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회 한능검 심화 25번 해설 – 충주 지역의 역사

25번 문제

25. (가) 지역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② 명 신종을 기리는 만동묘가 건립되었다.

③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서 고공 농성을 벌였다.

④ 고구려비가 남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발견되었다.

⑤ 박재혁이 경찰서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의거를 일으켰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위 자료의 (가)에 해당하는 지역은 충주이다.

1253년 고려 시대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후가 충주성에서 관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했다.

1592년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가 있었다.

 

①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개최되었다.

1946년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명 신종을 기리는 만동묘가 건립되었다.

충북 괴산에 임진왜란 때 조선에 지원을 해준 명 신종을 기리는 만동묘가 건립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에서 고공 농성을 벌였다.

1931년 평양 평원고무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을 때 강주룡은 을밀대에 올라 고공농성을 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고구려비가 남한 지역에서 유일하게 발견되었다.

충주에서 고구려의 한강 유역 진출에 대한 내용이 담긴 고구려비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박재혁이 경찰서에서 폭탄을 터뜨리는 의거를 일으켰다.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충주 신석기 시대 – 조동리 유적에서 빗살무늬 토기 출토

충주 중원 고구려비

고려 시대 – 김윤후의 대몽 항쟁, 세곡 운송을 담당한 덕흥창 설치

조선 시대 –  임진왜란 당시 신립 장군의 탄금대 전투

조선 후기 – 을미의병 당시 유인석 의병장

삼국의
불상과 비석
  • 삼국의 불상

금동 미륵보살 반가 사유상

    • 고구려

금동 연가 7년명 여래 입상

 

    • 백제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 신라

경주 배동 석조 여래 삼존 입상

 

  • 삼국의 비석
    • 고구려

광개토 대왕릉비(414년)

충주 중원 고구려비

광개토 대왕릉비

충주 중원 고구려비

 

    • 신라

단양 신라 적성비(551년)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창녕 진흥왕 순수비(또는 척경비)

울진 봉평비(524년)

신라 진흥왕 북한산 순수비

창녕 진흥왕 순수비(또는 척경비)

진흥왕 순수비 마운령비

단양 적성비

울진 봉평비

    • 백제

부여 사택지적비(7세기)

부여 사택지적비

고려
몽골의 침입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을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저고여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는 단절하였다.

 

  • 몽골의 1차 침입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은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강화 천도),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킴

 

  • 몽골의 2차 침입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

 

  • 몽골의 5차 침입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후가 충주성에서 관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

 

  • 피해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

 

  • 개경 환도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 종결. 1270년, 고려 원종 때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

 

  • 삼별초의 항쟁

1270년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몽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삼별초

최우가 야간 경비를 위해 설치한 야별초가 확대된 것으로 좌별초, 우별초, 그리고 몽골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한 군사들로 조직된 신의군으로 구성

임진왜란
  • 배경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 임진왜란 발발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항전하였지만 패배

신립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지만 패배

 

  • 이순신과 수군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둠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 사용

 

  • 의병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점령된 지역을 수복. 이를 북관대첩이라고 함.

 

  • 육군

이덕형이 구원병 요청을 위해 명에 청원사로 파견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 방어(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패배시킴(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 훈련도감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 정유재란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 임진왜란의 영향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미⋅소 공동 위원회
  •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6년)

신탁 통치안에 대한 격렬한 반대 운동에도 불구하고, 신탁 통치 문제와 한국의 임시 정부 수립 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이 때, 소련측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지지하는 단체들로만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고, 미국측은 모든 정치 단체를 참여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미국과 소련의 의견 대립으로 결론에 이르지 못하였고, 제1차 미소 공동 위원회는 결렬되어 무기한 휴회에 들어갔다.

 

  •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1947년)

1947년 열린 제2차 미⋅소 공동 위원회에서도 미국과 소련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여기에서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 연합에 넘겨 국제 사회의 결의에 따라 해결하자고 제안하였다.

반면 소련은 두 나라 군대가 동시 철수한 다음 한국이 스스로 정부를 수립하도록 맡기자고 맞섰다.

평양 고구려 장수왕의 평양 천도

고구려 궁궐 ‘안학궁’

고구려 멸망 후 안동도호부 설치

고려 태조, 북진 정책의 전진 기지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묘청의 난

무신 정권 당시 ‘조위총의 반란’

임진왜란 때 조∙명 연합군이 왜군과의 격전

제너럴 셔먼호 사건

물산 장려 운동 시작 지역 – 조만식, 조선 물산 장려회 조직

안창호가 대성 학교를 설립

김구, 김규식이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

6·15 남북 정상 회담이 개최된 장소

1931년 평원고무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을 때 강주룡이 을밀대에 올라 고공농성을 했다.

주요 유적지: 대성산성, 안학궁지, 을밀대, 만수대

물산 장려 운동 포스터

의열 투쟁

  • 의열단

1919년 11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은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 (1923년)

의열단원들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 목표

의열단은 일제의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5파괴, 7가살)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5파괴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매일신보사(조선 총독부 기관지),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7가살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지주와 자본가

 

    • 활동

박재혁 – 1920년 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익상 –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 –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지섭 – 1924년 일본 도쿄 궁성 폭탄 투척

나석주 –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 투척

 

    • 활동 변화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의열단원들은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관내 대부분의 민족 운동 단체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 결성(1935년)을 주도하였다.

 

  • 한인 애국단
    • 배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 대표 회의 이후 침체를 겪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졌다.

김구는 1931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만보산 사건

1931년 중국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사건이다.

 

    • 이봉창의 의거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중국 상하이를 침략하였다(상하이 사변).

 

    • 윤봉길의 의거

1932년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일제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이때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요 장성과 고관들을 처단하였다.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 의의

한국 애국단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크게 호전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광복군이 조직되는 토대가 되었다.

부산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다.

1609년 일본과의 기유약조 체결 이후 초량에 왜관이 지어졌다.

범어사가 있다.

독립 협회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시켰다.

부산항은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이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69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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