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번 문제
39. 밑줄 그은 ‘이 계획’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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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독립 협회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② 국채 보상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③ 재정 고문 메가타의 주도로 시행되었다.
④ 토지 조사 사업이 시행되는 배경이 되었다.
⑤ 일본의 쌀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공업이 더욱 발달하고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식량 문제에 부딪혔다.
이에 일제는 192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여 그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쌀이 목표대로 증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증산량보다 훨씬 많은 양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에 따라 우리 농민은 식량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기아 선상에 허덕이게 되었다.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생산되는 값싼 잡곡으로 충당하려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당시 우리 농민은 수리 조합비, 증산에 투입된 운반비 등도 부담함으로써 이중의 고통을 받았고, 생계는 더욱 어려워져 갔다.
① 독립 협회 결성의 계기가 되었다.
1895년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
외세의 침투가 계속되어 나라의 자주권이 크게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년).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국채 보상 운동의 배경이 되었다.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시설 개선 등의 명목을 내세워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는데, 1907년까지 들여 온 차관 총액은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경제적 예속화 정책에 저항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재정 고문 메가타의 주도로 시행되었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전세가 유리해지자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 방안을 확정하고, 이어서 제1차 한⋅일 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외교와 재정 분야에 그들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도록 하였다.
일본은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를, 외교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재정과 외교에 본격적으로 간섭하였다.
이후 메가타의 주도 하에 화폐 정리 사업이 실시되었다.
조선의 화폐였던 백동화와 엽전을 일본 제일은행에서 발행하는 일본 화폐인 일본 제일은행권으로 교환하게 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토지 조사 사업이 시행되는 배경이 되었다.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제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은 직후부터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 농민들의 토지를 신고하게 하였다.
하지만 토지 조사 사업의 실제 목적은 일제가 지세 수입을 늘려 식민지 지배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나아가 일본인이 쉽게 토지에 투자할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일제는 1910년 임시 토지 조사국을 설치하고 1912년에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여 본격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일본의 쌀 부족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 일제의 산미 증식 계획 |
일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계기로 공업이 더욱 발달하고 도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심각한 식량 문제에 부딪혔다. 이에 일제는 1920년대 이후 한반도에서 산미 증식 계획을 실시하여 그들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일제는 다수확 품종으로 벼 종자를 개량하고 비료 사용을 확대하였으며, 농토를 개간하고 밭을 논으로 바꾸었다. 또한 저수지나 제방을 만들기 위해 전국 각지에 수리 조합을 조직하였다.
일제는 쌀이 목표대로 증산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증산량보다 훨씬 많은 양을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에 따라 우리 농민은 식량 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어 기아 선상에 허덕이게 되었다. 부족한 식량을 만주에서 생산되는 값싼 잡곡으로 충당하려 하였으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들은 토지를 집적함으로써 식민지 지주제가 강화했다.
당시 우리 농민은 수리 조합비, 증산에 투입된 운반비 등도 부담함으로써 이중의 고통을 받았고, 생계는 더욱 어려워져 갔다. 더욱 가난해진 많은 농민들이 산 속으로 들어가 화전민이 되거나, 정든 고향을 등지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서 만주 지역 등 해외로 떠나게 되었다.
산미 증식 계획으로 인해 쌀 가격 변동에 취약한 쌀농사 위주의 단작 농업이 정착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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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 협회 |
명성 황후 시해사건으로 일본에 대해 강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고종은 러시아의 도움으로 일본의 위협을 피할 수 있다고 믿고, 처소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겼다. 이를 아관 파천이라고 한다.
국왕이 러시아 공사관에 머무르고 있는 동안,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고,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졌으며, 집권층은 친러적인 성향을 드러내었다. 외세의 침투가 계속되어 나라의 자주권이 크게 위협을 당하면서 국민들 사이에 나라의 자주 독립을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갑신정변의 주동자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서재필이 귀국하였다. 그는 자유 민주주의적 개혁 사상을 민중에 보급하고, 국민의 힘으로 완전한 자주 독립 국가를 수립하고자 독립신문을 창간하고, 독립 협회를 창립하였다(1896년).
독립 협회는 첫 사업으로서 국민의 성금을 모아 영은문 자리에 자주 독립의 상징인 독립문을 세우고,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수하는 등 국민의 자주 독립 의식을 고취시켰다. 또한 독립 협회는 독립관에서 교육과 산업 진흥, 자주독립 등의 주제로 토론회를 열어 민중을 계몽하였다.
이 무렵, 러시아의 침략적 간섭은 여전하였다.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파견하고, 한러 은행 설립, 절영도 조차 등 이권 침탈을 시도하였다. 또한 열강의 이권 침탈은 더욱 심해져 갔다. 이에 독립 협회 회원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중 대회인 만민 공동회를 열었다(1898년). 만여 명의 시민, 학생들이 모인 가운데 종로 광장에서 열린 만민 공동회에서는 러시아의 침략 정책을 규탄하고, 대한의 자주 독립권을 지키자는 내용의 결의안을 채택하여 이를 정부에 건의하였다. 이후, 독립 협회는 수시로 만민 공동회를 열고, 외국의 내정 간섭과 이권 요구 및 토지 조차 요구 등에 대항하여 국권과 국익을 수호하려는 자주 국권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결국 러시아는 재정 고문을 철수시키고, 절영도 조차 요구를 철회하였다.
자주 국권 운동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민중의 힘이 증대되고 민권 의식이 고양되어 자유 민권 운동도 전개되었다. 나아가, 민의를 국정에 반영하여 근대 개혁을 추진하려는 국민 참정권 운동도 전개하였다. 그 후, 독립 협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4천여 명의 회원을 가진 민중의 대표 기관으로 성장하여, 의회 설립에 의한 국민 참정 운동과 국정 개혁 운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독립 협회는 이 같은 활동을 통하여 보수적 내각을 퇴진시키고, 박정양의 진보적 내각을 수립하게 하는 데 성공하였다.
1898년 독립 협회는 만민 공동회에 정부 대신들을 합석시켜 관민 공동회를 열었다. 여기에서 백정 출신인 박성춘이 연사로 나서기도 했다.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열강의 이권침탈 방지를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였다.
독립 협회는 국권 수호와 민권 보장 및 정치 개혁을 내용으로 하는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았다.
독립 협회는 정부와 협상을 벌여 관선 의원과 민선 의원을 같은 수로 하는 의회식 중추원 관제를 반포하게 하여,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국회가 설립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위기를 느낀 보수 세력은 고종에게 독립 협회가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을 실시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박정양 내각을 무너뜨리고 독립 협회도 해산시키고 말았다. 그리고 정부는 황국 협회를 이용하여 만민 공동회를 탄압하였고, 결국은 병력을 동원하여 민중들의 정치 활동을 봉쇄하였다.
독립 협회의 활동은 민중을 개화 운동과 결합시켜 근대적 민중 운동을 일으켰고, 민중에 의한 자주적인 근대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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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시설 개선 등의 명목을 내세워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는데, 1907년까지 들여 온 차관 총액은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경제적 예속화 정책에 저항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1907년 서상돈, 김광제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금연과 금주로 모은 돈과 반지, 비녀 등을 성금으로 냈으며, 여러 단체와 대한 매일 신보 등의 언론 기관도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일제 통감부의 방해와 탄압으로 인해 국채 보상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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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 중 일제는 제1차 한일 협약을 체결하고 대한 제국에 메가타를 재정 고문으로 파견하였다.
메가타의 주도 하에 화폐 정리 사업이 실시되었다. 조선의 화폐였던 백동화와 엽전을 일본 제일은행에서 발행하는 일본 화폐인 일본 제일은행권으로 교환하게 했다. 백동화의 품질에 따라 갑, 을, 병 3등급으로 구분하여 교환해 줬는데, ‘병’ 등급에 해당하는 백동화는 교환이 거부되어 조선 상인들이 타격을 입었다.
화폐 정리 사업 과정에서, 일본의 제일은행이 중앙 은행 기능을 맡도록 하여 대한제국의 금융 정책을 지배하게 되었다.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은 대한 제국의 화폐 정리와 시설 개선의 명목으로 차관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차관 제공 정책은 대한 제국을 재정적으로 일본에 완전히 예속시키려는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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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제로 빼앗은 일제는 자신들의 경제적 기반을 확립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일제는 국권을 빼앗은 직후부터 이른바 토지 조사 사업이라는 이름을 붙여 농민들의 토지를 신고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근대적 소유권이 인정되는 토지 제도를 확립한다고 선전하였다.
토지 조사 사업의 실제 목적은 일제가 지세 수입을 늘려 식민지 지배의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나아가 일본인이 쉽게 토지에 투자할 수 있게 하려는 데 있었다.
일제는 1910년 임시 토지 조사국을 설치하고 1912년에 토지 조사령을 공포하여 본격적으로 토지 조사 사업을 실시하였다.
우리 농민은 토지 소유에 필요한 서류를 구비하여 지정된 기간 안에 신고해야만 소유권을 인정받게 되었다. 그러나 당시 토지 신고제가 농민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고, 신고 기간이 짧은 데 비하여 절차가 복잡하여 신고의 기회를 놓친 사람이 많았다.
일제는 이와 같은 미신고 토지는 물론, 공공 기관에 속해 있던 토지, 마을이나 문중의 토지와 산림, 초원, 황무지 등도 모두 조선 총독부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하여 토지 조사 사업에 의해 불법적으로 탈취당한 토지는 전 국토의 약 40%나 되었다.
토지에 대한 지주의 소유권만 일방적으로 인정하고 농민이 오랫동안 누려 왔던 관습적인 경작권을 부정하였다. 그 결과, 수많은 농민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기한부 계약에 따라 지주의 토지를 빌려 경작하는 소작인이 늘어났다(입회권, 도지권 상실). 생활 기반을 상실한 농민은 일본인의 고리대에 시달리게 되었고, 생계 유지를 위해 화전민이 되거나 만주, 연해주, 일본 등지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일제는 토지 조사 사업을 통해 확보한 상당 부분의 국유지를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헐값에 넘겼다. 한국에 진출한 일본인 농업 이주민은 동양 척식 주식회사로부터 토지를 매입하거나 개간 등을 통해 대지주가 되었다.
총독부는 지세 부과 대상을 크게 늘리고 토지 가격을 높이 책정하여 토지세를 더 많이 거두어들였다. 이렇게 거둔 토지세의 대부분은 식민 통치를 위한 비용으로 지출되었다. |
기출 문제 키워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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