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번 문제
33. 다음 의병 부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 |
① 조선 혁명 선언을 지침으로 삼았다.
② 이만손이 주도하여 영남 만인소를 올렸다.
③ 상덕태상회를 통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④ 일본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제출하고자 하였다.
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결성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 때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정미의병 이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1908년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① 조선 혁명 선언을 지침으로 삼았다.
1919년 11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은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의열단원들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이만손이 주도하여 영남 만인소를 올렸다.
1880년대 들어 개화 정책이 실시되고 <조선책략>이 퍼지자,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은 영남 만인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 및 미국과의 수교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개화 반대 운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상덕태상회를 통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1915년 박상진, 김좌진 등은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대한 광복회는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덕태상회를 통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일본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제출하고자 하였다.
1912년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결성되었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 항일 의병 운동 |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다. 이소응 부대는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유인석 부대는 제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자, 의병들은 대부분 활동을 중단하였다.
을미의병의 활동 후, 1900년을 즈음하여 해산된 농민들의 일부가 활빈당을 조직하여 반봉건⋅반침략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활빈당은 양반·부호, 관청, 장시 등을 습격하여 무기와 재물을 약탈하고, 그 중에서 일부를 빈민에게 분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과 행상, 유민, 노동자, 걸인 등으로 조직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대규모의 의병 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익현은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표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도착했을 때, 그를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1909년).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또한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다.
이재명은 명동 성당 앞에서 을사 5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칼로 찔러 부상을 입혔다.
고종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민영환은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8년 전명운, 장인환이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미국인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 때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결정되자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였고, 해산된 군인들이 일본군과 서울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 항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각 지방의 해산 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무기를 갖추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정미의병 이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이 때, 의병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하여, 스스로 독립군임을 내세웠다. 그 중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던 의병 투쟁은 그 후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일부 의병 부대는 국권을 빼앗긴 후에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
||||
| 일제의 국권 피탈 |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다. 1902년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이후, 1903년 러시아가 압록강에 위치한 용암포를 강제로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일 조짐을 보이자 대한 제국은 ‘전시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인천항과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러·일 전쟁 발생 직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일본군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일본의 동의 없이 제3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한⋅일 의정서를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은 독도를 시마네현 소속으로 고시하였다.
일제는 러·일 전쟁에서 전세가 유리해지자 한국 식민지화 방안을 확정하고, 이어서 제1차 한⋅일 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외교와 재정 분야에 그들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도록 하였다. 일제는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를, 외교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재정과 외교에 본격적으로 간섭하였다.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일본이 뤼순항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파하는 등 전쟁의 승기를 잡자,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일제는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제는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였다.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순종은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바꿨다.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
일제는 1909년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사법권을 빼앗았고, 1910년 경찰권을 빼앗았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으로 왔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
||||
1919년 11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은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의열단원들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의열단은 일제의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5파괴, 7가살)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박재혁 – 1920년 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익상 –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 –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지섭 – 1924년 일본 도쿄 궁성 폭탄 투척 나석주 –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 투척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의열단원들은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관내 대부분의 민족 운동 단체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 결성(1935년)을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 대표 회의 이후 침체를 겪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졌다. 김구는 1931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중국 상하이를 침략하였다(상하이 사변).
1932년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일제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이때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요 장성과 고관들을 처단하였다.
한국 애국단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크게 호전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광복군이 조직되는 토대가 되었다. |
|||||
| 위정척사 운동 |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해 전통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1860년대 천주교가 퍼지고 서구 열강이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자 유생들은 통상에 반대하였다. 이항로, 기정진 등은 척화 주전론을 내세우며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지지하였다.
1870년대 강화도 조약의 체결 무렵에는 최익현 등이 왜양일체론을 내세우며 일본의 개항 요구에 반대하였다(개항 반대 운동).
1880년대 들어 개화 정책이 실시되고 <조선책략>이 퍼지자,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 및 미국과의 수교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개화 반대 운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반외세·반침략의 성격을 띤 위정척사 운동은 항일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유인석은 을미의병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
||||
|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박상진, 김좌진 등은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대한 광복회는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덕태상회를 통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평양 숭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송죽회를 결성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 65회 한능검 심화 해설 1번 ~ 50번
- 65회 한능검 심화 1번 해설 – 청동기 시대
- 65회 한능검 심화 2번 해설 – 고조선
- 65회 한능검 심화 3번 해설 – 공주(웅진) 지역의 역사
- 65회 한능검 심화 4번 해설 – 호우총 그릇
- 65회 한능검 심화 5번 해설 – 고구려 고국원왕 사망
- 65회 한능검 심화 6번 해설 – 백제 멸망, 나당 전쟁
- 65회 한능검 심화 7번 해설 – 발해
- 65회 한능검 심화 8번 해설 – 설총
- 65회 한능검 심화 9번 해설 – 통일 신라 말의 정치 변동
- 65회 한능검 심화 10번 해설 – 고려 태조
- 65회 한능검 심화 11번 해설 – 고려 성종, 시무 28조
- 65회 한능검 심화 12번 해설 – 고려 거란의 침입
- 65회 한능검 심화 13번 해설 – 고려 의천
- 65회 한능검 심화 14번 문제 – 무신정변, 이자겸의 난, 서경 천도 운동
- 65회 한능검 심화 15번 해설 – 고려 후기
- 65회 한능검 심화 16번 해설 – 고려 시대 경제
- 65회 한능검 심화 17번 해설 – 고려 주심포 건축
- 65회 한능검 심화 18번 해설 – 고려 요동 정벌
- 65회 한능검 심화 19번 해설 – 조선 성종
- 65회 한능검 심화 20번 해설 – 조선 명종, 을사사화
- 65회 한능검 심화 21번 해설 – 계유정난
- 65회 한능검 심화 22번 해설 – 몽유도원도
- 65회 한능검 심화 23번 해설 – 병자호란
- 65회 한능검 심화 24번 해설 – 조선 정조
- 65회 한능검 심화 25번 해설 – 대동법
- 65회 한능검 심화 26번 해설 – 대마도 정벌, 일본 원정, 진포 해전, 임진왜란
- 65회 한능검 심화 27번 해설 – 성호 이익
- 65회 한능검 심화 28번 해설 – 조선 후기
- 65회 한능검 심화 29번 해설 – 고종 즉위, 척화비 건립
- 65회 한능검 심화 30번 해설 – 임오군란
- 65회 한능검 심화 31번 해설 – 동학 농민 운동
- 65회 한능검 심화 32번 해설 – 헤이그 특사 파견
- 65회 한능검 심화 33번 해설 – 정미의병, 13도 창의군
- 65회 한능검 심화 34번 해설 – 아관파천
- 65회 한능검 심화 35번 해설 – 상권 수호 운동, 황무지 개간권 요구 반대 운동, 국채 보상 운동
- 65회 한능검 심화 36번 해설 – 독립 협회
- 65회 한능검 심화 37번 해설 – 근대 문물의 수용
- 65회 한능검 심화 38번 해설 – 일제 무단 통치
- 65회 한능검 심화 39번 해설 – 시대별 교육 기관
- 65회 한능검 심화 40번 해설 – 제2차 조선 교육령
- 65회 한능검 심화 41번 해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 65회 한능검 심화 42번 해설 – 일제 민족 말살 통치
- 65회 한능검 심화 43번 해설 – 조선 의용대
- 65회 한능검 심화 44번 해설 – 최현배
- 65회 한능검 심화 45번 해설 – 5.10 총선거
- 65회 한능검 심화 46번 해설 – 6.25 전쟁
- 65회 한능검 심화 47번 해설 – 박정희 정부
- 65회 한능검 심화 48번 해설 – 전두환 정부
- 65회 한능검 심화 49번 해설 – 전주 지역의 역사
- 65회 한능검 심화 50번 해설 – 김대중 정부
한국사 시험 모음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 연표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1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1점 문제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고급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중급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초급
- 한국사 공무원 시험
- 한국사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연표
- 선사 ~ 고조선 역사 연표
- 삼국 시대 역사 연표
- 통일 신라 발해 남북국 시대 역사 연표
- 후삼국·고려 시대 역사 연표
- 조선 전기 역사 연표
- 조선 후기 역사 연표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역사 연표
- 일제 강점기 역사 연표
- 현대사 연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