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회 한능검 심화 45번 기출 해설 – 6.25 전쟁

45번 문제

45. 밑줄 친 ‘이 전쟁’ 중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1점]

①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었다.

②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

③ 여수 · 순천 10 · 19 사건이 발생하였다.

④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⑤ 흥남에서 대규모 철수 작전이 전개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이후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였다. 동시에 북한군의 전력 분산을 위한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

 

① 애치슨 라인이 발표되었다.

1950년 1월,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

6.25 전쟁이 끝난 이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1953년 10월). 이에 따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여수 · 순천 10 · 19 사건이 발생하였다.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파견하려 핬다.

하지만 군대 내 좌익 세력이 출동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을 일시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여수·순천 10·19 사건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국에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흥남에서 대규모 철수 작전이 전개되었다.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가운데 흥남 철수 작전도 이뤄졌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6⋅25 전쟁
  • 배경
    • 미국·소련 군대 철수

냉전이 심화하는 가운데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서 군대를 철수시켰다.

 

    • 38도선 무력 충돌

이 무렵 남한과 북한은 서로의 체제를 비난하면서 38도선 부근에서 크고 작은 무력 충돌을 벌였다.

 

    • 중국의 공산화 및 중·소의 북한 지원

1949년 10월,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중국 공산당은 중화 인민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국공 내전에 참여하였던 조선 의용군이 북한에 편입되어 북한의 군사력이 강화되었다.

북한은 중국은 물론 소련에서도 군사 지원을 받았다.

소련은 북한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였으며, 중국도 필요한 경우 참전할 것을 약속하였다.

 

    • 애치슨 선언

1950년 1월, 미국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한다는 애치슨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벌어져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하였다.

 

  • 6⋅25 전쟁 전개
    • 북한군의 기습 남침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6·25 전쟁이 시작되었다.

부산이 임시 수도가 되었다.

 

    • 유엔군의 참전

유엔은 전쟁이 나자 안전 보장 이사회를 소집하여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미국을 중심으로 한 16개국이 유엔군을 파견하였다.

 

    • 인천 상륙 작전

1950년 9월 15일, 유엔군과 국군은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하였다. 동시에 북한군의 전력 분산을 위한 장사 상륙 작전이 진행되었다.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한 후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북진하였다.

1950년 11월 1일, 국군∙유엔군이 압록강까지 최대로 북진하였다.

 

    • 중공군 참전

1950년 10월, 중국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연합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였으며, 이 가운데 흥남 철수 작전도 이뤄졌다.

 

    • 1·4후퇴

1951년 1월 4일에는 다시 서울이 함락되었다.

이후 전세는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들어갔다.

 

    • 정전 협정
      • 소련의 정전 제안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소련은 국제 연합(UN)에 정전을 제안하였다.

 

      • 정전 회담 쟁점

정전 회담의 주요 쟁점은 군사 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였다.

유엔군 측은 포로의 자유송환을, 공산군 측은 강제송환을 주장했다.

 

      • 반공 포로 석방

정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정부는 27,000여 명에 이르는 반공 포로를 석방하여 정전 회담은 큰 위기를 맞기도 했다.

 

      • 정전 협정 체결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조인됨으로써 3년여 만에 6·25 전쟁은 정전으로 매듭지어졌다.

휴전협정에 서명한 나라는 미국, 북한, 중국이다.

휴전협정으로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단이 설치되었다.

 

  •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전쟁이 끝난 이후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이 체결되었다(1953년). 이에 따라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하였고, 미국의 영향력은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강화되었다.

여수·순천
10·19 사건
  • 여수·순천 10·19 사건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파견하려 핬다.

하지만 군대 내 좌익 세력이 출동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을 일시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여수·순천 10·19 사건이다.

 

  • 국가 보안법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인해 국가 보안법이 제정되었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 회의가 개최되었다.

모스크바의 3국 외상 회의에서는 한국에 조선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하기 위하여 미⋅소 공동 위원회를 설치하고,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의 4개국이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고 결정하였다.

신탁 통치(信託統治)

한민족이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미⋅영⋅중⋅소 4개국이 한반도를 최고 5년간 공동 관리하겠다는 방안

 

  • 국내 반응
    • 우익

우익인 민족주의 진영은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신탁 통치 반대 운동(반탁)을 펼쳤다.

민족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신탁 통치 반대 국민 총동원 위원회를 결성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반탁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승만은 대한 독립 촉성 국민회를 조직하고 반탁 운동을 전개하였다.

 

    • 좌익

좌익인 공산주의 진영은 초기에는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3국 외상 회의 결정의 본질이 민주주의 임시 정부 수립에 있다고 보고, 회의 결정에 대한 총체적 지지로 입장(찬탁)을 바꾸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78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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