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회 한능검 심화 12번 해설 – 고려 거란 전쟁

12번 문제

12. (가) 국가에 대한 고려의 대응으로 옳은 것은? [2점]

  • (가)의 군주는 강조가 임금(목종)을 시해한 죄를 물어 전쟁을 일으키고자 했다. 왕이 이를 듣고 강조를 행영도통사로, …… 시병부원외랑 원영을 판관으로 임명했다. 이들은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통주(通州)로 가서 적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 (가)의 군사들이 개경을 함락시키고 궁궐에 불을 지르니 서적이 모두 타서 잿더미가 되었다. 황주량은 조서를 받들어 태조로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사적(事跡)을 모아, 모두 36권의 책으로 편찬하여 왕에게 바쳤다.

①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전하였다.

② 광군을 조직하여 침입에 대비하였다.

③ 사신 접대를 위해 한성에 동평관을 두었다.

④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⑤ 왕의 입조를 준비하기 위한 반전도감을 설치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010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트집잡아 다시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했다.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왕조실록을 편찬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이에,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을 현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덕종 때 완성하였다.

 

① 강화도로 도읍을 옮겨 항전하였다.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은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강화 천도),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광군을 조직하여 침입에 대비하였다.

947년 고려 정종 때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광군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사신 접대를 위해 한성에 동평관을 두었다.

조선은 일본과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사신 접대를 위해 한양에 동평관을 두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철령위 설치에 반발해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고려 말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년)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왕의 입조를 준비하기 위한 반전도감을 설치하였다.

1328년 고려 충숙왕 때 왕이 원나라에 입조하기 위해 반전도감을 설치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고려
거란의 침입
  • 거란의 1차 침입

993년 고려 성종 때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 서희의 담판 외교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

 

  • 거란의 2차 침입

1010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트집잡아 다시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

 

  • 거란의 3차 침입

1018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하였다. 강감찬이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한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귀주대첩).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음

고려
역사서 편찬
  • 7대 실록(1034년)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왕조실록을 편찬하였으나, 거란의 침입으로 불타 버렸다. 이에, 태조부터 목종에 이르는 7대 실록을 현종 때 편찬하기 시작하여 덕종 때 완성하였다.

  • 삼국사기(1145년)

인종 때 김부식 등이 왕명을 받아 삼국사기를 편찬하였다. 본기, 연표, 잡지, 열전 등으로 구성된 기전체로 서술되었다. 신라 계승 의식이 많이 반영되었다.

  • 해동고승전(1215년)

각훈이 쓴 해동고승전은 삼국 시대의 승려 30여 명의 전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현재 일부만 남아 있다.

  • 동명왕편(1193년)

고려 명종 때 이규보의 동명왕편은 고구려 건국의 영웅인 동명왕의 업적을 칭송한 일종의 영웅 서사시로서, 고구려의 계승 의식을 반영하고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하였다. 또한 무신집권기의 사회 혼란 속에서 고려의 역사 전통을 고취할 목적으로 썼다.

  • 삼국유사(1281년)

충렬왕 때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는 불교사를 중심으로 고대의 민간 설화나 전래 기록을 수록하는 등 우리의 고유 문화와 전통을 중시하였으며, 단군을 우리 민족의 시조로 여겨 단군의 건국 이야기를 수록하였다.

  • 제왕운기(1287년)

이승휴가 쓴 제왕운기는 우리 나라의 역사를 단군에서부터 서술하면서 우리 역사를 중국사와 대등하게 파악하는 자주성을 나타내었다.

  • 사략(1357년)

이제현은 사략을 비롯한 여러 권의 사서를 저술하였는데, 지금은 사략에 실렸던 사론만 전한다.

고려 정종
  • 광군 편성

947년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광군이라는 특수 부대를 편성했다. 설치 당시의 병력은 30만 명이었다.

고려
몽골의 침입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을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1225년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저고여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 몽골의 1차 침입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은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강화 천도),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킴

 

  • 몽골의 2차 침입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

 

  • 몽골의 3차 침입

1236년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송문주가 죽주성에서 적군을 격퇴하였다.

 

  • 몽골의 5차 침입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후가 충주성에서 관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

 

  • 피해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

 

  • 개경 환도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 종결. 1270년, 고려 원종 때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

 

  • 삼별초의 항쟁

1270년 몽골과 강화를 맺은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몽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삼별초

최우가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으로 구성

조선 전기
일본과의 관계
  • 교린 정책

조선은 일본과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사신 접대를 위해 한양에 동평관을 두었다.

 

  • 쓰시마 섬 정벌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에 대한 토벌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루어졌다. 1419년(세종 1)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 3포 개항과 계해약조

왜구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계해약조(1443년)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

 

  • 해동제국기

세종 때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왕의 명령에 따라 쓴 견문기이다.

조선의 건국
  • 위화도 회군

고려 말 명이 철령 이북의 땅을 차지하려 하자, 최영은 이성계를 시켜 요동 정벌을 추진하였다.

이성계는 위화도에서 회군하여(1388년) 최영을 제거한 뒤, 군사적 실권을 장악하여 본격적인 개혁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 신진 사대부의 분화와 갈등

정도전 등 급진 개혁파는 창왕을 몰아 내고 공양왕을 세우면서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이들은 역성혁명을 반대하던 정몽주를 비롯한 온건 개혁파를 제거하였다.

 

  • 과전법 시행

위화도 회군을 계기로 우왕과 최영을 몰아 내고 실권을 잡은 이성계와 신진 사대부들은 문란한 토지 제도를 바로잡고, 경제 기반을 다지기 위해 과전법(1391년)을 실시하였다.

 

  • 조선 건국

신흥 무인 세력과 급진 개혁파는 새 나라 건설을 반대한 정몽주 등을 제거하고, 마침내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여 새 왕조를 세웠다(1392년).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80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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