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44.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 |
① 청산리 대첩에서 활약하였어요.
② 연통제와 교통국을 운영하였어요.
③ 자유시 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었어요.
④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조직이었어요.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조선 의용대는 항일 투쟁에 대한 노선이 나뉘어져 분화되었다.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원하는 조선 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결성했다.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호가장 전투 등이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김원봉을 포함한 조선 의용대 본대 잔류 인원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① 청산리 대첩에서 활약하였어요.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연통제와 교통국을 운영하였어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자유시 참변으로 큰 타격을 입었어요.
간도 참변 후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1921년)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중국 관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한인 무장 조직이었어요.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아래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 부대인 조선 의용대가 김원봉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④번이다.
일제가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키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독립군은 보다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각각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승리했다.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의 일부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고, 한국광복군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신개령 전투, 통화현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만주 일대에서 무장 투쟁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1935년 중국 난징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의 연결선상에서 김원봉, 조소앙, 지청천 등이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민족 혁명당 결성에는 김구를 제외한 한국 독립당,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 혁명당, 대한독립당 등이 참여하였다.
1935년 민족 혁명당에 합류하지 않은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의열단의 김원봉의 전권 장악에 반발한 한국 독립당계(조소앙)와 신한 독립당계(지청천 또는 이청천)가 탈퇴한 후, 민족 혁명당은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개편됐다. 탈퇴한 조소앙은 한국 독립당을 재건했다. 탈퇴한 지청천(또는 이청천)은 조선 혁명당을 재건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민족 혁명당은 다른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아래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 부대인 조선 의용대가 김원봉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조선 의용대는 일본군의 정보 수집, 포로 신문, 후방 교란, 심리전 등을 수행하였다.
조선 의용대는 항일 투쟁에 대한 노선이 나뉘어져 분화되었다.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원하는 조선 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결성했다.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호가장 전투 등이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김원봉을 포함한 조선 의용대 본대 잔류 인원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만주 지역 곳곳에 만들어진 항일 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을 조직하였다(1933년).
이후 동북 인민 혁명군은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반일 세력을 받아들인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확대·개편되었다(1936년).
동북 항일 연군 내의 한 부대로 편성된 한인 유격대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까지 포함하여 조국 광복회를 결성하였다(1936년). 1937년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가들의 지원 아래 함경도 보천보의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보천보 전투). |
|||||||||||||||||||||||||||||||||||||||||||||||||||
3·1 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인 전개가 지름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패한 일제는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고(훈춘 사건),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였다.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독립군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큰 시련을 겪고 만주로 돌아와 조직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재정비하였다. 이들 3부는 한인 사회를 자치적으로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 등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압록강 연안 지역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설립되었다.
남만주 지린성과 봉천성 일대를 담당했다.
북만주 지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독립군의 탄압을 위하여 맺어진 이른바 미쓰야 협정에 의해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다. 이 협정은 일제와 만주 군벌이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이었다.
1920년대 후반 제1차 국공 합작의 영향으로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 남만주에는 국민부가,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가 조직되었다. 양세봉 등이 중심이 된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아래에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지청천 등이 중심이 된 혁신 의회는 해체된 후,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이 창설되었다.
|
|||||||||||||||||||||||||||||||||||||||||||||||||||
3⋅1 운동 후 독립 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여러 지역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연해주에서는 대한 국민 의회가 조직되었다. 대통령 손병희, 국무총리 이승만 선임. 서울에서는 13도 대표가 모여 한성 정부가 수립되었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 총리 이동휘 선임.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의정원 구성, 국무총리 이승만 선임.
정부 통합 운동은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성사되었다.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를 계승하고, 대한 국민 의회를 흡수하여 상하이에 통합 정부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년 9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각지의 임시 정부를 통합한 후,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추대하였다. 헌정 체제를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으로 구성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 공화제 정부로 출범하였다.
임시 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 조직망이었다. 연통제는 임시 정부의 지방 행정 기관으로 국내의 각 도, 군, 면에 독판, 군감, 면감을 두어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교통국은 통신 기관으로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임시 정부 활동에는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였다. 임시 정부는 이 자금을 독립 공채의 발행이나 국민의 의연금으로 마련하였다. 국내외에서 수합된 자금은 연통제나 교통국의 조직망에 의해 임시 정부에 전달되었으며, 또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전달되기도 하였다.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다. 또한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임시 정부는 정부 조직에 군무부를 설치하여 군사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군무부 아래에는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 총영 등을 두었으며, 이후 육군 주만 참의부(1924년)를 편성하여 무장 투쟁을 펼쳤다.
임시 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1920년대 초 일제의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이 발각되어 자금 사정은 어려워졌다. 또한 임시 정부 내에서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외교 활동은 강대국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을 계기로 신채호, 박용만 등의 무장 투쟁론자들은 이를 문제 삼아 임시 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어 여러 민족 운동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 정부의 조직만 바꾸자는 개조파의 대립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떠났다.
1925년 임시 의정원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곧이어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바꾸고 일종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이동녕과 김구 등을 중심으로 체제를 재정비해 나갔다.
|
|||||||||||||||||||||||||||||||||||||||||||||||||||
기출 문제 키워드
2025년 제7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 제73회 한능검 기본 1번 해설 – 청동기 시대
- 제73회 한능검 기본 2번 해설 – 부여
- 제73회 한능검 기본 3번 해설 – 금관가야
- 제73회 한능검 기본 4번 해설 – 승려 의상
- 제73회 한능검 기본 5번 해설 – 소수림왕
- 제73회 한능검 기본 6번 해설 – 신라
- 제73회 한능검 기본 7번 해설 – 백제 멸망
- 제73회 한능검 기본 8번 해설 – 백제 사비
- 제73회 한능검 기본 9번 해설 – 발해
- 제73회 한능검 기본 10번 해설 – 견훤
- 제73회 한능검 기본 11번 해설 – 강동 6주
- 제73회 한능검 기본 12번 해설 – 고려 건축
- 제73회 한능검 기본 13번 해설 – 이자겸의 난
- 제73회 한능검 기본 14번 해설 – 고려 역사서
- 제73회 한능검 기본 15번 해설 – 고려 몽골의 침입
- 제73회 한능검 기본 16번 해설 – 고려 구휼 기관
- 제73회 한능검 기본 17번 해설 – 고려 공민왕
- 제73회 한능검 기본 18번 해설 – 고려 지눌
- 제73회 한능검 기본 19번 해설 – 이성계
- 제73회 한능검 기본 20번 해설 – 조선-일본 관계
- 제73회 한능검 기본 21번 해설 – 조선 세종
- 제73회 한능검 기본 22번 해설 – 석탑
- 제73회 한능검 기본 23번 해설 – 민속놀이
- 제73회 한능검 기본 24번 해설 – 임진왜란
- 제73회 한능검 기본 25번 해설 – 조선 시대 여성
- 제73회 한능검 기본 26번 해설 – 김홍도
- 제73회 한능검 기본 27번 해설 – 조선 정조
- 제73회 한능검 기본 28번 해설 – 기기창
- 제73회 한능검 기본 29번 해설 – 신미양요
- 제73회 한능검 기본 30번 해설 – 지역의 역사
- 제73회 한능검 기본 31번 해설 – 박규수
- 제73회 한능검 기본 32번 해설 – 동학 농민 운동
- 제73회 한능검 기본 33번 해설 – 독립 협회
- 제73회 한능검 기본 34번 해설 – 러일 전쟁
- 제73회 한능검 기본 35번 해설 – 을사늑약
- 제73회 한능검 기본 36번 해설 – 전환국 화폐
- 제73회 한능검 기본 37번 해설 – 정미의병
- 제73회 한능검 기본 38번 해설 – 일제 무단 통치
- 제73회 한능검 기본 39번 해설 – 3.1 운동
- 제73회 한능검 기본 40번 해설 – 신간회
- 제73회 한능검 기본 41번 해설 – 물산 장려 운동
- 제73회 한능검 기본 42번 해설 – 민족 말살 통치
- 제73회 한능검 기본 43번 해설 – 홍범도
- 제73회 한능검 기본 44번 해설 – 조선 의용대
- 제73회 한능검 기본 45번 해설 – 나운규 아리랑
- 제73회 한능검 기본 46번 해설 – 수출액 100억 달러
- 제73회 한능검 기본 47번 해설 – 6.25 전쟁
- 제73회 한능검 기본 48번 해설 – 김영삼 정부
- 제73회 한능검 기본 49번 해설 – 6월 민주 항쟁
- 제73회 한능검 기본 50번 해설 – 통일을 위한 노력
- 제73회 한능검 기본 1번~50번 전체 해설
한국사 시험 모음
- 연표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1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1점 문제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고급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중급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초급
- 한국사 공무원 시험
- 한국사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연표
- 선사 ~ 고조선 역사 연표
- 삼국 시대 역사 연표
- 통일 신라 발해 남북국 시대 역사 연표
- 후삼국·고려 시대 역사 연표
- 조선 전기 역사 연표
- 조선 후기 역사 연표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역사 연표
- 일제 강점기 역사 연표
- 현대사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