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회 한능검 심화 35번 해설 – 일제 무단 통치

35번 문제

35. 밑줄 그은 ‘이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1점]

사진으로 보는 한국사

이것은 조선 물산 공진회 개최 관련 사진입니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에 조선 물산 공진회 간판이 걸려있고, 각종 장식이 덧붙여져 있습니다. 헌병 경찰 제도가 실시된 이 시기 일제는 식민 지배의 성과를 홍보하고자 조선 물산 공진회를 경복궁에서 개최하였고, 이 과정에서 궁내의 많은 건물을 훼손하였습니다.

① 애국반이 편성되었다.

② 회사령이 공포되었다.

③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었다.

④ 미곡 공출제가 시행되었다.

⑤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일제는 한반도에는 일본군 2개 사단과 2만여 명의 헌병 경찰 및 헌병 보조원을 배치하여 강력한 헌병 경찰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헌병 경찰 통치를 통하여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민족 지도자들은 체포, 투옥, 학살당하였다.

또, 일반 관리는 물론 학교 교원들에게까지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게 하였던 것은 위협적인 헌병 경찰 통치의 한 수단이었다.

헌병 경찰 제도는 일제 무단 통치 시기에 해당한다.

일제 무단 통치: 1910년 ~ 1919년

일제 문화 통치: 1919년 ~ 1937년

일제 민족 말살 통치: 1937년 ~ 1945년

 

① 애국반이 편성되었다.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 시기, 중일전쟁 후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침략 전쟁에서 한국인의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 조선 연맹을 조직하였다. 연

맹의 가장 하부에는 애국반을 조직하였고, 반상회를 통해 일본어 사용, 전쟁을 위한 애국 저금 등의 정책을 홍보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회사령이 공포되었다.

1910년 일제는 민족 기업을 규제하기 위하여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회사령은 기업의 설립을 총독의 허가제로 하고, 허가 조건을 위반할 때에는 총독이 사업의 금지와 기업의 해산을 명할 수 있게 규정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미쓰야 협정이 체결되었다.

1925년 일제와 만주 군벌은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의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미곡 공출제가 시행되었다.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였다.

일제는 농가마다 목표량을 정해 미곡 공출제와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경성 제국 대학이 설립되었다.

일제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교육하고 한국인의 교육열을 무마하기 위해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일제의
무단 통치

  • 1910년 ~ 1919년

 

  • 조선 총독부

국권 강탈 이후, 일제는 식민 통치의 중추 기관으로 조선 총독부를 설치하여 한민족에 대한 정치적 탄압과 경제적 착취를 자행하였다.

그리고 일본군 현역 대장이 조선 총독으로 임명되어 식민 통치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조선 총독은 일본 국왕에 직속되어 입법권, 사법권, 행정권 및 군대 통수권까지 장악하였다.

 

  • 중추원

조선 총독부는 자문 기구로 중추원을 두어 한국인을 정치에 참여시키는 형식을 취하였는데, 이는 한국인을 회유하기 위한 술책에 지나지 않았다.

 

  • 헌병 경찰 통치

일제는 한반도에는 일본군 2개 사단과 2만여 명의 헌병 경찰 및 헌병 보조원을 배치하여 강력한 헌병 경찰 통치를 실시하였다.

일제는 헌병 경찰 통치를 통하여 언론, 집회, 출판, 결사의 자유를 박탈당하였고, 민족 지도자들은 체포, 투옥, 학살당하였다.

또, 일반 관리는 물론 학교 교원들에게까지도 제복을 입히고 칼을 차게 하였던 것은 위협적인 헌병 경찰 통치의 한 수단이었다.

 

  • 즉결 처분권

일제는 헌병 경찰에게 사소한 범죄 행위에 대해서는 즉결 처분권을 부여하여 우리 민족을 태형(조선 태형령 1912년)에 처했다.

조선 태형령(1912)

제11조 태형은 감옥 또는 즉결 관서에서 비밀리에 행한다.

제13조 본령은 조선인에 한하여 적용한다.

 

  • 민족 언론 탄압

1910년대에는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를 제외한 대부분의 신문을 강제 폐간시켜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 제1차 조선 교육령(1911년)

일제는 제1차 조선 교육령을 발표하여 한국인의 교육을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 중심으로 편성하여 고등 교육의 기회를 제한하였다. 또한 민족 교육을 강조하던 사립 학교를 탄압하였다.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4년으로 규정하였다.

1918년 일제는 <서당 규칙>을 통해 서당 설립을 인가제(허가제)로 바꾸었다.

 

  • 105인 사건(1911년)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하여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일제의
산업 침탈

  • 회사령 공포

1910년 일제는 민족 기업을 규제하기 위하여 회사령을 제정, 공포하였다.

회사령

제1조 회사의 설립은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2조 조선 외에서 설립한 회사가 조선에 본점이나 지점을 설립하고자 할 때는 조선 총독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제5조 회사가 본령이나 본령에 의거하여 발하는 명령과 허가 조건에 위반하거나 공공질서와 선량한 풍속에 반하는 행위를 할 때 조선 총독은 사업의 정지, 지점의폐쇄, 또는 회사의 해산을 명한다.

 

  • 회사령 허가제

회사령은 기업의 설립을 총독의 허가제로 하고, 허가 조건을 위반할 때에는 총독이 사업의 금지와 기업의 해산을 명할 수 있게 규정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인의 기업 활동이 억압되고 민족 산업의 성장이 저해되었다.

 

  • 임업

임업 부문에서 산림령에 따른 임야 조사 사업이 실시되어, 막대한 국⋅공유림과 소유주가 명확하지 않았던 임야가 거의 일본인에게 넘어가 전체 임야의 50% 이상이 조선 총독부와 일본인에게 점탈되었다.

 

  • 어업

조선 총독부는 어업령을 공포하여 일본 어민의 성장을 지원하고 우리 어민의 활동을 억압하였다.

 

  • 광업

조선 총독부는 전국의 광산 자원을 광범위하게 조사하고, 우리 민족의 광업 활동을 제약하는 광업령을 제정, 공포한 후 일본인 재벌에게 많은 광산을 넘겼다.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

  • 1937년(중일전쟁) ~ 1945년

 

  • 배경

192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 공황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제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하나로 묶는 경제 블록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노동력과 자원은 일제에게 보다 철저히 수탈당하였다.

그 후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만주사변), 더 나아가 1937년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강행하면서 한국을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다.

그리고는 식민 정책을 강화하여 우리 민족을 더욱 탄압하였고, 모든 방면에 걸쳐 식민지 수탈 정책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 국왕에 대한 숭배 사상을 주입하는 민족 말살 통치를 실시하였다. 이는 한국인을 침략 전쟁에 효율적으로 동원하려는 의도였다.

 

  • 병참 기지화 정책
    • 조선 공업화 정책

일제는 만주 점령 이후 만주를 농업 원료 지대로, 한국을 중화학 공업 지대로 설정하고 조선 공업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 남면 북양 정책

일제는 일본에 필요한 공업 제품의 원료를 생산하기 위해 면화의 재배와 면양의 사육을 시도하는, 이른바 남면 북양 정책을 수립하였다.

 

  • 국가 총동원법(1938년)

일제는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본격적으로 인력과 물자의 수탈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는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우리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 황국 신민화 정책

일제는 우리의 민족 정신을 뿌리뽑기 위해 이른바 일⋅선 동조론을 주장하였고,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창씨개명 1940년), 황국 신민 서사 암송(1937년),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1941년 소학교의 명칭을 ‘황국 신민 학교’라는 뜻의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 제3차 조선 교육령(1938년)

일제는 제3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 교육을 사실상 폐지(선택 과목)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 제4차 조선 교육령(1943년)

일제는 조선어 과목을 완전히 폐지했다.

 

  • 언론 폐간

1940년에는 한글을 사용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신문을 폐간하였다.

 

  • 일상생활·사상 통제

1930년대부터 일제는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행동은 물론이고 사상까지 통제하고 감시하였다.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 시기, 중일전쟁 후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침략 전쟁에서 한국인의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 조선 연맹을 조직하였다. 연맹의 가장 하부에는 애국반을 조직하였고, 반상회를 통해 일본어 사용, 전쟁을 위한 애국 저금 등의 정책을 홍보하였다.

1940년 초 일제가 강점기 막바지에 여성의 노동력을 얻기 위해 몸뻬를 고안해 냈다.

1936년 제정된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은 <치안 유지법> 위반자 중 집행 유예, 형 집행 종료 또는 가출옥한 사람을 대상으로 2년간 보호 관찰을 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었다.

1941년 제정된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은 이에 더 나아가서 <치안 유지법>을 위반하여 형에 처해진 경력이 있는 자를 그 집행을 마치고 석방된 이후에도 필요한 경우 검경이 법원의 영장 없이도 자의적으로 계속하여 구금하거나 일정하게 제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반인권적 조치였다.

1920년대
무장 독립 전쟁

  • 배경

3·1 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인 전개가 지름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 봉오동 전투(1920년)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 청산리 전투(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패패한 일제는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고(훈춘 사건),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 간도 참변(1920년)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였다.

 

  • 독립군의 이동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 자유시 참변(1921년)

1920년 간도 참변 이후 독립군은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으로 조직되었다.

독립군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 3부의 성립

독립군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큰 시련을 겪고 만주로 돌아와 조직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재정비하였다.

이들 3부는 한인 사회를 자치적으로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 등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자료: 우리 역사넷

 

    • 참의부

압록강 연안 지역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설립되었다.

 

    • 정의부

남만주 지린성과 봉천성 일대를 담당했다.

 

    • 신민부

북만주 지역을 담당했다.

 

  • 미쓰야 협정(1925년)

그러나 독립군은,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독립군의 탄압을 위하여 맺어진 이른바 미쓰야 협정에 의해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다.

1925년 일제와 만주 군벌은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의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였다.

 

  • 3부 통합 운동

1920년대 후반 제1차 국공 합작의 영향으로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 내용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 남만주에는 국민부가,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가 조직되었다.

양세봉 등이 중심이 된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아래에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지청천 등이 중심이 된 혁신 의회는 해체된 후,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이 창설되었다.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 ↘
혁신 의회
(북만주)
국민부
(남만주)
| |
한국 독립당
한국 독립군
조선 혁명당
조선 혁명군
일제의
국가 총동원법
1937년 중·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인적 물적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였다.

 

  • 인적 수탈
    • 군사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병력이 부족해지자 수많은 한국인 청년을 강제 동원했다.

태평양 전쟁으로 전선이 확대되자, 일제는 1943년에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실시하여 많은 학생까지 전쟁터로 끌고 갔다.

1938년 지원병제, 1943년 학도 지원병제, 1944년 징병제 시행.

 

    • 노동

일제는 전쟁에 필요한 노동력도 강제로 동원하였다.

1939년 국민 징용령, 1944년 여자 정신 근로령 시행.

 

    • 일본군 위안부

일제는 수많은 여성들을 중국과 남양 군도 등지의 전쟁 지역으로 끌고 가 일본군 위안부라는 이름으로 끔찍한 삶을 강요하였다.

 

  • 물적 수탈
    • 공출 제도

일제는 놋그릇, 놋대야, 수저, 농기구, 교회와 사찰의 종 등 무기를 만들 수 있는 금속 제품이라면 가리지 않고 빼앗았다.

 

    • 산미 증식 계획 재시행

일제는 전쟁으로 식량이 부족해지자 산미 증식 계획을 다시 시행하였다.

 

    • 식량 배급제

일제는 농가마다 목표량을 정해 미곡 공출제와 식량 배급제를 실시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배경

1910년대 한국인 교육은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에 치중되었고,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한국인도 많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교육에 대한 한국인들의 요구가 높아졌고, 제2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한국인의 힘으로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 전개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만들어졌다(1922년 11월).

이를 바탕으로 출범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는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

 

  • 결과

그러나 일제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방해하고, 잇따른 자연재해로 모금 운동이 어려워지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하였다.

한편 일제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교육하고 한국인의 교육열을 무마하기 위해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80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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