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번 문제
25. (가), (나)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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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가) – 100리 척을 사용하여 동국지도를 제작하였다.
② (가) – 곽우록에서 토지 매매를 제한하는 한전론을 제시하였다.
③ (나) – 의산문답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④ (나) – 여전론을 통해 마을 단위의 공동 경작을 주장하였다.
⑤ (가), (나) –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가)에 해당하는 인물은 박제가이다.
(나)에 해당하는 인물은 정약용이다.
① (가) – 100리 척을 사용하여 동국지도를 제작하였다.
조선 후기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최초로 100리척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가) – 곽우록에서 토지 매매를 제한하는 한전론을 제시하였다.
성호 이익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나) – 의산문답에서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비판하였다.
홍대용은 <의산문답>을 저술하여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나) – 여전론을 통해 마을 단위의 공동 경작을 주장하였다.
정약용은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여전론을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가), (나) –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정제두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 조선 후기 상공업 중심 실학 |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한다.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 박제가에 의하여 더욱 확충되었다.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을 역설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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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농업 중심의 실학 |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이 실학자들을 경세치용 학파(중농 학파)라고도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유형원으로, 일생 동안 농촌에 묻혀 살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반계수록은 조선의 국가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을 담았다. 이 책에서 유형원은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18세기 전반에 주로 활약한 이익이었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내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곽우록>에서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고, <성호사설>에서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익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최대의 학자는 정약용으로, 지방 수령의 기본 자세를 다룬 목민심서, 중앙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경세유표 등을 비롯하여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여전론을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과학 기술과 상공업 발달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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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국학 연구 |
실학의 발달과 함께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였다.
이익은 실증적이며 비판적인 역사 서술을 제시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를 체계화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익의 제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하였다.
이긍익은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하여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한치윤은 500여 종의 중국 및 일본의 자료를 참고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종휘는 동사에서 고구려 역사 연구를 하였다.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사 연구를 심화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고, 북쪽에 발해가 있었으므로 이를 남북국이라 불러야 한다고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국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었다.
역사 지리서로 한백겸의 동국지리지가 나왔다.
역사 지리서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등이 나왔다.
인문 지리서로 이중환의 택리지가 편찬되었다. 이 책은 자연과 인간 생활의 관계를 인과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점에서 주목된다.
중국에서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영조 시기 제작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최초로 100리척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산맥,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하고, 거리를 알 수 있도록 10리마다 눈금이 표시되었으며,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신경준의 음운 연구서인 훈민정음운해가 나왔다.
유희의 음운 연구서인 언문지가 나왔다.
우리의 방언과 해외 언어를 정리한 이의봉의 고금석림이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이 발달하고 문화 인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 사전류의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이 방면의 효시가 된 책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다.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나라가 가난하게 된 원인은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제도 등이 잘못된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고리대 활동과 농민의 게으름도 큰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영⋅정조 때에는 국가적 사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는데, 이 책은 우리 나라의 역대 문물을 정리한 한국학 백과 사전이다.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편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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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농업 중심의 실학 |
18세기 전반에 농업 중심의 개혁론을 제시한 실학자들은 농촌 사회의 안정을 위하여 농민의 입장에서 토지 제도를 비롯한 각종 제도의 개혁을 추구하였다. 이 실학자들을 경세치용 학파(중농 학파)라고도 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농민 생활의 안정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7세기 후반에 활약한 유형원으로, 일생 동안 농촌에 묻혀 살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 반계수록을 저술하였다. 반계수록은 조선의 국가 체제 전반에 걸친 개혁론을 담았다. 이 책에서 유형원은 균전론을 내세워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양반 문벌 제도, 과거 제도, 노비 제도의 모순을 비판하였다.
농업 중심 개혁론을 더욱 발전시키고 이를 대표하는 사람은 18세기 전반에 주로 활약한 이익이었다. 그는 유형원의 실학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으며, 많은 제자를 길러 내 학파를 형성하였다. 그는 <곽우록>에서 자영농 육성을 위한 토지 제도 개혁론으로 한전론을 주장하고, <성호사설>에서 나라를 좀먹는 여섯 가지의 폐단을 지적하기도 하였다.
이익의 실학 사상을 계승하면서 실학을 집대성한 최대의 학자는 정약용으로, 지방 수령의 기본 자세를 다룬 목민심서, 중앙 행정의 개혁에 대하여 쓴 경세유표 등을 비롯하여 500여 권의 저술을 남겼다. 그는 토지 제도의 개혁론으로 여전론을 처음에 내세웠다가 후에 정전제를 현실에 맞게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정약용은 과학 기술과 상공업 발달에도 많은 관심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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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천문학과 지도 |
천문학은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김석문은 지전설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장하여 우주관을 크게 전환시켰다.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으며, 김석문과 함께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지전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해 갔다. <의산문답>을 저술하여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주해수용을 저술하여 조선ㆍ중국ㆍ서양 수학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였다.
역법은 김육 등의 노력으로 시헌력이 도입되었다. 이는 서양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청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종전의 역법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약 6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시헌력을 채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를 통하여 당시 조선인의 세계관이 확대될 수 있었다.
최한기가 저술한 지구전요는 국외의 각종 지리서를 참조하여 편찬한 세계지리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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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양명학의 수용 |
실천성 강조 – 성리학의 절대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은 중종 때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이단 – 학자들 사이에 관심을 끌어가던 양명학은 이황이 정통 주자학 사상과 어긋난다며 비판하면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양명학 – 양명학은 인간의 마음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心卽理) 바탕으로, 인간이 상하 존비의 차별 없이 본래 타고난 천리(天理)로서의 양지를 실현하여 사물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치양지설(致良知說), 그리고 앎과 행함이 분리되거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앎은 행함을 통해서 성립한다는 지행합일설( 知行合一說) 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강화 학파 – 18세기 초에 정제두는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몇몇 소론 학자가 명맥을 이어가던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학파로 발전시켰다. |
기출 문제 키워드
- 실학
- 박제가
- 북학의
- 정약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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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전제
- 조선 후기 상공업 중심 실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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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전론
- 홍대용
- 의산문답
- 정제두
- 양명학
- 강화 학파
2023년 제6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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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회 한능검 심화 4번 해설 – 분황사 모전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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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회 한능검 심화 7번 해설 – 통일 신라 신문왕
- 67회 한능검 심화 8번 해설 – 통일 신라 말의 정치 변동
- 67회 한능검 심화 9번 해설 – 발해
- 67회 한능검 심화 10번 해설 – 후삼국 통일 과정
- 67회 한능검 심화 11번 해설 – 고려 광종
- 67회 한능검 심화 12번 해설 – 고려 현종
- 67회 한능검 심화 13번 해설 – 최충헌
- 67회 한능검 심화 14번 해설 – 고려 여진 정벌, 고려 대몽 항쟁
- 67회 한능검 심화 15번 해설 – 원나라의 일본 원정
- 67회 한능검 심화 16번 해설 – 논산 관촉사 석조 미륵보살 입상
- 67회 한능검 심화 17번 해설 – 고려 국자감
- 67회 한능검 심화 18번 해설 – 고려 중앙 조직
- 67회 한능검 심화 19번 해설 – 위화도 회군
- 67회 한능검 심화 20번 해설 – 고려사
- 67회 한능검 심화 21번 해설 – 유향소
- 67회 한능검 심화 22번 해설 – 김종서
- 67회 한능검 심화 23번 해설 – 조선 후기
- 67회 한능검 심화 24번 해설 – 임진왜란 전투
- 67회 한능검 심화 25번 해설 – 박제가, 정약용
- 67회 한능검 심화 26번 해설 – 조선 후기 군사 제도 변화
- 67회 한능검 심화 27번 해설 – 조선 정조
- 67회 한능검 심화 28번 해설 – 황사영 백서 사건
- 67회 한능검 심화 29번 해설 – 신미양요
- 67회 한능검 심화 30번 해설 –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 조일통상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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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회 한능검 심화 32번 해설 – 동학 농민 운동
- 67회 한능검 심화 33번 해설 – 육영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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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회 한능검 심화 38번 해설 – 광주 학생 항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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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7회 한능검 심화 49번 해설 – 박정희 정부
- 67회 한능검 심화 50번 해설 – 통일을 위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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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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