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번 문제
36. (가)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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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정우회 선언의 영향으로 결성되었다.
② 만세보를 발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③ 중추원 개편을 통해 의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④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소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⑤ 태극 서관을 운영하여 계몽 서적 등을 보급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897년 러시아가 저탄소(석탄 저장소) 설치를 위해 절영도의 조차를 요구하자,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저탄소 철거까지 주장하여 마침내 러시아의 요구를 좌절시켰다.
① 정우회 선언의 영향으로 결성되었다.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최대 규모의 합법적인 민족 협동 전선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만세보를 발행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만세보는 천도교 기관지로,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되었다. 만세보는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중추원 개편을 통해 의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1898년 독립 협회는 정부와 협상을 벌여 관선 의원과 민선 의원을 같은 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설립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어린이날을 제정하고 소년 운동을 전개하였다.
1922년 천도교 소년회의 방정환과 김기전은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태극 서관을 운영하여 계몽 서적 등을 보급하였다.
신민회는 평양과 서울에 설립된 태극 서관에서 계몽 서적을 출판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아관 파천 이후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은 조선의 이권 침탈에 열을 올렸다.
독립 협회는 열강들의 이권 침탈에 저항하여 이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1897년 러시아가 저탄소(석탄 저장소) 설치를 위해 절영도의 조차를 요구하자,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저탄소 철거까지 주장하여 마침내 러시아의 요구를 좌절시켰다. 또한 한·러 은행을 폐쇄하는데 성공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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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 협회 |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권층은 친러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외세의 침투가 계속되어 나라의 자주권이 크게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년).
독립 협회는 첫 사업으로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자주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는 등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독립 협회는 독립관에서 교육과 산업 진흥, 자주독립 등의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민중을 계몽하였다.
이 무렵, 러시아의 침략적 간섭은 여전하였다.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파견하고, 한러 은행 설립, 절영도 조차 등 이권 침탈을 시도하였다. 또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독립 협회 회원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1898년). 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종로 광장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의 자주 독립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수시로 만민 공동회를 열고, 외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 및 토지 조차 요구 등에 대항하여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려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국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다.
자주 국권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증대되고 민권 의식이 고양되어 자유 민권 운동도 전개되었다. 나아가,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국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독립 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하여,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 참정 운동과 국정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 같은 활동을 통하여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1898년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켜 관민 공동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백정 출신인 박성춘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열강의 이권침탈 방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및 정치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독립 협회는 정부와 협상을 벌여 관선 의원과 민선 의원을 같은 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설립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은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 독립 협회도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정부는 황국 협회를 이용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였고, 결국은 병력을 동원하여 민중들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였다.
독립 협회의 활동은 민중을 개화 운동과 결합시켜 근대적 민중 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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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4년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1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를 배경으로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1926년 중국 북경에서 안창호의 주도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창립되었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 3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국내에서는 최린, 이광수 등이 자치 운동(자치론)을 전개하며 일제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이상재, 안재홍 등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였고, 나아가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여 민족 운동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1925년 치안 유지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진영과의 연대하고자 하였다.
치안 유지법으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은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신간회 설립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최대 규모의 합법적인 민족 협동 전선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신간회는 민족의 단결과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자를 배격하는 것을 기본 강령으로 내세웠다.
신간회 출범과 더불어 탄생한 것이 근우회였다. 근우회는 김활란 등이 중심이 되어 여성계의 민족 유일당으로 조직되었고,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와 새생활 개선을 행동 강령으로 하였다. 근우회의 창립이념과 활동의 기본 방향은 강령에 제시된 “조선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이다.
신간회는 합법적인 공간을 활용하여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식민지 교육 반대, 타협적 정치 운동 반대 등을 주장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을 비판하였다.
신간회는 광주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전국적인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다.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제1차 국공 합작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 계열과의 협동 전선 해체를 지시하였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은 신간회 해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나, 1931년에 열린 전체 대회에서 신간회를 해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신간회의 결성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극복하여 민족 협동 전선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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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년 박영효가 주도한 박문국에서 순 한문체로 발행된 한성순보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신문으로 관보의 성격을 띠었으며, 열흘에 한 번씩 발행되었다.
갑신정변으로 발행이 중단된 한성순보가 한성주보로 다시 발행되었다. 최초로 신문에 상업 광고가 게재되었다.
최초로 민간에서 간행한 신문은 독립신문이었다. 1896년에 독립 협회의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대중을 계몽하여 근대화를 촉진하려는 순 한글판과, 외국인에게 우리의 처지를 홍보하는 영문판으로 발행되었다.
1898년 국한문 혼용체를 사용한 황성신문은 장지연의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어 을사늑약을 비판하고 민족 의식을 고취하였다. 한문 교육을 받은 지식인들이 주로 구독하였다. 황성신문이 여권통문을 처음 보도하였다.
제국신문은 주로 여성들을 대상으로 하여 간행되었는데, 순 한글로 발행되었다. 신문지법에 의해 탄압을 받았다. 어용 단체인 일진회에 대해 통렬히 논박하는 등 민족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국채 보상 운동을 확산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1908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행된 한인 신문이다. 연해주 지역으로 망명한 정치인과 지식인들은 국권 회복과 러시아 한인 계몽을 위해 <해조신문>을 창간하였다. <해조신문>은 블라디보스토크(海蔘威) 지역에 거주하는 조선인 신문이라는 의미였다.
양기탁이 중심이 된 대한매일신보는 1904년에 창간되었다. 한글 보급에 크게 기여한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등을 주도하였다. 통감부의 극심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영국인 베델을 발행인으로 내세웠기 때문에 일본의 침략에 반대하는 논설을 실을 수 있었다. 특히, 의병 활동 등 민족 운동에 관한 기사를 많이 실어 민족의 여론을 불러일으키는 데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또한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폭로하는 친서를 발표하였다. 그러다 1908년 통감부는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대한매일신보를 규제하였다.
만세보는 천도교 기관지로, 국한문 혼용으로 발행되었다. 만세보는 민중 계몽에 앞장섰다.
1907년 통감부는 신문지법을 만들어 자주 독립을 요구하던 민족 언론을 탄압하였다. 그러다 1908년 통감부는 신문지법을 개정하여 제국신문과 영국인 베델이 발행인인 대한매일신보를 규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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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 계몽 운동 |
보안회는 토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립 협회에 영향을 받은 헌정 연구회는 국민의 정치 의식 고취와 입헌 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대한 자강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15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나,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자, 격렬한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강제로 해체되었다.
대한 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민권의 신장, 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지배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대한 협회의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신민회는 1907년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안창호, 양기탁 등을 지도부로 하였다.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표면적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적 실력 양성을 기도하였다.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신민회는 평양과 서울에 설립된 태극 서관에서 계몽 서적을 출판하였다. 또한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워 민족 산업의 육성에도 힘썼다.
만주에 독립군 기지(삼원보)를 건설하고,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기르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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