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회 한능검 심화 38번 해설 – 6.10 만세 운동

38번 문제

38. 밑줄 그은 ‘이 운동’ 이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1점]

①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② 만세보가 창간되었다.

③ 의열단이 조직되었다.

④ 태극 서관이 설립되었다.

⑤ 대한 광복군 정부가 수립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926년 4월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 공산당은 학생 단체, 천도교 일부 세력과 힘을 모아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인 6월 10일에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면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으나, 학생들은 일제 경찰의 감시를 뚫고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에서 격문을 뿌리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①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일제는 1925년 치안 유지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진영과의 연대하고자 하였다.

치안 유지법으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은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신간회 설립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최대 규모의 합법적인 민족 협동 전선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② 만세보가 창간되었다.

만세보는 천도교 기관지로, 1906년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의열단이 조직되었다.

1919년 11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은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태극 서관이 설립되었다.

신민회는 1907년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신민회는 평양과 서울에 설립된 태극 서관에서 계몽 서적을 출판하였다.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대한 광복군 정부가 수립되었다.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①번이다.

 

6·10 만세 운동

  • 배경

1920년대에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민족 지도자들의 독립 운동이 크게 제약을 받는 가운데 학생들은 강연, 연극, 야학, 농촌 계몽 활동 등을 통하여 민중 계몽에 앞장 섰다.

또, 학생들은 일제의 민족 차별 교육에 반대하고, 일본인 교사의 한국인 멸시에 항거하는 동맹 휴학을 하기도 하였다.

 

  • 전개

1926년 4월 순종이 세상을 떠나자, 사회주의 계열인 조선 공산당은 학생 단체, 천도교 일부 세력과 힘을 모아 순종의 인산일(장례일)인 6월 10일에 대규모 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은 사전에 발각되면서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으나, 학생들은 일제 경찰의 감시를 뚫고 장례 행렬이 지나가는 곳곳에서 격문을 뿌리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기출 자료

전세계 피압박 민족과 무산자 대중은 모두 함께 정의의 깃발을 들고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추어 나갈 것이며, 붕괴하고 있는 제국주의의 하나인 일본 지배 계급도 운명이 다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에게도 명백하다. 최후까지 싸워 완전 독립을 쟁취하자. 혁명적 민족운동자 단체 만세! 조선 독립 만세!

…

조선 민중아! 우리의 철천지 원수는 자본·제국주의 일본이다. 2,000만 동포야!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자! 만세, 만세, 조선 독립 만세.

…

조선인 교육은 조선인 본위로! 보통학교 용어는 조선어로!

 

  • 의의

학생 운동이 식민 통치 전반에 대한 저항으로 발전하는 전환점이 되었다.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은 이 운동을 함께 준비하면서 민족 유일당(민족 협동 전선)을 만들어 힘을 합칠 수 있다는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신간회 창립에 기여하였다.

민족 유일당
운동과

신간회

  • 제1차 국공 합작

1924년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1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를 배경으로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

1926년 중국 북경에서 안창호의 주도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창립되었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 3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 민족주의 진영의 분열

국내에서는 최린, 이광수 등이 자치 운동(자치론)을 전개하며 일제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이상재, 안재홍 등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였고, 나아가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여 민족 운동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 사회주의 진영의 세력 약화

일제는 1925년 치안 유지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진영과의 연대하고자 하였다.

 

  • 정우회 선언

치안 유지법으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은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신간회 설립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정우회 선언

“민족주의적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질을 분명히 인식함과 동시에 과정상의 동맹자적 성질도 충분하게 승인하여, 그것이 타락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도 종래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싸워야 할 것이다.”

〈조선 일보, 1926. 11. 17.〉

 

타협적
민족주의
← 분열 → 비타협적
민족주의
← 연대 → 사회주의
이광수, 최린 등 이상재, 안재홍 등 치안 유지법으로 위축됨
자치론 주장 자치론 비판 정우회 선언
↓↓
신간회 결성

 

  • 신간회 결성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최대 규모의 합법적인 민족 협동 전선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 강령

신간회는 민족의 단결과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자를 배격하는 것을 기본 강령으로 내세웠다.

‘우리는 정치적ㆍ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 근우회(1927년)

신간회 출범과 더불어 탄생한 것이 근우회였다. 근우회는 김활란 등이 중심이 되어 여성계의 민족 유일당으로 조직되었고,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와 새생활 개선을 행동 강령으로 하였다.

근우회의 창립이념과 활동의 기본 방향은 강령에 제시된 “조선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이다.

 

  • 활동

신간회는 합법적인 공간을 활용하여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식민지 교육 반대, 타협적 정치 운동 반대 등을 주장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을 비판하였다.

 

  •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년)

신간회는 광주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전국적인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다.

 

  • 해소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제1차 국공 합작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 계열과의 협동 전선 해체를 지시하였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은 신간회 해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나, 1931년에 열린 전체 대회에서 신간회를 해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코민테른

국제 공산당 조직 연합체로,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였다. 코민테른의 결정은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의의

신간회의 결성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극복하여 민족 협동 전선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근대 언론 기관의
발달

  • 한성순보

1883년 박영효가 주도한 박문국에서 순 한문체로 발행된 한성순보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관보의 성격을 띠었으며, 열흘에 한 번씩 발행되었다.

 

  • 한성주보

갑신정변으로 발행이 중단된 한성순보가 한성주보로 다시 발행되었다.

최초로 신문에 상업 광고가 게재되었다.

 

  • 독립신문

최초로 민간에서 간행한 신문은 독립신문이었다.

1896년에 독립 협회의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대중을 계몽하여 근대화를 촉진하려는 순 한글판과, 외국인에게 우리의 처지를 홍보하는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 황성신문

1898년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황성신문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늑약을 비판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한문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주로 구독하였다.

황성신문이 여권통문을 처음 보도하였다.

 

  • 제국신문(1898년)

제국신문은 주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간행되었는데, 순 한글로 발행되었다.

신문지법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어용 단체인 일진회에 대해 통렬히 논박하는 등 민족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국채 보상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 해조신문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한인 신문이다.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한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국권 회복과 러시아 한인 계몽을 위해 <해조신문>을 창간하였다.

<해조신문>은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신문이라는 의미였다.

 

  • 대한매일신보

양기탁이 중심이 된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에 창간되었다.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통감부의 극심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논설을 실을 수 있었다.

특히, 의병 활동 등 민족 운동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어 민족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또한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친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다 1908년 통감부는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대한매일신보를 규제하였다.

 

  • 만세보

만세보는 천도교 기관지로, 1906년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되었다. 만세보는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 신문지법

1907년 통감부는 신문지법을 만들어 자주 독립을 요구하던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그러다 1908년 통감부는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제국신문과 영국인 베델이 발행인인 대한매일신보를 규제하였다.

신문지를 발행하려는 자는 발행지를 관할하는 관찰사를 경유하여 내무대신에게 청원하여 허가를 받아야 한다.

-신문지법-

의열 투쟁

  • 의열단

1919년 11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은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 (1923년)

의열단원들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 목표

의열단은 일제의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5파괴, 7가살)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5파괴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매일신보사(조선 총독부 기관지),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7가살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지주와 자본가

 

    • 활동

박재혁 – 1920년 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익상 –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 –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지섭 – 1924년 일본 도쿄 궁성 폭탄 투척

나석주 –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 투척

 

    • 활동 변화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의열단원들은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관내 대부분의 민족 운동 단체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 결성(1935년)을 주도하였다.

 

  • 한인 애국단
    • 배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 대표 회의 이후 침체를 겪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졌다.

김구는 1931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만보산 사건

1931년 중국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사건이다.

 

    • 이봉창의 의거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중국 상하이를 침략하였다(상하이 사변).

 

    • 윤봉길의 의거

1932년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일제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이때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요 장성과 고관들을 처단하였다.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 의의

한국 애국단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크게 호전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광복군이 조직되는 토대가 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
  • 보안회(1904년)

보안회는 토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 헌정 연구회(1905년)

독립 협회에 영향을 받은 헌정 연구회는 국민의 정치 의식 고취와 입헌 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 대한 자강회(1906년)

대한 자강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15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나,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자, 격렬한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강제로 해체되었다.

대한 자강회 취지문

국민의 지혜를 열고 국가의 힘을 기르는 길은 교육과 산업의 발달에 달려 있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 곧 자강의 방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이 자강의 목적을 관철하기를 바랄진대 부득불 먼저 그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여 단군과 기자 이래 4천 년 한국의 정신으로 2천만 모든 사람의 정신 속에 흐르도록 하여, 한 번 숨을들이고 내쉬는 시간에도 자기 나라 정신을 잊지 않게 만든 연후에야 바야흐로 자강의 마음을 단련하고 국권 회복의활기를 만들게 될 것이다.

 

  • 대한 협회(1907년)

대한 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민권의 신장, 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지배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대한 협회의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 신민회

신민회는 1907년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안창호, 양기탁 등을 지도부로 하였다.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표면적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적 실력 양성을 기도하였다.

 

    •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 학교(1908년), 정주에 오산 학교(1907년)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 태극 서관과 자기 회사

신민회는 평양과 서울에 설립된 태극 서관에서 계몽 서적을 출판하였다. 또한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워 민족 산업의 육성에도 힘썼다.

 

    •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만주에 독립군 기지(삼원보)를 건설하고,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기르는 데 힘을 기울였다.

 

    • 해산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1910년대
국외 민족 운동
  • 서간도(남만주) – 삼원보, 신한민촌, 경학사,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국권 피탈 이후 서간도로 이주한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상룡 등은 서간도(남만주)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였고, 이곳에서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 강습소를 세웠다.

지치 기관인 경학사는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서로 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신흥 강습소는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이후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였다.

 

  • 북간도 – 서전서숙, 명동 학교, 중광단

북간도로 이주한 동포들은 용정촌, 명동촌 등 한인 집단촌을 형성하고 간민회 등의 자치 단체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이끌었다.

이상설, 김약연 등은 각각 서전서숙과 명동 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대종교는 북간도로 거점을 옮겼고, 서일 등 신자 중 일부가 무장 독립 단체인 중광단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개편하였다.

 

  • 북만주 – 한흥동

이상설, 이승희 등은 북만주 밀산부에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 연해주 – 신한촌, 권업회, 대한 광복군 정부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만들어졌고,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권업회의 초대 회장은 최재형이었다.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외 한인 단체인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가 결성되었고, 이동휘 등이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 중국 – 동제사, 박달 학원, 신한 청년당 김규식, <대동단결선언>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1912년), 박달 학원(1913년) 등이 조직되었다.

1912년 7월 신규식과 박은식 등은 상하이에서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조소앙은 1913년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는 장차 전개될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교육을 중시했고, 중국의 각종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100여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5년 베이징에서는 신규식, 박은식 등이 신한 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17년에는 신규식, 조소앙 등이 국민 주권론과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김규식 등이 신한 청년당을 결성했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 미주 – 대한인 국민회, 흥사단, 대조선 국민 군단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05년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한국인들이 이주하여 에네켄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 생활을 하였다. 1910년에는 숭무학교가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을 계기로 1910년 안창호 등이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는 신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13년에는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군사 훈련을 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위해 한인 비행 학교를 설립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80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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