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회 한능검 심화 36번 해설 – 신민회

36번 문제

36. (가)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① 복벽주의를 표방하였다.

②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였다.

③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하였다.

④ 근대 교육을 위해 배재 학당을 설립하였다.

⑤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신민회는 1907년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안창호, 양기탁 등을 지도부로 하였다.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표면적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적 실력 양성을 기도하였다.

 

① 복벽주의를 표방하였다.

1912년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13도 창의군을 결성하였다.

1907년 정미의병 이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1908년).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일제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저지하였다.

1904년 보안회는 토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근대 교육을 위해 배재 학당을 설립하였다.

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은 정부의 협조를 얻어 배재 학당, 이화 학당 등을 세워 신학문과 서양 문화 및 영어 등을 가르쳤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일제가 조작한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애국 계몽 운동
  • 보안회(1904년)

보안회는 토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 헌정 연구회(1905년)

독립 협회에 영향을 받은 헌정 연구회는 국민의 정치 의식 고취와 입헌 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 대한 자강회(1906년)

대한 자강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15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나,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자, 격렬한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강제로 해체되었다.

대한 자강회 취지문

국민의 지혜를 열고 국가의 힘을 기르는 길은 교육과 산업의 발달에 달려 있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 곧 자강의 방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이 자강의 목적을 관철하기를 바랄진대 부득불 먼저 그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여 단군과 기자 이래 4천 년 한국의 정신으로 2천만 모든 사람의 정신 속에 흐르도록 하여, 한 번 숨을들이고 내쉬는 시간에도 자기 나라 정신을 잊지 않게 만든 연후에야 바야흐로 자강의 마음을 단련하고 국권 회복의활기를 만들게 될 것이다.

 

  • 대한 협회(1907년)

대한 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민권의 신장, 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지배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대한 협회의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 신민회

신민회는 1907년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안창호, 양기탁 등을 지도부로 하였다.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표면적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적 실력 양성을 기도하였다.

 

    •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 태극 서관과 자기 회사

신민회는 평양과 서울에 설립된 태극 서관에서 계몽 서적을 출판하였다. 또한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워 민족 산업의 육성에도 힘썼다.

 

    •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만주에 독립군 기지(삼원보)를 건설하고,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기르는 데 힘을 기울였다.

 

    • 해산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 독립 의군부(1912년)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 대한 광복회(1915년)

박상진, 김좌진 등은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대한 광복회는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덕태상회를 통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 송죽회(1913년)

평양 숭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송죽회를 결성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항일 의병 운동
  • 을미의병(1895년)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다.

이소응 부대는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유인석 부대는 제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자, 의병들은 대부분 활동을 중단하였다.

 

  • 활빈당

을미의병의 활동 후, 1900년을 즈음하여 해산된 농민들의 일부가 활빈당을 조직하여 반봉건⋅반침략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활빈당은 양반·부호, 관청, 장시 등을 습격하여 무기와 재물을 약탈하고, 그 중에서 일부를 빈민에게 분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과 행상, 유민, 노동자, 걸인 등으로 조직되었다.

활빈당 요구 사항

  • 시급히 방곡령을 실시할 것.
  • 시장에 외국 상인의 출입을 엄금할 것.
  • 행상인에게 징세하는 폐단을 금할 것.
  • 금광의 채굴을 엄금할 것.
  • 사전을 혁파하고 균전(均田)을 실시할 것.
  • 다른 나라에 철도 부설권을 허용하지 말 것.

 

  • 을사의병(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대규모의 의병 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익현은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 을사늑약에 대한 항거
    • 안중근 의사

의병장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표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도착했을 때, 그를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1909년).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또한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다.

 

    • 이재명

이재명은 명동 성당 앞에서 을사 5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칼로 찔러 부상을 입혔다.

 

    • 민영환 순국

고종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민영환은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 5적 암살단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을사 5적

박제순, 이지용, 이완용, 이근택, 권중현

    • 시티븐스 저격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8년 전명운, 장인환이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미국인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 정미의병(1907년)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 때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결정되자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였고, 해산된 군인들이 일본군과 서울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 항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각 지방의 해산 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무기를 갖추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 13도 창의군(1908년)

정미의병 이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이 때, 의병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하여, 스스로 독립군임을 내세웠다.

그 중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 남한 대토벌 작전(1909년)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던 의병 투쟁은 그 후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일부 의병 부대는 국권을 빼앗긴 후에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근대 교육의
발달

  • 원산학사

1883년에 원산(덕원부)에 관민이 합심하여 기금을 모아 원산 학사을 설립하고 최초로 근대 교육을 했다.

 

  • 동문학

1883년에 정부는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을 설립하였다.

 

  • 육영 공원

1886년 정부는 육영 공원을 세워 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 세 사람을 초빙하여 주로 현직 관료와 상류층의 자제들에게 신지식과 외국어를 가르쳤다.

좌원과 우원을 구분하여 학생을 선발하였다.

 

  • 배재 학당와 이화 학당

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도 정부의 협조를 얻어 배재 학당, 이화 학당 등을 세워 신학문과 서양 문화 및 영어 등을 가르쳤다.

이화 학당은 최초의 여성 교육 기관으로 건립되었다.

 

  • 한성 사범 학교

갑오개혁 이후 정부에서는 교육 입국 조서를 발표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후에, 한성 사범 학교(1895년), 외국어 학교, 소학교 등을 차례로 세워 인재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웠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8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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