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회 한능검 심화 14번 해설 – 고려 농민과 천민의 봉기

14번 문제

14. 다음 자료를 활용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1점]

① 노비안검법이 실시된 목적을 알아본다.

② 삼정이정청이 설치된 과정을 살펴본다.

③ 사심관 제도가 시행된 사례를 조사한다.

④ 집강소에서 추진한 개혁의 내용을 분석한다.

⑤ 무신 집권기 하층민의 반란이 발생한 배경을 파악한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고려 무신 집권기에 각 지역에서 농민과 천민에 의한 봉기가 발생했다.

1193년, 고려 명종 때 경상도의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는 김사미와 효심이 저항 운동을 일으켰다.

1237년, 고려 고종 때 원율과 담양 지역에서 이연년 형제가 봉기를 일으켰다. 김경손이 이를 진압했다.

 

① 노비안검법이 실시된 목적을 알아본다.

무신 정권기 이전, 고려 광종 때 노비안검법이 실시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삼정이정청이 설치된 과정을 살펴본다.

조선 후기 철종 때 임술 농민 봉기가 발생했다.

이후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해 삼정이정청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사심관 제도가 시행된 사례를 조사한다.

사심관 제도는 고려를 건국한 태조 때 시행된 제도로, 건국 공신들을 사심에 임명하여 각 자기 출신 지역의 부호장 이하의 임명을 맡게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집강소에서 추진한 개혁의 내용을 분석한다.

1894년 동학 농민 운동 당시 1차 농민 봉기가 발생했을 때, 동학 농민군은 정부와 화약을 맺고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무신 집권기 하층민의 반란이 발생한 배경을 파악한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고려
무신정권기
  • 무신정변

1170년, 의종이 개경 부근의 보현원에서 놀이를 즐길 때를 이용하여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

문신들을 제거하고 의종을 귀양 보낸 다음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

무신 간 내분으로 정중부가 피살되고, 경대승, 이의민이 차례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됨.

중방 – 최고위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최고 권력 기구

무신 집권자의 변화: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충헌

 

  • 최충헌

최씨 정권의 성립 – 1196년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후 4대 60여년간 최씨 정권이 지속됨

명종 때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

교정도감 – 희종 때 설치된 최씨 정권 최고 권력 기구. 최고 집권자는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

 

  • 최우

아버지인 최충헌의 뒤를 이어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1225년)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

서방을 설치하여 유명 문신을 머무르게 하며 정권 운영의 고문을 담당

고려 고종은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몽 항쟁을 위해 강화 천도

삼별초 설치. 삼별초는 도방과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

 

  • 무신 정권 시기 봉기
    • 김보당의 난

1173년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에서 무신 정권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의종의 복위를 추진했지만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 조위총의 난

1174년,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일으킴. 이의민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여 상장군이 됨

    • 망이·망소이의 난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

    • 김사미·효심의 난

1193년, 경상도의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는 김사미와 효심이 저항 운동을 일으킴

    • 만적의 난

1198년, 고려 신종 때 개경에서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 해방 운동을 시도, 사전 발각 후 실패

    • 이연년 형제의 난

1237년, 고려 고종 때 원율과 담양 지역에서 이연년 형제가 봉기를 일으켰다. 김경손이 이를 진압했다.

고려 광종
  • 노비안검법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의 수입 기반을 확대

  • 과거 제도

쌍기의 건의로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 유학을 익힌 신진 인사를 등용하고 신구 세력의 교체

  • 공복 제정

지배층의 위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하여 백관의 공복 제정

  • 칭제 건원

국왕의 권위를 높이기 위하여 황제를 칭하고(외왕내제), 광덕, 준풍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

  • 제위보

기금을 마련한 뒤 이자로 빈민을 구제하는 제위보를 설치

고려 태조
  • 흑창

빈민을 구제하고 위한 기구로 흑창 설치(춘궁기에 곡식을 나눠 주고 추수 후에 갚게 했던 빈민 구제 기구)

  • 사성 정책

태조는 지방 호족을 회유하기 위해 호족의 딸과 혼인하고, 왕씨 성을 하사하는 사성 정책 실시

  • 사심관 제도

건국 공신들을 사심에 임명하여, 각 자기 출신 지역의 부호장 이하의 임명을 맡게 하는 제도

  • 기인 제도

향리의 자제를 뽑아 서울에 인질로 삼고, 출신지의 일에 대하여 자문을 맡게 하는 제도

  • <정계>와 <계백료서>

<정계>와 <계백료서>를 지어 관리가 지켜야 할 규범을 제시

  • 훈요 10조

후대 왕들이 지켜야 할 정책 방향을 제시

  • 북진 정책

북진 정책을 추진하여 평양을 서경으로 삼고,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로 적극 개발

  • 역분전 지급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로를 세운 사람들에게 공훈에 대한 대가로 준 논공행상적 성격의 토지

  • 천수라는 연호 사용

 

  • 만부교 사건

고려 태조는 거란이 발해를 멸망시킨 무도한 나라라고 하여 그 사신들을 섬으로 유배하고 낙타는 모두 만부교 아래에서 굶겨 죽였다.

임술 농민 봉기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영향은 의외로 커서,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1862년 철종 때 진주에서 삼정의 문란과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봉기를 일으켰다. 이를 임술 농민 봉기라고 한다.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대규모의 농민 봉기에 당황한 세도 정권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였으며,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하여 주동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 삼정이정청 설치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삼정 문란의 원인을 운영상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농민 봉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
  • 배경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당시 농촌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외세의 침투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하여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청일 상인에 의해 영국산 면직물이 싼값에 들어오면서 면포를 짜서 팔던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이 늘어 곡물 가격이 오르자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커졌다.

개화 정책으로 늘어난 정부의 재정 지출은 농민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졌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혁 욕구도 높아졌다.

 

  • 동학의 교세 확장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동학의 인간 평등 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동학의 포접제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포접제

동학은 마을이나 군 단위로 접을 조직하고 수십 개의 접을 포로 묶어 포교의 기초 조직으로 삼았다. 접의 책임자는 접주, 포의 책임자는 대접주라고 불렀다

 

  • 동학의 교조 신원 운동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자 지방관들은 동학을 탄압하였고 농민들에게 동학 교도의 누명을 씌워 탄압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동학교도들은 1892년부터 충청도 공주, 전라도 삼례, 한성 등에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 삼례 집회(1892년)

동학교도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동학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 서울 집회

동학의 지도급 인사 40여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하였다.

 

  • 보은 집회

충청도 보은에서는 동학 교도와 농민 2만여 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보은 집회에서 탐관 오리의 숙청, 일본과 서양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다가, 마침내 동학 중심의 종교 운동을 농민 중심의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켜 갔다.

 

  • 고부 농민 봉기(1894년 1월)

농촌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횡포와 착취를 저지르며 농민들을 수탈했다.

농민들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봉기하였다.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려 세력을 모았다.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풀어 주고, 창고의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었다.

이에 정부가 새로운 군수를 임명하자 농민들은 군수의 다짐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다.

 

  • 제1차 농민 봉기(1894년 3월)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라는 죄목으로 잡아들이고 탄압하자 농민들의 분노가 다시 거세졌다.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전라도 각지에서 농민군을 모아 무장에서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 백산 봉기

이들은 고부를 점령하고 나서 백산에서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라는 뜻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라는 뜻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구호를 담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백성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4대 강령을 발표했다.

 

    • 황토현 전투
    • 황룡촌(전남 장성) 전투: 농민군이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을 격파했다.
    • 전주성 점령(1894년 4월)

 

  • 전주 화약(1894년 6월)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은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주 화약이라고 한다.

 

  • 집강소 설치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집강소

전라도 지역 53개 고을의 치안 유지와 행정 사무를 담당하게 한 자치 기구이다.

폐정 개혁 12개조

1. 도인(道人)과 정부와의 사이에는 숙혐(宿嫌)을 탕척(蕩滌)하고 서정(庶政)을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사득(査得)해 일일이 엄징할 것.

3. 횡포한 부호배(富豪輩)를 엄징할 것.

4.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배(兩班輩)는 못된 버릇을 징계할 것.

5. 노비 문서는 불태워버릴 것.

6. 칠반천인(七班賤人)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白丁) 머리에 쓰는 평양립(平壤笠)은 벗어 버릴 것.

7. 청춘과부(靑春寡婦)의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잡세(無名雜稅)는 일체 거두어들이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倭)와 간통(奸通)하는 자는 엄징할 것.

11. 공사채(公私債)를 막론하고 기왕의 것은 모두 무효로 할 것.

12. 토지는 평균으로 분작(分作)하게 할 것.

 

  • 교정청 설치(1894년 6월)

농민의 불만과 개혁 요구로 조선 정부는 이를 반영한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교정청을 설치하고 자주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려 하였다.

 

  • 경복궁 점령(1894년 7월 23일)

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간섭을 하였다(군국기무처 설치).

 

  • 청⋅일 전쟁(1894년 7월 25일)

경복궁 점령 이틀 뒤, 마침내 풍도 해전을 시작으로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 제2차 농민 봉기(1894년 9월)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 우금치 전투(1894년 11월)

남접 농민군과 북접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

결국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 시모노세키 조약

전쟁에서 패한 청은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1895년).

청은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 삼국 간섭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다고 일본을 압박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청에게 할양 받은 랴오둥 반도를 청에 돌려주는 대신 보상금을 받았다.

 

  • 동학 농민 운동의 의의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봉건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여 노비 문서의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 등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69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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