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회 한능검 심화 29번 해설 – 최익현

29번 문제

29. (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①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여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② 국권 피탈 과정을 정리한 한국통사를 집필하였다.

③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④ 13도 창의군을 지휘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⑤ 보국안민을 기치로 우금치에서 일본군 및 관군에 맞서 싸웠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위 자료의 인물은 최익현이다.

 

①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여 친일파를 처단하였다.

1915년 박상진, 김좌진 등은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국권 피탈 과정을 정리한 한국통사를 집필하였다.

박은식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을사늑약 체결에 반대하여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최익현은 을사의병 때 태인(정읍)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13도 창의군을 지휘하여 서울 진공 작전을 전개하였다.

정미의병 이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1908년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보국안민을 기치로 우금치에서 일본군 및 관군에 맞서 싸웠다.

1894년 11월 전봉준은 동학 농민군을 이끌고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

결국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항일 의병 운동
  • 을미의병(1895년)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다.

이소응 부대는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유인석 부대는 제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자, 의병들은 대부분 활동을 중단하였다.

 

  • 활빈당

을미의병의 활동 후, 1900년을 즈음하여 해산된 농민들의 일부가 활빈당을 조직하여 반봉건⋅반침략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활빈당은 양반·부호, 관청, 장시 등을 습격하여 무기와 재물을 약탈하고, 그 중에서 일부를 빈민에게 분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과 행상, 유민, 노동자, 걸인 등으로 조직되었다.

활빈당 요구 사항

  • 시급히 방곡령을 실시할 것.
  •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엄금할 것.
  • 행상인에게 징세하는 폐단을 금할 것.
  •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 사전을 혁파하고 균전(均田)을 실시할 것.
  • 다른 나라에 철도 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 을사의병(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대규모의 의병 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익현은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 을사늑약에 대한 항거
    • 안중근 의사

의병장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표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도착했을 때, 그를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1909년).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또한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다.

 

    • 이재명

이재명은 명동 성당 앞에서 을사 5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칼로 찔러 부상을 입혔다.

 

    • 민영환 순국

고종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민영환은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 5적 암살단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을사 5적

박제순,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 시티븐스 저격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8년 전명운, 장인환이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미국인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 정미의병(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 때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결정되자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였고, 해산된 군인들이 일본군과 서울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 항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각 지방의 해산 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무기를 갖추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 13도 창의군(1908년)

정미의병 이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이 때, 의병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하여, 스스로 독립군임을 내세웠다.

그 중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남한 대토벌 작전(1909년)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던 의병 투쟁은 그 후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일부 의병 부대는 국권을 빼앗긴 후에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최익현
  • 1873년 최익현의 상소로 흥선 대원군이 물러나고, 고종의 친정 체제 시작
  • 지부복궐척화의소를 올려 왜양일체론을 주장
  • 1895년 을미개혁 때 단발령에 반대하는 상소 올림
  • 을사의병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킴.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 독립 의군부(1912년)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 대한 광복회(1915년)

박상진, 김좌진 등은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대한 광복회는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덕태상회를 통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 송죽회(1913년)

평양 숭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송죽회를 결성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일제 강점기
한국사 연구

  • 일제의 한국사 왜곡

일제는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다.

 

  • 조선사 편수회

1925년 조선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주의 사관을 토대로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 민족주의 사학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발전 주체가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 박은식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 정신을 혼(魂)으로 파악하여, 혼이 담겨 있는 민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 기출 자료
우리 민족은 단군 성조(檀君聖祖)의 자손으로서 동해의 명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인재의 배출과 문물의 제작에 있어서 우수한 자격을 갖추어, 다른 민족보다 뛰어난 것도 사실이다. …(중략)… 우리의 국혼(國魂)은 결코 다른 민족에 동화될 수 없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한국은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져 문화가 일찍부터 열렸고, 그 백성들은 착하여 천하 사람들이 군자의 나라라고 일컬었다. 역사는 면면히 흘러 4300여 년이나 되었다.

오호라! 옛 문화가 일본에 펴져, 저들(일본)의 음식, 의복, 가옥이 우리에게서 나갔고, 종교와 학술 또한 우리에게서 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일찍이 우리를 스승으로 삼아 왔음에도 이제는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 하는가?

………(중략)………

아름다운 산천이여, 우리 조상들이 여기에 살았고, 울창한 산림이여, 우리 조상들이 이를 심었으며, 금, 은, 동, 철도 우리 조상들이 채취했고, 가축과 물고기도 우리 조상들이 길러 왔다. 이 땅의 모든 문명이 다 우리 조상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중략)………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져도 민족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은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곧게 남아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을 저술한 까닭이다.

-한국통사-

 

    • 신채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를 지어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독사신론을 저술하였다.

신채호는 낭가 사상을 강조하였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에서 발전하여 공간까지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많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투쟁이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조선 상고사〉

 

    • 조선학 운동

193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 사학은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으로 계승되었고, 이들은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인보는 ‘얼’ 사상을 강조하였다.

문일평은 ‘조선심’을 강조했다.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기를 맞아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 실증 사학

실증 사학자들은 문헌 고증으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역사가의 주관적인 판단 없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이병도 등은 1934년 진단 학회를 조직하고 진단 학보를 발간하였다.

 

  • 사회 경제 사학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 사학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유물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다.

 

    • 기출 자료
조선사의 계기적 변동의 법칙을 파악할 경우, 과거 몇 천 년 간의 사적(史蹟)을 살피는 것도 당연히 우리의 과제이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나의 조선관은 그 사회 경제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본질적으로 분석, 비판, 총관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조선사회경제사

우리 조선 역사 발전의 전 과정은, 예를 들어 지리적인 조건, 인류학적인 골상 등에서 다소의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외관적인 특수성은 다른 문화 민족의 역사적 발전 법칙과 구별될 만큼 독자적인 것은 아니다. 세계사적 역사 법칙에 따라 다른 여러 민족과 거의 같은 발전 과정을 거쳤다.

 

  • 신민족주의 사학

손진태는 조선민족사개론을 저술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
  • 배경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당시 농촌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외세의 침투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하여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청일 상인에 의해 영국산 면직물이 싼값에 들어오면서 면포를 짜서 팔던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이 늘어 곡물 가격이 오르자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커졌다.

개화 정책으로 늘어난 정부의 재정 지출은 농민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졌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혁 욕구도 높아졌다.

 

  • 동학의 교세 확장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동학의 인간 평등 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동학의 포접제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포접제

동학은 마을이나 군 단위로 접을 조직하고 수십 개의 접을 포로 묶어 포교의 기초 조직으로 삼았다. 접의 책임자는 접주, 포의 책임자는 대접주라고 불렀다

 

  • 동학의 교조 신원 운동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자 지방관들은 동학을 탄압하였고 농민들에게 동학 교도의 누명을 씌워 탄압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동학교도들은 1892년부터 충청도 공주, 전라도 삼례, 한성 등에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 삼례 집회(1892년)

동학교도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동학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 서울 집회

동학의 지도급 인사 40여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하였다.

 

  • 보은 집회(1893년)

충청도 보은에서는 동학 교도와 농민 2만여 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보은 집회에서 탐관 오리의 숙청, 일본과 서양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다가, 마침내 동학 중심의 종교 운동을 농민 중심의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켜 갔다.

 

  • 고부 농민 봉기(1894년 1월)

농촌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횡포와 착취를 저지르며 농민들을 수탈했다.

농민들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봉기하였다.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려 세력을 모았다.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풀어 주고, 창고의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었다.

이에 정부가 새로운 군수를 임명하자 농민들은 군수의 다짐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다.

 

  • 제1차 농민 봉기(1894년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라는 죄목으로 잡아들이고 탄압하자 농민들의 분노가 다시 거세졌다.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전라도 각지에서 농민군을 모아 무장에서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 백산 봉기

이들은 고부를 점령하고 나서 백산에서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라는 뜻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라는 뜻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구호를 담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백성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4대 강령을 발표했다.

 

    • 황토현 전투
    • 황룡촌(전남 장성) 전투: 농민군이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을 격파했다.
    • 전주성 점령(1894년 4월)

 

  • 전주 화약(1894년 6월)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은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주 화약이라고 한다.

 

  • 집강소 설치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집강소

전라도 지역 53개 고을의 치안 유지와 행정 사무를 담당하게 한 자치 기구이다.

폐정 개혁 12개조

1. 도인(道人)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7.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無名雜稅)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 교정청 설치(1894년 6월)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로 조선 정부는 이를 반영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 경복궁 점령(1894년 7월 23일)

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간섭을 하였다(군국기무처 설치).

 

  • 청⋅일 전쟁(1894년 7월 25일)

경복궁 점령 이틀 뒤, 마침내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 제2차 농민 봉기(1894년 9월)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 우금치 전투(1894년 11월)

남접 농민군과 북접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

결국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 시모노세키 조약(1895년 4월)

전쟁에서 패한 청은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1895년).

청은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 삼국 간섭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다고 일본을 압박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청에게 할양 받은 랴오둥 반도를 청에 돌려주는 대신 보상금을 받았다.

 

  • 동학 농민 운동의 의의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봉건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여 노비 문서의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 등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4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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