리설을 내세워 서경(평양)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했다.

서경에 대화궁이라는 궁궐을 짓고, 황제를 칭할 것과 금을 정벌하자고 주장하였다.

 

  • 묘청의 난

서경 천도를 통한 정권 장악이 어렵게 되자 묘청 세력은 서경에서 난을 일으켰다(1135년).

이들은 나라 이름을 ‘대위국’이라 하고, 연호를 ‘천개’라 하였다.

하지만 김부식이 이끈 관군의 공격으로 약 1년 만에 진압되고 말았다.

…… 이 사건은 실제로 낭가와 불교 양가 대 유교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 사상 대 보수 사상의 싸움이니, …… 이것을 어찌 일천년래 제일대 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 신채호 –

고려 정종
  • 광군 편성 – 947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광군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했다. 설치 당시의 병력은 30만 명이었다.
고려
거란의 침입
거란의 1차 침입 – 993년 고려 성종 때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 서희의 담판 외교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 확보

거란의 2차 침입 – 1010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트집잡아 다시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

거란의 3차 침입 – 1018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 강감찬이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한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전멸시킴(귀주대첩).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음

고려
충선왕
  • 1314년 원에서 만권당을 설치하여, 이제현 등 고려 유학자와 조맹부 등 한족 출신 유학자를 불러모아 서로 교류하게 함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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