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회 한능검 심화 37번 해설 – 청산리 전투, 쌍성보 전투

37번 문제

37. (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가) 대한 군정서(북로 군정서) 총재 서일로부터 1월 15일 우리 대본영에 도착한 보고에 따르면 경과한 상황은 다음과 같다.

…… 화룡현·삼도구·청산리 또는 이도구에서 적군과 전투를 벌여 수많은 적의 장졸을 살상했는데 ……

– 적군의 사상자: 사망자 연대장 1인, 대대장 2인, 기타 장교이하 1,254인, 부상자 장교 이하 200여 인

– 『독립신문』 –

(나) 14일 밤에 쌍성현을 습격할 때 한국 독립군은 우익이 되어 성의 서문을 공격하였는데, 이 총사령(지청천)이 친히 지휘하였다. …… 이 싸움에서 일본군 사망이 22인이며, 각종 군수 물자를 획득한 것이 속사포 5문, 평사포 3문, 탄약 50상자, 만주 군대 귀순자 1,200인에 달하였다.

– 『신한민보』 –

① 박상진 등이 대한 광복회를 결성하였다.

② 임병찬이 주도하여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③ 무장 투쟁을 위해 육군 주만 참의부가 편성되었다.

④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⑤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산하에 조선 의용대가 창설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가)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나)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1932년),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뒀다.

 

① 박상진 등이 대한 광복회를 결성하였다.

1915년 박상진, 김좌진 등은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임병찬이 주도하여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1912년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무장 투쟁을 위해 육군 주만 참의부가 편성되었다.

1919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부 조직에 군무부를 설치하여 군사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군무부 아래에는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 총영 등을 두었으며, 이후 육군 주만 참의부(1924년)를 편성하여 무장 투쟁을 펼쳤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안중근이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1909년 의병장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표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도착했을 때, 그를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산하에 조선 의용대가 창설되었다.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아래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 부대인 조선 의용대가 김원봉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조선 의용대는 일본군의 정보 수집, 포로 신문, 후방 교란, 심리전 등을 수행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1920년대
무장 독립 전쟁

  • 배경

3·1 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인 전개가 지름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 봉오동 전투(1920년)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 청산리 전투(1920년)

봉오동 전투에서 패패한 일제는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고(훈춘 사건),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 간도 참변(1920년)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였다.

 

  • 독립군의 이동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 자유시 참변(1921년)

1920년 간도 참변 이후 독립군은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여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으로 조직되었다.

독립군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 3부의 성립

독립군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큰 시련을 겪고 만주로 돌아와 조직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재정비하였다.

이들 3부는 한인 사회를 자치적으로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 등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자료: 우리 역사넷

 

    • 참의부

압록강 연안 지역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설립되었다.

 

    • 정의부

남만주 지린성과 봉천성 일대를 담당했다.

 

    • 신민부

북만주 지역을 담당했다.

 

  • 미쓰야 협정(1925년)

그러나 독립군은,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독립군의 탄압을 위하여 맺어진 이른바 미쓰야 협정에 의해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다.

1925년 일제와 만주 군벌은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의 미쓰야 협정을 체결하였다.

 

  • 3부 통합 운동

1920년대 후반 제1차 국공 합작의 영향으로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 내용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 남만주에는 국민부가,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가 조직되었다.

양세봉 등이 중심이 된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아래에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지청천 등이 중심이 된 혁신 의회는 해체된 후,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이 창설되었다.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 ↘
혁신 의회
(북만주)
국민부
(남만주)
| |
한국 독립당
한국 독립군
조선 혁명당
조선 혁명군

1930년대
무장 독립 전쟁

  • 배경

일제가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키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독립군은 보다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 한·중 연합 작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 ↘
혁신 의회
(북만주)
국민부
(남만주)
| |
한국 독립당
한국 독립군
조선 혁명당
조선 혁명군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각각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 한국 독립군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은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1932년),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승리했다.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의 일부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고, 한국광복군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 조선 혁명군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신개령 전투, 통화현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 중국 관내의 무장 독립 전쟁
    • 민족 혁명당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만주 일대에서 무장 투쟁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1935년 중국 난징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의 연결선상에서 김원봉, 조소앙, 지청천 등이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민족 혁명당 결성에는 김구를 제외한 한국 독립당(임시 정부 계열),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 혁명당, 대한독립당 등이 참여하였다.

 

    • 한국 국민당

1935년 민족 혁명당에 합류하지 않은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 조선 민족 혁명당

의열단의 김원봉의 전권 장악에 반발한 한국 독립당계(임시 정부 계열, 조소앙)와 신한 독립당계(지청천 또는 이청천)가 탈퇴한 후, 민족 혁명당은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개편됐다.

탈퇴한 조소앙은 한국 독립당(임시 정부 계열)을 재건했다.

탈퇴한 지청천(또는 이청천)은 조선 혁명당을 재건했다.

 

    • 조선 민족 전선 연맹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민족 혁명당은 다른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

 

    • 조선 의용대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아래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 부대인 조선 의용대가 김원봉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조선 의용대는 일본군의 정보 수집, 포로 신문, 후방 교란, 심리전 등을 수행하였다.

 

      • 분화

조선 의용대는 항일 투쟁에 대한 노선이 나뉘어져 분화되었다.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원하는 조선 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결성했다.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호가장 전투 등이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김원봉을 포함한 조선 의용대 본대 잔류 인원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민족 혁명당 결성
(김원봉, 조소앙, 지청천 등)
한국 국민당
(김구)
↓ .
조선 민족 혁명당 개편
(김원봉)
→

탈퇴

한국 독립당
(조소앙)조선 혁명당
(지청천)
↓ ↓
조선 민족 전선 연맹 결성
↓
조선 의용대
↓ 분화 ↓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

조선 의용대 본대

(김원봉)

→

합류

한국 독립당
한국광복군

 

  •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 전쟁
    • 동북 인민 혁명군

중국 공산당은 만주 지역 곳곳에 만들어진 항일 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을 조직하였다(1933년).

 

    • 동북 항일 연군

이후 동북 인민 혁명군은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반일 세력을 받아들인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확대·개편되었다(1936년).

 

    • 조국 광복회

동북 항일 연군 내의 한 부대로 편성된 한인 유격대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까지 포함하여 조국 광복회를 결성하였다(1936년).

1937년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가들의 지원 아래 함경도 보천보의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보천보 전투).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 독립 의군부(1912년)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 대한 광복회(1915년)

박상진, 김좌진 등은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대한 광복회는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덕태상회를 통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 송죽회(1913년)

평양 숭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송죽회를 결성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항일 의병 운동
  • 을미의병(1895년)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다.

이소응 부대는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유인석 부대는 제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자, 의병들은 대부분 활동을 중단하였다.

 

  • 활빈당

을미의병의 활동 후, 1900년을 즈음하여 해산된 농민들의 일부가 활빈당을 조직하여 반봉건⋅반침략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활빈당은 양반·부호, 관청, 장시 등을 습격하여 무기와 재물을 약탈하고, 그 중에서 일부를 빈민에게 분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과 행상, 유민, 노동자, 걸인 등으로 조직되었다.

활빈당 요구 사항

  • 시급히 방곡령을 실시할 것.
  •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엄금할 것.
  • 행상인에게 징세하는 폐단을 금할 것.
  •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 사전을 혁파하고 균전(均田)을 실시할 것.
  • 다른 나라에 철도 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 을사의병(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대규모의 의병 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익현은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 을사늑약에 대한 항거
    • 안중근 의사

의병장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표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도착했을 때, 그를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1909년).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또한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다.

 

    • 이재명

이재명은 명동 성당 앞에서 을사 5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칼로 찔러 부상을 입혔다.

 

    • 민영환 순국

고종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민영환은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 5적 암살단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을사 5적

박제순,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 시티븐스 저격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8년 전명운, 장인환이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미국인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 정미의병(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 때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결정되자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였고, 해산된 군인들이 일본군과 서울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 항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각 지방의 해산 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무기를 갖추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 13도 창의군(1908년)

정미의병 이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이 때, 의병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하여, 스스로 독립군임을 내세웠다.

그 중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남한 대토벌 작전(1909년)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던 의병 투쟁은 그 후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일부 의병 부대는 국권을 빼앗긴 후에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6년 제80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해설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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