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번 문제
23. 밑줄 그은 ‘이 전쟁’ 중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 이달의 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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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조선 후기 문인 김창협이 편찬한 『충렬록』이다. 이 전쟁에서 충의를 지키고자 죽은 김상용 등에 관한 기록과 그들을 기리기 위한 충렬사의 건립 경위를 담고 있다. 김상용은 세자빈과 봉림대군 등 왕실 사람들을 호종하여 강화도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순절하였다. |
①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② 강홍립이 사르후 전투에 참전하였다.
③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④ 김종서가 두만강 일대에 6진을 개척하였다.
⑤ 곽재우, 김천일 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위 자료는 1636년 조선 인조 때 발생한 병자호란에 대한 내용이다.
①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였다.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강홍립이 사르후 전투에 참전하였다.
광해군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명에 요청에 따라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병자호란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김종서가 두만강 일대에 6진을 개척하였다.
조선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곽재우, 김천일 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임진왜란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용골산성)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강화도에서는 김상용이 항전 끝에 순절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변급과 신유가 지휘하는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
| 임진왜란 |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항전하였지만 패배 신립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지만 패배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둠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 사용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점령된 지역을 수복. 이를 북관대첩이라고 함.
이덕형이 구원병 요청을 위해 명에 청원사로 파견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 방어(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패배시킴(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동래성 전투 – 1592년 5월 탄금대 전투 – 1592년 6월 한산도 대첩 – 1592년 8월 제1차 진주성 전투 – 1592년 10월 평양성 전투(평양 탈환) – 1593년 2월 행주 대첩 – 1593년 3월 명량 대첩 – 1597년 10월 노량 해전 – 1598년 12월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
| 광해군의 중립 외교 |
명에 요청에 따라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사르후 전투에 참전했던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립 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은 이를 명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하였다.
일부 사림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허준, 동의보감 편찬 경기도에 대동법 시행 |
| 조선-여진 관계 (4군 6진) |
조선은 영토의 확보와 국경 지방의 안정을 위하여 여진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 정책을 펴 나갔다. 우선 태조에 의하여 일찍부터 두만강 지역이 개척되었다. 이어 세종 때에는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다. 4군 6진을 개척하는 과정에서 최윤덕은 여진족 이만주 부대를 정벌하였다.
조선은 여진족의 귀순을 장려하기 위하여 관직을 주거나 정착을 위한 토지와 주택을 주어 우리 주민으로 동화시켰다. 또, 사절의 왕래를 통한 무역을 허용하였고, 국경 지방인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두고 국경 무역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교린 정책에도 불구하고 여진족은 자주 국경을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고, 이 때마다 조선에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이들을 정벌하였다.
이와 함께 조선은 삼남 지방의 일부 주민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을 개발하는 사민 정책을 실시하였고,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민심을 수습하려 하였다. |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 65회 한능검 심화 해설 1번 ~ 50번
- 65회 한능검 심화 1번 해설 – 청동기 시대
- 65회 한능검 심화 2번 해설 – 고조선
- 65회 한능검 심화 3번 해설 – 공주(웅진) 지역의 역사
- 65회 한능검 심화 4번 해설 – 호우총 그릇
- 65회 한능검 심화 5번 해설 – 고구려 고국원왕 사망
- 65회 한능검 심화 6번 해설 – 백제 멸망, 나당 전쟁
- 65회 한능검 심화 7번 해설 – 발해
- 65회 한능검 심화 8번 해설 – 설총
- 65회 한능검 심화 9번 해설 – 통일 신라 말의 정치 변동
- 65회 한능검 심화 10번 해설 – 고려 태조
- 65회 한능검 심화 11번 해설 – 고려 성종, 시무 28조
- 65회 한능검 심화 12번 해설 – 고려 거란의 침입
- 65회 한능검 심화 13번 해설 – 고려 의천
- 65회 한능검 심화 14번 문제 – 무신정변, 이자겸의 난, 서경 천도 운동
- 65회 한능검 심화 15번 해설 – 고려 후기
- 65회 한능검 심화 16번 해설 – 고려 시대 경제
- 65회 한능검 심화 17번 해설 – 고려 주심포 건축
- 65회 한능검 심화 18번 해설 – 고려 요동 정벌
- 65회 한능검 심화 19번 해설 – 조선 성종
- 65회 한능검 심화 20번 해설 – 조선 명종, 을사사화
- 65회 한능검 심화 21번 해설 – 계유정난
- 65회 한능검 심화 22번 해설 – 몽유도원도
- 65회 한능검 심화 23번 해설 – 병자호란
- 65회 한능검 심화 24번 해설 – 조선 정조
- 65회 한능검 심화 25번 해설 – 대동법
- 65회 한능검 심화 26번 해설 – 대마도 정벌, 일본 원정, 진포 해전, 임진왜란
- 65회 한능검 심화 27번 해설 – 성호 이익
- 65회 한능검 심화 28번 해설 – 조선 후기
- 65회 한능검 심화 29번 해설 – 고종 즉위, 척화비 건립
- 65회 한능검 심화 30번 해설 – 임오군란
- 65회 한능검 심화 31번 해설 – 동학 농민 운동
- 65회 한능검 심화 32번 해설 – 헤이그 특사 파견
- 65회 한능검 심화 33번 해설 – 정미의병, 13도 창의군
- 65회 한능검 심화 34번 해설 – 아관파천
- 65회 한능검 심화 35번 해설 – 상권 수호 운동,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 65회 한능검 심화 36번 해설 – 독립 협회
- 65회 한능검 심화 37번 해설 – 근대 문물의 수용
- 65회 한능검 심화 38번 해설 – 일제 무단 통치
- 65회 한능검 심화 39번 해설 – 시대별 교육 기관
- 65회 한능검 심화 40번 해설 – 제2차 조선 교육령
- 65회 한능검 심화 41번 해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 65회 한능검 심화 42번 해설 – 일제 민족 말살 통치
- 65회 한능검 심화 43번 해설 – 조선 의용대
- 65회 한능검 심화 44번 해설 – 최현배
- 65회 한능검 심화 45번 해설 – 5.10 총선거
- 65회 한능검 심화 46번 해설 – 6.25 전쟁
- 65회 한능검 심화 47번 해설 – 박정희 정부
- 65회 한능검 심화 48번 해설 – 전두환 정부
- 65회 한능검 심화 49번 해설 – 전주 지역의 역사
- 65회 한능검 심화 50번 해설 – 김대중 정부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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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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