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번 문제
43. (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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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② 백산 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③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소개하였다.
④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독립 투쟁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⑤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장으로 독립선언 포고문을 공포하였다.
문제 해설
위 자료에 해당하는 인물은 김규식이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김규식 등이 신한 청년당을 결성했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1946년 7월 단독 정부 수립에 따른 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세력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했다.
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해 남북 협상을 추진하였다.
1948년 2월, 유엔은 소총회를 열어 한국 임시 위원단의 접근이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김구, 김규식 등은 남한만의 선거로 단독 정부가 수립되면 남북의 분단이 계속될 것을 우려하여 남북한이 협상을 통해서 통일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김구 등은 남북 협상을 제의하였다.
1948년 4월, 평양에서 김구와 김규식, 김일성과 김두봉 등이 참석하는 남북 연석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단독 정부 수립 반대, 미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② 백산 상회를 설립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활동에는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였다.
국내외에서 수합된 자금은 연통제나 교통국의 조직망에 의해 임시 정부에 전달되었으며, 또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전달되기도 하였다.
백산 상회는 1914년 독립운동가 안희제가 부산에 설립한 민족기업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소개하였다.
1883년 조선은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후 미국과 수교한 이후 미국에 답례 사절단인 보빙사를 파견하여 근대 시설을 살펴보게 하였다.
민영익, 유길준, 홍영식, 서광범 등이 파견되었다. 유길준은 귀국 후에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소개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 독립 투쟁의 역사를 서술하였다.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장으로 독립선언 포고문을 공포하였다.
1908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을 계기로 1910년 안창호 등이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되었다.
안창호가 대한인 국민회 중앙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①번이다.
| 3⋅1 운동 |
러시아 혁명을 주도한 레닌이 식민지의 민족 해방 운동을 지원하겠다고 선언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파리 강화 회의에서 미국 윌슨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제시했다.
1917년 7월 신채호, 박은식, 신규식, 조소앙 등이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대동단결선언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새로운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국민주권론을 제기하며 새로운 임시정부 결성의 필요성을 제의・제창한 최초의 선언문이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1919년 만주 지린성에서는 국외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 39인이 무오 독립 선언서(대한 독립 선언)를 발표하여 일제에 대한 육탄 혈전을 결의하였다. 일본 도쿄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1919. 2. 8.).
1919년 1월에 고종이 갑자기 사망하였고, 일제가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민중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다.
전국적인 만세 시위를 준비하던 종교계 인사들은 천도교의 손병희와 기독교의 이승훈 등을 주축으로 하고, 불교계의 한용운이 연합하여 33인의 민족 대표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대중화·일원화·비폭력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최남선이 작성하고 민족 대표 33인의 이름이 적힌 3⋅1 독립 선언서(기미 독립 선언문)를 종교 단체와 학생 조직을 통해 서울과 지방의 여러 도시에 몰래 배포하였다. 3월 1일 민족 대표들은 시위가 과격해질 것을 우려하여 태화관에 모여 독립을 선언하고 만세 삼창을 한 후 일본 경찰에 자진 체포되었다. 탑골 공원에 모인 학생과 시민들은 독립 선언서를 발표한 후, 거리에 나가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평화적으로 만세 시위를 벌였다.
서울, 평양, 원산, 의주 등에서 시작된 만세 시위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참여한 계층도 학생, 농민, 노동차, 상인, 교사 등 다양하였다. 3월 중순을 지나면서 만세 시위는 도시에서 농촌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만세 시위는 점차 무력 저항 운동으로 바뀌었다. 농민을 중심으로 군청, 면사무소, 헌병 경찰 주재소 등 식민 통치 기관을 습격하였으며, 수탈에 가담한 일본인 지주 등을 응징하기도 하였다. 만세 시위는 국외로도 확산되었다. 간도와 연해주, 하와이 등 한민족이 살고 있는 곳은 거의 어디에서나 일어났다. 3⋅1 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하였던 도쿄 유학생들은, 국내의 3⋅1 운동 봉기 소식을 듣자 곧 만세 시위를 전개하였으며, 오사카의 동포들도 뒤이어 시위를 벌였다.
시위가 격화되자 일제는 화성 제암리 사건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보복성 학살을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어린 나이로 충청남도 천안에서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하였던 유관순은 구속되어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3⋅1 운동은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 운동이었다. 3⋅1 운동은 일제의 통치 방식에 영향을 주어, 일제는 폭력적인 무단 통치에서 이른바 ‘문화 통치’로 바꾸었다. 3⋅1 운동 이후 독립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민주공화제를 바탕으로 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3⋅1 운동 이후 독립을 쟁취하려는 의지가 높아지면서 무장 독립군의 활동이 활발해졌다. 3⋅1 운동은 중국의 5⋅4 운동 등이 일어나는 데 영향을 주었다. 국외로도 확산되어 필라델피아에서 한인 자유 대회가 열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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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우 합작 운동 |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단독 정부 수립에 따른 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세력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했다. 미군정도 한국인의 지지를 얻고 소련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좌우 합작 위원회를 지원하였다.
1946년 10월 좌우 합작 위원회는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벌 등에 대한 좌우익의 의견을 절충하여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미 군정은 이 원칙을 근거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좌우 합작 7원칙 중 신탁 통치, 토지 개혁, 친일파 처벌 문제 등에서 좌익과 우익의 의견이 충돌하였다.
그러다 여운형이 한치근에 의해 암살되면서 좌우 합작 운동은 중단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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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후 독립 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여러 지역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연해주에서는 대한 국민 의회가 조직되었다. 대통령 손병희, 국무총리 이승만 선임. 서울에서는 13도 대표가 모여 한성 정부가 수립되었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 총리 이동휘 선임.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의정원 구성, 국무총리 이승만 선임.
정부 통합 운동은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성사되었다.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를 계승하고, 대한 국민 의회를 흡수하여 상하이에 통합 정부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년 9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각지의 임시 정부를 통합한 후,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안창호를 내무총장으로 추대하였다. 헌정 체제를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으로 구성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 공화제 정부로 출범하였다.
임시 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 조직망이었다. 연통제는 임시 정부의 지방 행정 기관으로 국내의 각 도, 군, 면에 독판, 군감, 면감을 두어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교통국은 통신 기관으로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임시 정부 활동에는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였다. 임시 정부는 이 자금을 독립 공채의 발행이나 국민의 의연금으로 마련하였다. 국내외에서 수합된 자금은 연통제나 교통국의 조직망에 의해 임시 정부에 전달되었으며, 또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전달되기도 하였다.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다. 또한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임시 정부는 정부 조직에 군무부를 설치하여 군사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군무부 아래에는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 총영 등을 두었으며, 이후 육군 주만 참의부(1924년)를 편성하여 무장 투쟁을 펼쳤다.
임시 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1920년대 초 일제의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이 발각되어 자금 사정은 어려워졌다. 또한 임시 정부 내에서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외교 활동은 강대국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을 계기로 신채호, 박용만 등의 무장 투쟁론자들은 이를 문제 삼아 임시 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어 여러 민족 운동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 정부의 조직만 바꾸자는 개조파의 대립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떠났다.
1925년 임시 의정원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곧이어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바꾸고 일종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이동녕과 김구 등을 중심으로 체제를 재정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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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교 사절과 시찰단 파견 |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정부는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조사하였다.
1차 수신사 김기수 일행은 일본의 근대 시설을 시찰하였다(1876년).
일본과의 조약 개정을 위해 파견된 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보고 돌아왔다(1880년).
박영효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정부는 1881년에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유길준 등을 비밀리에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제도와 법률, 공장 등을 조사하고 국왕에게 보고서를 올려 개화 정책의 자료로 삼게 하였다.
정부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임명하여 중인 자제들을 이끌고 청에 가서 무기 화약 기계 제조법을 배우게 하였다. 정부의 재정 부족으로 인원이 줄고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일찍 돌아오게 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기기창이 설치되었다.
정부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후 미국과 수교한 이후 미국에 답례 사절단인 보빙사를 파견하여 근대 시설을 살펴보게 하였다(1883년). 민영익, 유길준, 홍영식, 서광범 등이 파견되었다. 유길준은 귀국 후에 <서유견문>을 집필하여 서양 근대 문명을 소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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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다.
1925년 조선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주의 사관을 토대로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발전 주체가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 정신을 혼(魂)으로 파악하여, 혼이 담겨 있는 민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를 지어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독사신론을 저술하였다. 신채호는 낭가 사상을 강조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 사학은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으로 계승되었고, 이들은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인보는 ‘얼’ 사상을 강조하였다. 문일평은 ‘조선심’을 강조했다.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기를 맞아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실증 사학자들은 문헌 고증으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역사가의 주관적인 판단 없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이병도 등은 1934년 진단 학회를 조직하고 진단 학보를 발간하였다.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 사학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유물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다.
손진태는 조선민족사개론을 저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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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0년대 국외 민족 운동 |
국권 피탈 이후 서간도로 이주한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상룡 등은 서간도(남만주)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였고, 이곳에서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 강습소를 세웠다. 지치 기관인 경학사는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서로 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신흥 강습소는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이후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였다.
북간도로 이주한 동포들은 용정촌, 명동촌 등 한인 집단촌을 형성하고 간민회 등의 자치 단체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이끌었다. 이상설, 김약연 등은 각각 서전서숙과 명동 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대종교는 북간도로 거점을 옮겼고, 서일 등 신자 중 일부가 무장 독립 단체인 중광단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개편하였다.
이상설, 이승희 등은 북만주 밀산부에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만들어졌고,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권업회의 초대 회장은 최재형이었다.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외 한인 단체인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가 결성되었고, 이동휘 등이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1912년), 박달 학원(1913년) 등이 조직되었다. 1912년 7월 신규식과 박은식 등은 상하이에서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조소앙은 1913년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는 장차 전개될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교육을 중시했고, 중국의 각종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100여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5년 베이징에서는 신규식, 박은식 등이 신한 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17년에는 신규식, 조소앙 등이 국민 주권론과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김규식 등이 신한 청년당을 결성했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05년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한국인들이 이주하여 에네켄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 생활을 하였다. 1910년에는 숭무학교가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을 계기로 1910년 안창호 등이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는 신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13년에는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군사 훈련을 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위해 한인 비행 학교를 설립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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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 강점기 역사 연표
- 현대사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