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회 한능검 심화 24번 해설 – 임진왜란 전투

24번 문제

24. 다음 기사에 보도된 전투 이후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항전하였다.

②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적군을 격퇴하였다.

③ 이순신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④ 신립이 탄금대 앞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다.

⑤ 최윤덕이 올라산성에서 이만주 부대를 정벌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임진왜란 시기 중인 1593년 2월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했다.

 

①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항전하였다.

1592년 5월 임진왜란 발발 직후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적군을 격퇴하였다.

1593년 3월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적군을 격퇴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이순신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1592년 8월 이순신이 한산도 앞바다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신립이 탄금대 앞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다.

1592년 6월 신립이 탄금대 앞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최윤덕이 올라산성에서 이만주 부대를 정벌하였다.

임진왜란 전인 조선 세종 때 최윤덕이 올라산성에서 이만주 부대를 정벌하고 4군 6진을 개척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임진왜란
  • 배경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 임진왜란 발발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항전하였지만 패배

신립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지만 패배

 

  • 이순신과 수군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둠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 사용

 

  • 의병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점령된 지역을 수복. 이를 북관대첩이라고 함.

 

  • 육군

이덕형이 구원병 요청을 위해 명에 청원사로 파견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 방어(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패배시킴(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 주요 전투

동래성 전투 – 1592년 5월

탄금대 전투 – 1592년 6월

한산도 대첩 – 1592년 8월

제1차 진주성 전투 – 1592년 10월

평양성 전투 – 1593년 2월

행주 대첩 – 1593년 3월

명량 대첩 – 1597년 10월

노량 해전 – 1598년 12월

 

  • 훈련도감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 정유재란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 임진왜란의 영향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조선 세종
  • 집현전 설치

집현전 학사는 학문 연구와 아울러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의 통치를 자문하였다. 이 기능은 뒤에 홍문관으로 이어졌다.

  • 의정부 서사제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이다.

  • 쓰시마섬 정벌

1419년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 4군 6진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다.

  • 계해약조

3포 개항 이후 세종 25년(1443년)에 계해약조를 맺어 쓰시마 도주에게 세사미두 200석, 세견선 50척으로 허용해 주었다.

  • 훈민정음 창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1443년)하여 반포하였다(1446년).

  • 지도·지리지

세종 때 전국 지도로서 팔도도를 만들었고, 지리지의 편찬도 추진되어 신찬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다.

  • 삼강행실도

세종 때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 과학 

천체 관측기구로 혼천의(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을 만들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년)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 칠정산

세종 때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 갑인자

세종 때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장영실, 이천 등이 제작하였다.

  • 총편등록

세종 때 화약 무기의 제작과 그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하였다.

  • 농사직설

세종 때 정초 등이 편찬한 농사직설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최초의 농서로서 중국의 농업 기술을 수용하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농법을 정리하였다.

  • 공법

토지 비옥도와 풍흉의 정도에 따라 전분6등법, 연분9등법으로 바꾸고,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도록 하는 공법을 실시하였다.

  • 의학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다.

  • 부민고소금지법

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들이 경외의 상급 관리들에 대해 고소를 금지하는 부민고소금지법을 시행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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