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회 한능검 심화 27번 해설 – 조선 정조

27번 문제

27. (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으로 옳은 것은? [1점]

①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되었다.

② 명의 신종을 제사 지내는 만동묘가 설치되었다.

③ 문신을 재교육하기 위한 초계문신제가 실시되었다.

④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는 탕평비가 성균관에 건립되었다.

⑤ 비변사의 혁파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이 정상화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위 자료는 조선 정조에 대한 내용이다.

 

①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되었다.

조선 현종 때 효종과 효종비의 죽음으로 자의 대비의 복상 문제로 예송이 전개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명의 신종을 제사 지내는 만동묘가 설치되었다.

조선 숙종 때 명의 신종을 제사 지내는 만동묘가 설치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문신을 재교육하기 위한 초계문신제가 실시되었다.

조선 정조 때 초계문신제가 실시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는 탕평비가 성균관에 건립되었다.

조선 영조 때 탕평비가 건립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비변사의 혁파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이 정상화되었다.

조선 고종 때이자 흥선 대원군의 집권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조선 후기
정조의 탕평 정치
  • 조선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
  • 탕평 정치 시행
  • 초계문신제 실시 –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
  • 규장각 설치 – 규장각은 학문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구. 서얼 출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
  • 장용영 설치 –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
  • 수원 화성 건설
  • 신해통공 실시 –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도성 안에서 시전 상인이 아닌 난전의 상업 활동 허락
  •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규장전운’, ‘무예도보통지’ 등 수많은 책 편찬
  • 중국에서 <고금도서집성> 수입
조선 후기
붕당 정치 전개
  • 정여립 모반 사건

붕당 정치 초기에는 동인이 우세한 가운데 정국이 운영되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발생
↙    분화     ↘
북인(급진파) 남인(온건파)
서경덕, 조식 이황, 이언적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 인조 반정

광해군의 지지 세력인 북인은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다.

또한 북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광해군의 영창 대군 살해와 인목 대비 유폐 등으로 결국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과 북인은 몰락하였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 산림이란 이름으로 재야에서 그 여론을 주재하였다.

산림

시골에 은거해 있던 학덕이 높은 학자 가운데 국가의 부름을 받아 특별 대우를 받던 사람으로 붕당 정치기의 사상적 지주였다.

 

  • 예송

현종 때까지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된 채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 1차 예송

1659년 기해예송.

기년복 1년.

효종이 죽은 뒤 자의대비의 상복 입는 기간을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므로 1년을, 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첫째 아들로 대우하여 3년을 입을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1년설이 채택되었다.

당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 2차 예송

1674년 갑인예송.

기년복 1년.

효종비가 죽은 뒤 또 자의대비의 복제가 문제 되었는데, 서인은 9개월설을, 남인은 1년설을 주장하여 1년설이 채택되었다.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이 약화되고 남인 중심의 정국이 운영되었다.

조선 후기
영조의 탕평 정치
  • 이인좌의 난 발생
  • 탕평 정치 실시. 탕평책.

탕평비

  • 탕평비 설치 – 1742년 붕당의 폐해를 경계하기 위한 탕평비가 건립되었다. 탕평책을 펼쳐 붕당의 다툼을 없애려 한 영조의 의지가 담겨 있다.
  • 준천사를 설치하여 청계천을 준설함으로서 청계천의 범람 피해와 하수처리 문제를 해결
  • 산림 존재 불인정
  • 서원 대폭 정리
  • 이조 전랑 권한 약화
  • 균역법 시행
  • ‘속대전’, ‘속오례의’, ‘동국문헌비고’ 편찬
  • 신문고 부활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 안동 김씨 축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가문의 중심 인물들을 몰아내고 당파와 관계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다.

 

  • 비변사 기능 축소·폐지

세도 정권의 핵심 권력 기구로 왕권을 제약하였던 비변사를 축소하여 사실상 폐지하였다.

 

  • 의정부와 삼군부 부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켜 행정권과 군사권을 나누어 맡도록 함으로써 권력 독점을 견제하였다.

 

  • <대전회통>, <육전조례> 편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 경복궁 중건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 원납전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거두었다.

 

  • 당백전

고액 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하였다.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물가가 크게 오르기도 하였다. 무리한 경복궁의 중건은 양반과 백성의 불만을 샀다.

당백전

 

  • 서원 철폐

흥선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다. 이에 지방 유생들과 양반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만동묘가 이때 철폐되었다.

 

  • 호포제

군역 면제 대상인 양반을 포함하여 모든 가구에 군포를 동등하게 부과하게 하였다.

 

  • 사창제

환곡을 개혁하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7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