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회 한능검 심화 32번 해설 – 절영도 조차 요구

32번 문제

32. (가) 단체에 대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파리의 외무부 장관께

부산 근처에 있는 절영도에 러시아 정부가 설치하기를 요청한 저탄소 문제를 보고한 바 있습니다. …… 민종묵은 일본이 이미 누렸던 혜택과 동일한 것을 요구하는 러시아의 청을 거절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해당 요청에 동의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외부의 모든 관리들이 그에 협조할 것을 거부하였습니다. …… (가)은/는 외부 대신에게 과거 양도했던 절영도의 부지를 회수하려는 조정의 뜻을 일본에 전하도록 촉구했습니다. 이 전례가 없어지면 러시아는 이 특혜를 요구하려는 명분조차 잃게 될 것입니다. 이와 더불어 (가)은/는 탁지부 대신에게도 서신을 보내 한러 은행과의 모든 재정 거래에 이의를 제기하라고 주장했습니다.

주 대한 제국 대리 공사 V. 콜랭 드 플랑시 올림

① 치안 유지법 제정의 목적을 알아본다.

② 헤이그 특사 파견의 영향을 파악한다.

③ 만민 공동회의 토의 내용을 조사한다.

④ 산미 증식 계획의 추진 과정을 살펴본다.

⑤ 국민 대표 회의의 개최 배경을 찾아본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897년 러시아가 저탄소(석탄 저장소) 설치를 위해 절영도의 조차를 요구하자,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저탄소 철거까지 주장하여 마침내 러시아의 요구를 좌절시켰다.

또한 한·러 은행을 폐쇄하는데 성공했다.

 

① 치안 유지법 제정의 목적을 알아본다.

1925년 일제는 치안 유지법을 제정하여 항일 민족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하여 많은 한국인을 구속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헤이그 특사 파견의 영향을 파악한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였다.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만민 공동회의 토의 내용을 조사한다.

1896년 서재필은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

이 무렵, 러시아의 침략적 간섭은 여전하였다.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파견하고, 한러 은행 설립, 절영도 조차 등 이권 침탈을 시도하였다. 또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독립 협회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1898년).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산미 증식 계획의 추진 과정을 살펴본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공업이 더욱 발달하고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식량 문제에 부딪혔다.

이에 일제는 192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여 그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국민 대표 회의의 개최 배경을 찾아본다.

1920년대 초 일제의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이 발각되어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자금 사정은 어려워졌다.

또한 임시 정부 내에서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외교 활동은 강대국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을 계기로 신채호, 박용만 등의 무장 투쟁론자들은 이를 문제 삼아 임시 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어 여러 민족 운동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 정부의 조직만 바꾸자는 개조파의 대립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떠났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독립 협회의
이권 수호 운동

  • 배경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조선의 이권 침탈에 열을 올렸다.

 

  • 독립 협회의 이권 수호 운동

독립 협회는 열강들의 이권 침탈에 저항하여 이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 내용

1897년 러시아가 저탄소(석탄 저장소) 설치를 위해 절영도의 조차를 요구하자,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저탄소 철거까지 주장하여 마침내 러시아의 요구를 좌절시켰다.

또한 한·러 은행을 폐쇄하는데 성공했다.

독립 협회
  • 배경 – 아관파천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

  • 열강의 이권 침탈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권층은 친러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외세의 침투가 계속되어 나라의 자주권이 크게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 독립 협회 창립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년).

  • 독립 협회 활동
    • 독립문과 독립관

독립 협회는 첫 사업으로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자주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는 등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독립 협회는 독립관에서 교육과 산업 진흥, 자주독립 등의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민중을 계몽하였다.

 

  • 자주 국권 운동
    • 만민 공동회

이 무렵, 러시아의 침략적 간섭은 여전하였다.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파견하고, 한러 은행 설립, 절영도 조차 등 이권 침탈을 시도하였다. 또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독립 협회 회원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1898년).

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종로 광장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의 자주 독립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수시로 만민 공동회를 열고, 외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 및 토지 조차 요구 등에 대항하여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려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국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다.

 

  • 자주 민권 운동
    • 국민 참정권 운동

자주 국권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증대되고 민권 의식이 고양되어 자유 민권 운동도 전개되었다.

나아가,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국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독립 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하여,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 참정 운동과 국정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 같은 활동을 통하여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 자강 개혁 운동
    • 관민 공동회

1898년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켜 관민 공동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백정 출신인 박성춘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열강의 이권침탈 방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 헌의 6조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및 정치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관민 공동회의 헌의 6조

1. 외국인에게 의지하지 말 것.

2. 외국과의 이권에 관한 계약과 조약은 각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국가 재정은 탁지부에서 전관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를 공판하되,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을 임명할 때에는 정부에 그 뜻을 물어서 중의에 따를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 중추원 관제 반포(1898년)

독립 협회는 정부와 협상을 벌여 관선 의원과 민선 의원을 같은 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설립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 독립 협회의 해산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은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 독립 협회도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정부는 황국 협회를 이용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였고, 결국은 병력을 동원하여 민중들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였다.

황국 협회(皇國協會)

전국의 보부상으로 조직된 단체로서, 보수 세력은 이들에게 만민 공동회가 열리는 곳에서 소란을 피우게 한 다음, 이를 빌미로 독립 협회를 해산하였다.

 

  • 독립 협회의 의의

독립 협회의 활동은 민중을 개화 운동과 결합시켜 근대적 민중 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문화 통치

  • 1920년 ~ 1936년

 

  • 배경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3⋅1 운동과 그로 인하여 악화된 국제 여론에 직면한 일제는 식민 통치 정책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일제의 문화 통치는 친일파를 길러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려는 정책으로서, 우리 민족의 단결을 억제하고 독립 운동을 막으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 문화 통치의 실상
    • 문관 총독 임명

일제는 지금까지 현역 군인으로 조선 총독을 임명, 파견하던 것을 고쳐 문관도 그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일제가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다.

 

    • 보통 경찰 제도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다

하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 그리고 그 유지비는 3⋅1 운동 이전보다 크게 증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등 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시켰다.

 

    • 언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우리 민족의 신문 발행이 허가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언론에 대해서 검열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 기사는 마음대로 삭제하였고, 더 나아가 신문의 정간을 다반사로 하였으며, 폐간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 교육

일제는 제2차 조선 교육령(1922년 2월)을 통해 보통 학교의 교육 연한을 4년에서 6년, 고등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5년으로 연장하였다.

또한 교육의 기회를 확대해 준다고 했다.

하지만 학교 수는 여전히 부족했고, 조선인의 취학률이 일본인보다 낮았다.

 

    • 부·면 합의회, 도 평의회

일제는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는 것처럼 부 면 합의회를 민선으로 구성하고 도 평의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 기구는 의결권이 없는 자문 기구일 뿐이었고, 일본인이나 친일 인사로 구성되었다.

 

  • 치안 유지법

1925년 일제는 치안 유지법을 제정하여 항일 민족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하여 많은 한국인을 구속하였다.

 

  • 자치론의 등장

문화 통치에 동조한 일부 지식인들은 민족 개조론, 자치론, 참정권론 등을 주장하며 민족 운족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일제의
국권 피탈
  • 제1차 영·일 동맹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다.

1902년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

이후, 1903년 러시아가 압록강에 위치한 용암포를 강제로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 전시 국외 중립 선언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일 조짐을 보이자 대한 제국은 ‘전시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 러·일 전쟁 발발(1904년 2월)

일본이 인천항과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 한⋅일 의정서(1904년 2월)

러·일 전쟁 발생 직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일본군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일본의 동의 없이 제3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한⋅일 의정서를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은 독도를 시마네현 소속으로 고시하였다.

 

  • 제1차 한·일 협약(1904년 8월)

일제는 러·일 전쟁에서 전세가 유리해지자 한국 식민지화 방안을 확정하고, 이어서 제1차 한⋅일 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외교와 재정 분야에 그들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도록 하였다.

일제는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를, 외교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재정과 외교에 본격적으로 간섭하였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8월)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일본이 뤼순항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파하는 등 전쟁의 승기를 잡자,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러일 전쟁이 종결되었다.

제2조

러시아 제국은 일본 제국이 한국에 대해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또한 한국에 있는 러시아 제국 신민은 다른 외국인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러시아는 한국 영토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동의한다.

 

  •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1905년 11월)

일제는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제는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 헤이그 특사 파견과 고종의 강제 퇴위(1907년)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였다.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순종은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바꿨다.

 

  •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년 7월)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

협약 내용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제2조 한국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구별한다.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행한다.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 외국인을 용빙할 수 없다.

 

  • 기유각서

일제는 1909년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사법권을 빼앗았고, 1910년 경찰권을 빼앗았다.

 

  • 한⋅일 병합 조약(경술국치, 1910년 8월)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으로 왔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
  • 배경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공업이 더욱 발달하고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식량 문제에 부딪혔다.

이에 일제는 192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여 그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 내용

일제는 다수확 품종으로 벼 종자를 개량하고 비료 사용을 확대하였으며, 농토를 개간하고 밭을 논으로 바꾸었다.

또한 저수지나 제방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에 수리 조합을 조직하였다.

 

  • 결과
    • 증산량 보다 많은 수탈량

일제는 쌀이 목표대로 증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증산량보다 훨씬 많은 양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에 따라 우리 농민은 식량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기아 선상에 허덕이게 되었다.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생산되는 값싼 잡곡으로 충당하려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 식민지 지주제 강화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들은 토지를 집적함으로써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했다.

 

    • 농민의 어려움

당시 우리 농민은 수리 조합비, 증산에 투입된 운반비 등도 부담함으로써 이중의 고통을 받았고, 생계는 더욱 어려워져 갔다.

더욱 가난해진 많은 농민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만주 지역 등 해외로 떠나게 되었다.

 

    • 쌀 중심의 단작 농업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인해 쌀 가격 변동에 취약한 쌀농사 위주의 단작 농업이 정착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 각지의 임시 정부

3⋅1 운동 후 독립 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여러 지역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연해주에서는 대한 국민 의회가 조직되었다. 대통령 손병희, 국무총리 이승만 선임.

서울에서는 13도 대표가 모여 한성 정부가 수립되었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 총리 이동휘 선임.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의정원 구성, 국무총리 이승만 선임.

대한 국민 회의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1919. 03.)
  • 대통령: 손병희
  • 부통령: 박영효
  • 국무총리: 이승만
한성 정부
(경성, 서울)
(1919. 04.)
  • 집정관 총제: 이승만
  • 국무총리 총재: 이동휘
상하이 임시 정부
(중국 상하이)
(1919. 04)
  • 국무총리: 이승만
  • 내무총장: 안창호
  • 군무총장: 이동휘

 

  • 임시 정부 통합

정부 통합 운동은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성사되었다.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를 계승하고, 대한 국민 의회를 흡수하여 상하이에 통합 정부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년 9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각지의 임시 정부를 통합한 후,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안창호를 내무총장으로 추대하였다.

헌정 체제를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으로 구성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 공화제 정부로 출범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활동
    • 비밀 행정 조직망

임시 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 조직망이었다.

연통제는 임시 정부의 지방 행정 기관으로 국내의 각 도, 군, 면에 독판, 군감, 면감을 두어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교통국은 통신 기관으로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 독립운동 자금 마련

임시 정부 활동에는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였다. 임시 정부는 이 자금을 독립 공채의 발행이나 국민의 의연금으로 마련하였다.

국내외에서 수합된 자금은 연통제나 교통국의 조직망에 의해 임시 정부에 전달되었으며, 또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전달되기도 하였다.

 

    • 외교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다.

또한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 군사

임시 정부는 정부 조직에 군무부를 설치하여 군사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군무부 아래에는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 총영 등을 두었으며, 이후 육군 주만 참의부(1924년)를 편성하여 무장 투쟁을 펼쳤다.

 

    • 기타

임시 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 국민 대표 회의(1923년)
    • 배경

1920년대 초 일제의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이 발각되어 자금 사정은 어려워졌다.

또한 임시 정부 내에서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외교 활동은 강대국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청원 사건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개최되자 이승만은 미국 대통령 윌슨에게 한국을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 아래 둘 것을 제안하는 청원서를 보냈다.

 

    • 소집 요구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을 계기로 신채호, 박용만 등의 무장 투쟁론자들은 이를 문제 삼아 임시 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어 여러 민족 운동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다.

 

    • 결과
창조파 개조파 현상 유지파
인물 박용만, 신채호, 김규식 안창호, 이동휘, 여운형 김구, 이동녕
주장 임시 정부 해체,

임시 정부 대체할 새로운 조직,

상하이 이외 지역으로 임시 정부 이전

임시 정부 개선·보완,

실력 양성 우선,

임시 정부를 민족 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으로 개조

현상 유지

국민 대표 회의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 정부의 조직만 바꾸자는 개조파의 대립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떠났다.

 

    • 임시 정부의 재정비

1925년 임시 의정원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곧이어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바꾸고 일종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이동녕과 김구 등을 중심으로 체제를 재정비해 나갔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개헌 변천과정
구분 연도 정부 형태
제1차 개정헌법 1919년 대통령중심제
제2차 개정헌법 1925년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
제3차 개정헌법 1927년 국무위원 중심의 집단지도체제
제4차 개정헌법 1940년 주석 중심의 단일지도체제
제5차 개정헌법 1944년 주석·부주석 체제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80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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