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회 한능검 심화 21번 해설 – 신숙주

21번 문제

21. 밑줄 그은 ‘그’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①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참여하였다.

②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③ 기축봉사를 올려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웠다.

④ 해주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⑤ 가례집람을 지어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위 자료의 인물은 조선 전기에 활동한 신숙주이다.

 

①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참여하였다.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이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참여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이 옳다.

 

②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풍기 군수 주세붕이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기축봉사를 올려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웠다.

송시열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해주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율곡 이이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가례집람을 지어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하였다.

조선 선조 때 김장생은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한 가례집람을 저술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①번이다.

 

조선 전기
일본과의 관계
  • 교린 정책

조선은 일본과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사신 접대를 위해 한양에 동평관을 두었다.

 

  • 쓰시마 섬 정벌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에 대한 토벌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루어졌다. 1419년(세종 1)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 3포 개항과 계해약조

왜구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계해약조(1443년)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

 

  • 해동제국기

세종 때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왕의 명령에 따라 쓴 견문기이다.

훈민정음 창제 훈민정음 창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반포하였다(1446년).

한글은 누구나 쉽게 배우고 쓸 수 있으며, 자기의 의사를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글자를 만드는 원리가 매우 과학적인 뛰어난 문자이다.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성삼문, 이개, 이선로, 강희안 등이 훈민정음 해례본 편찬에 참여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한글 도서 편찬

조선 정부는 한글을 보급시키기 위하여 왕실 조상의 덕을 찬양하는 용비어천가, 부처님의 덕을 기리는 월인천강지곡 등을 지어 한글로 간행하였다.

월인천강지곡

훈민정음이 창제되고, 왕비인 소헌왕후가 죽자 세종은 명복을 빌기 위해 아들인 수양대군에게 부처의 일대기와 설법을 담은 석보상절을 편찬하도록 했다. 석보상절을 한글로 옮긴 것이 월인천강지곡이다.

 

또, 불경, 농서, 윤리서, 병서 등을 한글로 번역하거나 편찬하였다.

조선 전기
향약과 서원
  • 향약

지방 사족은 향촌 사회를 그들 중심으로 운영하기 위해 향약 조직을 만들었다. 향약은 조선 중종 때 조광조가 처음 시행한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본래 향촌에서는 마을 단위로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돕는 풍습이 있었다. 향약은 이러한 전통적 공동 조직과 미풍양속을 계승하면서, 삼강오륜을 중심으로 한 유교 윤리를 가미하여 교화 및 질서 유지에 알맞게 구성한 것이다.

향약은 조선 사회의 풍속 교화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향촌 사회의 질서 유지와 함께 치안까지 담당하는 등 향촌의 자치 기능을 맡았다. 향약의 보급으로 지방 사림의 지위는 강화되었으나, 지방 유력자가 주민을 위협, 수탈하는 배경을 제공하는 등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향약의 4대 절목

1. 덕업을 서로 권함(德業相勸).

2. 과실을 서로 규제함(過失相規).

3. 예속으로 서로 사귐(禮俗相交).

4. 환난을 서로 도와 줌(患難相恤).

기출 자료

해주 향약 입약 범례문

무릇, 뒤에 향약에 가입하기를 원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먼저 규약문을 보여 몇 달 동안 실행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헤아려 본 뒤에 가입하기를 청하게 한다. 가입을 청하는 자는 반드시 단자에 참가하기를 원하는 뜻을 자세히 적어서 모임이 있을 때에 진술하고, 사람을 시켜 약정(約正)에게 바치면 약정은 여러 사람에게 물어서 좋다고 한 다음에야 글로 답하고, 다음 모임에 참여하게 한다.

율곡전서

 

  • 서원

서원은 풍기 군수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 서원이 시초이다. 백운동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조선 명종 이후 소수 서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16세기 이후 각 지방에서 생겨나기 시작한 서원도 향약과 함께 사림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다. 서원은 유교 윤리를 보급하고 향촌 사림을 결집, 강화시키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송시열
  • 조선 효종 시기 북벌 준비
  • 기축봉사를 올려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움
  • 기해 예송 당시 기년복 1년이라는 기년설을 주장
  • 숙종 시기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데 반대하여 기사환국 발생. 제주도 유배 후 사망.
  • 서인 → 노론
조선 전기
성리학의 발달
  • 성리학의 정착
    • 관학파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 사림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에서 비롯된 사학파의 학문적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 성리학의 융성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 서경덕과 이언적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리론은 도덕적 원리를 중시하는 학설로, 이언적에서 시작하여 이황이 대성하였다.

주기론은 경험적 세계를 중시하는 학설로, 서경덕이 처음 주장하고 이이가 이를 크게 발전시켰다.

 

      • 서경덕·조식(주기론)

서경덕은 이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 이언적(주리론)

이언적은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이황과 이이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 이황(주리론)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황은 기대승과 사단 칠정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 이이(주기론)

이이는 이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격몽요결,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저술하여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해주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공물을 쌀로 받는 방안을 제안하였다(대동법).

성학십도와 성학집요의 차이점

성학십도에서는 군주 스스로가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한 반면, 성학집요에서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학파의 형성과 대립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 동인과 서인

선조 때에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 동인의 분화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이황 학파의 남인과, 서경덕 학파와 조식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남인 북인
이황, 이언적 서경덕, 조식

 

    • 서인과 남인

광해군 때, 북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남인 북인
이황, 이언적 서경덕, 조식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는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 예학의 발달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78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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