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번 문제
36. 다음 자료에 나타난 민족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 <선전지>
내 살림 내 것으로 보아라, 우리의 먹고 입고 쓰는 것이 거의 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제일 세상에 무섭고 위태한 일인 줄은 오늘에야 우리가 깨달았다. 피가 있고 눈물이 있는 형제자매들아. 우리가 서로 붙잡고 서로 의지하고 살고서 볼 일이다. 입어라, 조선 사람이 짠 것을. |
① 폐정 개혁을 위해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②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아 전개되었다.
③ 조선 관세령 폐지 등을 배경으로 확산되었다.
④ 황국 중앙 총상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⑤ 국문 연구소를 세워 한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문제 해설
1920년 회사령 철폐 이후 경성 방직 주식회사,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 등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동시에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가 철폐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인 자본가들의 위기 의식이 높아졌다.
1923년 일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를 폐지하여 일본 상품이 한국에서 더 싼값에 팔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민족 산업과 자본을 보호·육성하여 민족 경제의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 조만식, 이상재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여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하였고, 1923년 관세령 폐지 이후 서울에서도 조선 물산 장려회가 만들어지는 등 물산 장려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① 폐정 개혁을 위해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전주성을 점령한 동학 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주 화약이라고 한다.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대한매일신보의 후원을 받아 전개되었다.
1907년 서상돈, 김광제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금연과 금주로 모은 돈과 반지, 비녀 등을 성금으로 냈으며, 여러 단체와 대한 매일 신보 등의 언론 기관도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조선 관세령 폐지 등을 배경으로 확산되었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황국 중앙 총상회가 설립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개항 이후, 서울을 비롯한 조선 각지에서 청과 일본 상인의 상권 침탈 경쟁이 치열해졌다.
1898년 서울 상인들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여, 외국인의 불법적인 내륙 상업 활동을 엄단할 것을 요구하며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국문 연구소를 세워 한글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였다.
1907년 국문 연구소가 만들어져 주시경, 지석영 등의 주도로 국문의 정리, 문법과 국어의 이해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1909년 12월 27일까지 활동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 물산 장려 운동 |
1920년 회사령 철폐 이후 경성 방직 주식회사, 평양의 메리야스 공장 등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활발해졌다. 동시에 일본의 자본이 한국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가 철폐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한국인 자본가들의 위기 의식이 높아졌다. 1923년 일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를 폐지하여 일본 상품이 한국에서 더 싼값에 팔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이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민족 산업과 자본을 보호·육성하여 민족 경제의 자립을 이루자는 물산 장려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 조만식, 이상재 등이 평양에서 조선 물산 장려회를 조직하여 물산 장려 운동을 시작하였고, 1923년 관세령 폐지 이후 서울에서도 조선 물산 장려회가 만들어지는 등 물산 장려 운동은 전국적으로 퍼져 나갔다. 학생들은 자작회를, 부녀자들은 토산 애용 부인회를 만들어 물산 장려 운동에 적극 동참하였다.
물산 장려 운동은 ‘조선인이 만들 것을 입고, 먹고, 쓰자’, ‘조선 사람 조선 것’, ‘내 살림 내 것으로’라는 구호를 내걸고 활발히 진행되었다.
물산 장려 운동은 기업의 생산력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상품 가격만 올려놓는 경우가 많아 사회주의자들의 비난을 받았다. 물산 장려 운동은 점차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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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의 독점 자본 침투 |
일제는 그들의 경제적 침투가 보다 편리하도록 회사령을 허가제에서 신고제로 바꾸었다. 그리하여 일본 대재벌의 자본이 침투하고 일본인이 경영하는 각종 회사가 설립됨으로써 한국의 산업과 한국인의 경제 생활은 일본인에 의하여 지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제는 한국과 일본 사이의 관세를 폐지하여 일본 상품이 한국에서 더 싼값에 팔릴 수 있도록 하였다.
일제는 신은행령을 발표하고 한국인 소유의 은행을 합병하는 등 금융 분야에서도 일본 자본의 지배를 강화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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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 |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당시 농촌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외세의 침투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하여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청일 상인에 의해 영국산 면직물이 싼값에 들어오면서 면포를 짜서 팔던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이 늘어 곡물 가격이 오르자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커졌다. 개화 정책으로 늘어난 정부의 재정 지출은 농민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졌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혁 욕구도 높아졌다.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동학의 인간 평등 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동학의 포접제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자 지방관들은 동학을 탄압하였고 농민들에게 동학 교도의 누명을 씌워 탄압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동학교도들은 1892년부터 충청도 공주, 전라도 삼례, 한성 등에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동학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동학의 지도급 인사 40여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하였다.
충청도 보은에서는 동학 교도와 농민 2만여 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보은 집회에서 탐관 오리의 숙청, 일본과 서양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다가, 마침내 동학 중심의 종교 운동을 농민 중심의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켜 갔다.
농촌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횡포와 착취를 저지르며 농민들을 수탈했다. 농민들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봉기하였다.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려 세력을 모았다.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풀어 주고, 창고의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었다. 이에 정부가 새로운 군수를 임명하자 농민들은 군수의 다짐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다.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라는 죄목으로 잡아들이고 탄압하자 농민들의 분노가 다시 거세졌다.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전라도 각지에서 농민군을 모아 무장에서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고부를 점령하고 나서 백산에서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라는 뜻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라는 뜻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구호를 담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백성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4대 강령을 발표했다.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은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주 화약이라고 한다.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로 조선 정부는 이를 반영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간섭을 하였다(군국기무처 설치).
경복궁 점령 이틀 뒤, 마침내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남접 농민군과 북접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 결국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쟁에서 패한 청은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1895년). 청은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다고 일본을 압박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청에게 할양 받은 랴오둥 반도를 청에 돌려주는 대신 보상금을 받았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봉건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여 노비 문서의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 등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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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시설 개선 등의 명목을 내세워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는데, 1907년까지 들여 온 차관 총액은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경제적 예속화 정책에 저항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서상돈, 김광제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금연과 금주로 모은 돈과 반지, 비녀 등을 성금으로 냈으며, 여러 단체와 대한 매일 신보 등의 언론 기관도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일제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인해 국채 보상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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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권 수호 운동 |
개항 이후, 서울을 비롯한 조선 각지에서 청과 일본 상인의 상권 침탈 경쟁이 치열해졌다.
이에 반발하여 1890년, 수천 명의 서울 상인들은 철시(영업을 하지 않고 문을 닫음)하고 외국 상점들의 서울 퇴거를 요구하였다. 그 뒤에도 철시한 서울 상인들과 시민 수천 명이 1주일 동안 격렬하게 상권 수호 운동을 벌였다.
1898년 서울 상인들은 황국 중앙 총상회를 조직하여, 외국인의 불법적인 내륙 상업 활동을 엄단할 것을 요구하며 상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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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국학 연구 |
1907년 국문 연구소가 만들어져 주시경, 지석영 등의 주도로 국문의 정리, 문법과 국어의 이해 체계가 확립되기 시작하였다. 1909년 12월 27일까지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대한매일신보에 <독사신론>을 연재하여 민족주의 사학의 연구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한 이태리 건국 삼걸전을 집필하였다.
신채호, 박은식 등 계몽 사학자들은 을지문덕전, 강감찬전, 이순신전 등 전기를 저술하였다.
세계사에 관한 책들도 편찬되었다. 미국 독립사, 월남 망국사, 이태리 건국 삼걸전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외국의 간섭에서 독립을 하거나 나라를 발전시킨 경우, 또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를 잃은 경우를 소개하여 스스로 교훈을 얻으려 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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