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회 한능검 심화 44번 해설 – 여운형

44번 문제

44. (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①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결성하였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③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④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⑤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이끌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위 자료의 인물은 여운형이다.

 

①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결성하였다.

안창호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조선어 학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옥고를 치렀다.

여운형은 조선어 학회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김규식과 함께 좌우 합작 위원회를 조직하였다.

1946년 단독 정부 수립에 따른 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세력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서 활동하였다.

여운형은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서 활동하지 않았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이끌었다.

1945년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여운형
  • 호는 몽양
  •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김규식 등이 신한 청년당을 결성
  • 1944년 여운형, 안재홍 등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조선 건국 동맹 조직
  • 1945년 광복 후 엔도 정무총감과의 회담에서 사회 안정에 관한 요구 사항을 관철
  • 일제가 패망하자 즉각 여운형, 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 건국 동맹은 좌우 세력을 연합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를 조직
  • 1946년 좌우 합작 운동을 주도
  • 1947년에 한지근에 의해 암살당함
광복 직후
국내 정세
  •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즉각 여운형, 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하는 조선 건국 동맹은 좌우 세력을 연합하여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를 조직하였다.

건준은 전국에 지부와 치안대를 조직하였다.

또한 건준은 미군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기 위해 중앙 조직을 정부 형태로 개편하고 각 지부도 인민 위원회로 바꾸어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

1945년 그 해에 해산하였다.

 

  • 기타 정당 활동
    • 한국 민주당

1945년 송진우와 김성수를 중심으로 결성된 한국 민주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지지를 선언하였으며, 미 군정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이 귀국하여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를 조직하였다.

 

    • 한국 독립당

김구는 귀국 후 한국 독립당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 국민당

1945년 안재홍은 국민당을 조직하였다.

 

    • 조선 인민당

조선 인민당은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당이다.

 

    • 남조선 노동당

1946년 박헌영은 남조선 노동당(남로당)을 조직하였다.

좌우 합작 운동
  • 배경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되고, 이승만은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하자고 주장하였다.

 

  • 좌우 합작 운동(1946년)

단독 정부 수립에 따른 분단을 막기 위해 여운형과 김규식 등 중도 세력은 좌우 합작 위원회를 구성하여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을 전개했다.

미군정도 한국인의 지지를 얻고 소련과의 협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려고 좌우 합작 위원회를 지원하였다.

 

  • 좌우 합작 7원칙

1946년 10월 좌우 합작 위원회는 토지 개혁과 친일파 처벌 등에 대한 좌우익의 의견을 절충하여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미 군정은 이 원칙을 근거로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을 출범시켰다.

하지만 좌우 합작 7원칙 중 신탁 통치, 토지 개혁, 친일파 처벌 문제 등에서 좌익과 우익의 의견이 충돌하였다.

 

  • 여운형 암살

그러다 여운형이 한치근에 의해 암살되면서 좌우 합작 운동은 중단되었다.

1910년대
국외 민족 운동
  • 서간도(남만주) – 삼원보, 신한민촌, 경학사,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국권 피탈 이후 서간도로 이주한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상룡 등은 서간도(남만주)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였고, 이곳에서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 강습소를 세웠다.

지치 기관인 경학사는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서로 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신흥 강습소는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이후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였다.

 

  • 북간도 – 서전서숙, 명동 학교, 중광단

북간도로 이주한 동포들은 용정촌, 명동촌 등 한인 집단촌을 형성하고 간민회 등의 자치 단체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이끌었다.

이상설, 김약연 등은 각각 서전서숙과 명동 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대종교는 북간도로 거점을 옮겼고, 서일 등 신자 중 일부가 무장 독립 단체인 중광단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개편하였다.

 

  • 북만주 – 한흥동

이상설, 이승희 등은 북만주 밀산부에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 연해주 – 신한촌, 권업회, 대한 광복군 정부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만들어졌고,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권업회의 초대 회장은 최재형이었다.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외 한인 단체인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가 결성되었고, 이동휘 등이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 중국 – 동제사, 박달 학원, 신한 청년당 김규식, <대동단결선언>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1912년), 박달 학원(1913년) 등이 조직되었다.

1912년 7월 신규식과 박은식 등은 상하이에서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조소앙은 1913년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는 장차 전개될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교육을 중시했고, 중국의 각종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100여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5년 베이징에서는 신규식, 박은식 등이 신한 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17년에는 신규식, 조소앙 등이 국민 주권론과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김규식 등이 신한 청년당을 결성했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 미주 – 대한인 국민회, 흥사단, 대조선 국민 군단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05년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한국인들이 이주하여 에네켄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 생활을 하였다. 1910년에는 숭무학교가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을 계기로 1910년 안창호 등이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는 신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13년에는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군사 훈련을 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위해 한인 비행 학교를 설립하였다.

일제 강점기
국어 연구
  • 조선어 연구회(1921년)

3⋅1 운동 이후 국문 연구소의 전통을 이어 이윤재, 최현배 등은 조선어 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이란 잡지를 간행하여 그 연구 성과를 정리, 발표하였다.

또한 이들은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1926년)을 정하고 우리말쓰기를 권장함으로써 한글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조선어 학회(1931년)

조선어 연구회는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 학회로 개편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더 나아가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이라 한다.

반민족 행위
처벌법
  • 배경

대한민국 정부 수립 전, 미군정은 조선 총독부 출신 관료와 경찰들을 활용하면서 친일파 처단을 외면하였다.

 

  • 반민족 행위 처벌법 제정

제헌 헌법 101조는 ‘이 헌법을 제정한 국회는 1945년 8월 15일 이전의 악질적인 반민족 행위를 처벌하는 특별법을 제정할 수 있다’고 규정하여, 새롭게 탄생할 대한민국 정부가 친일파를 처단할 수 있는 헌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948년 9월, 제헌 국회에서는 민족적 과제인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민족 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반민족 행위 처벌법을 제정하였다.

또한 이 법을 근거로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반민특위)와 특별 재판부가 조직되었다.

 

  • 내용

반민족 행위 처벌법에는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처벌하고, 재산 몰수 등의 내용이 담겼다.

 

  • 방해

친일파 처벌보다 반공을 명분으로 내세운 이승만 정부는 반민특위 활동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1949년 반민특위 소속 국회 의원들 중 일부가 공산당과 접촉하였다는 구실로 구속되었다(국회 프락치 사건).

또한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혐의로 고위급 경찰이 체포되자 일부 경찰이 반민 특위 사무실을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반민특위 습격 사건).

그리고 반민족 행위 처벌법이 개정되어 친일파 처벌 기한이 줄어들었다(공소시효 단축).

 

  • 결과

반민특위는 활동을 개시한 지 몇 개월도 채 되지 않아 해체되었으며, 682건의 친일 행위를 조사하는 데에 그쳤다.

재판에 회부된 사람들 가운데 실형을 선고받은 자는 이광수, 최남수, 최린 등 12명에 불과하였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은 감형되거나 형 집행 정지로 풀려났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6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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