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회 한능검 심화 12번 해설 – 고려 거란의 침입

12번 문제

12. (가) 국가에 대한 고려의 대응으로 옳은 것은? [2점]

① 박위를 보내 근거지를 토벌하였다.

② 조총 부대를 나선 정벌에 파견하였다.

③ 개경을 방어하기 위해 나성을 축조하였다.

④ 압록강 상류 지역을 개척하여 4군을 설치하였다.

⑤ 국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비변사를 신설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010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트집잡아 다시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하였다.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했다.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① 박위를 보내 근거지를 토벌하였다.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침입했을 때 최영이 홍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조총 부대를 나선 정벌에 파견하였다.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변급과 신유가 지휘하는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개경을 방어하기 위해 나성을 축조하였다.

1018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했다.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한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전멸시켰다(귀주대첩).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압록강 상류 지역을 개척하여 4군을 설치하였다.

조선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다.

4군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최윤덕은 여진족 이만주 부대를 정벌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국방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비변사를 신설하였다.

비변사는 조선 중종 때 삼포왜란을 계기로 임시 회의 기구로 설치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고려
거란의 침입
  • 거란의 1차 침입

993년 고려 성종 때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 서희의 담판 외교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확보

 

  • 거란의 2차 침입

1010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트집잡아 다시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

 

  • 거란의 3차 침입

1018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 강감찬이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한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전멸시킴(귀주대첩).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음

고려 현종
  • 전국을 5도와 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는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
  •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려고 초조대장경 간행
왜구의 침입 고려 말 공민왕 때 왜구에게 강화도까지 약탈당하고, 개경이 위협을 받았다.

최영, 이성계 등이 나서서 왜구를 토벌하였고, 최무선은 화포를 사용하여 진포 대첩에서 왜구를 격퇴했다.

고려 우왕 때 왜구가 침입했을 때 최영이 홍산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박위는 전함 100척을 이끌고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토벌했다.

왜구의 침입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최영, 이성계 등의 무인 세력이 성장했다.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 정묘호란(1627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용골산성)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 병자호란(1636년)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강화도에서는 김상용이 항전 끝에 순절하였다.

 

  • 북벌 운동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 나선 정벌(1654년, 1658년)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변급과 신유가 지휘하는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조선-여진 관계
(4군 6진)
  • 4군 6진

조선은 영토의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하여 여진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펴 나갔다.

우선 태조에 의하여 일찍부터 두만강 지역이 개척되었다.

이어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다.

4군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최윤덕은 여진족 이만주 부대를 정벌하였다.

 

  • 회유책

조선은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기 위하여 관직을 주거나 정착을 위한 토지와 주택을 주어 우리 주민으로 동화시켰다.

또, 사절의 왕래를 통한 무역을 허용하였고, 국경 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고 국경 무역을 허락하였다.

 

  • 토벌 정책

그러나 이러한 교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고, 이 때마다 조선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였다.

 

  • 사민 정책

이와 함께 조선은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조선
비변사
  • 배경

붕당 정치가 전개되면서 정치 구조면에서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고, 3사의 기능이 바뀌는 등 여러 변화가 나타났다.

 

  • 비변사의 설치

비변사는 조선 중종 때 삼포왜란을 계기로 임시 회의 기구로 설치되었다.

명종 시기 을묘왜변을 계기로 상설 기관이 되었다.

비변사는 비국 또는 주사로 불렸다.

 

  • 비변사의 기능 강화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구성원이 3정승을 비롯한 고위 관원으로 확대되었고, 그 기능도 군사 문제뿐 아니라 외교, 재정, 사회, 인사 문제 등 거의 모든 정무를 총괄하였다.

이와 같이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자, 의정부와 6조 중심의 행정 체계는 유명무실해졌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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