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회 한능검 심화 22번 해설 – 율곡 이이

22번 문제

22. 밑줄 그은 ‘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①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운 기축봉사를 올렸다.

② 청으로부터 시헌력을 도입하자고 건의하였다.

③ 양반의 허례와 무능을 풍자한 양반전을 저술하였다.

④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한 가례집람을 지었다.

⑤ 군주가 수양해야 할 덕목과 지식을 담은 성학집요를 집필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위 자료는 율곡 이이에 대한 내용이다.

이이는 격몽요결,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저술하여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해주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①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운 기축봉사를 올렸다.

송시열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청으로부터 시헌력을 도입하자고 건의하였다.

김육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양반의 허례와 무능을 풍자한 양반전을 저술하였다.

박지원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예학을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리한 가례집람을 지었다.

김장생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군주가 수양해야 할 덕목과 지식을 담은 성학집요를 집필하였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이다.

 

조선 전기
성리학의 발달
  • 성리학의 정착
    • 관학파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 사림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에서 비롯된 사학파의 학문적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 성리학의 융성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 서경덕과 이언적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리론은 도덕적 원리를 중시하는 학설로, 이언적에서 시작하여 이황이 대성하였다.

주기론은 경험적 세계를 중시하는 학설로, 서경덕이 처음 주장하고 이이가 이를 크게 발전시켰다.

 

      • 서경덕·조식(주기론)

서경덕은 이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 이언적(주리론)

이언적은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이황과 이이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 이황(주리론)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황은 기대승과 사단 칠정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 이이(주기론)

이이는 이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격몽요결,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저술하여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해주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공물을 쌀로 받는 방안을 제안하였다(대동법).

성학십도와 성학집요의 차이점

성학십도에서는 군주 스스로가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한 반면, 성학집요에서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학파의 형성과 대립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 동인과 서인

선조 때에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 동인의 분화

1589년 조선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이황 학파의 남인과, 서경덕 학파와 조식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남인 북인
이황, 이언적 서경덕, 조식

 

    • 서인과 남인

광해군 때, 북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남인 북인
이황, 이언적 서경덕, 조식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는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 예학의 발달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송시열
  • 조선 효종 시기 북벌 준비
  • 기축봉사를 올려 명에 대한 의리를 내세움
  • 기해 예송 당시 기년복 1년이라는 기년설을 주장
  • 숙종 시기 장희빈의 아들을 원자로 삼는데 반대하여 기사환국 발생. 제주도 유배 후 사망.
  • 서인 → 노론
조선 후기
천문학과 지도
  • 천문학

천문학은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 김석문

김석문은 지전설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장하여 우주관을 크게 전환시켰다.

 

    • 홍대용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으며, 김석문과 함께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지전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해 갔다.

<의산문답>을 저술하여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주해수용을 저술하여 조선ㆍ중국ㆍ서양 수학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였다.

지구가 9만 리를 한 바퀴 도는데 그 회전 속도가 매우 빠르다. 그런데 저 별들과 지구와의 거리가 겨우 절반이라도 몇 천만, 몇 억 리나 될지 알 수 없다. 하물며 별 밖에 또 별이 있음에랴. 우주 공간에 한계가 없다면, 별이 분포하는 영역에도 한계가 없다. 그 별들이 한 바퀴 돈다고 말한다 해도 그 궤도의 둘레가 얼마나 길지 헤아릴 수조차 없다. 하루에 얼마나 빨리 회전할지 상상해본다면, 천둥·번개와 포탄의 속도를 계산하더라도 이보다 빠르지는 못할 것이다.

≪담헌서≫ <의산문답>

 

    • 시헌력

역법은 김육 등의 노력으로 시헌력이 도입되었다. 이는 서양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청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종전의 역법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약 6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시헌력을 채용하였다.

시헌력(時憲曆)

태음력에 태양력의 원리를 부합시켜 24절기의 시각과 하루의 시각을 정밀히 계산하여 만든 역법

 

    • 곤여만국전도

조선 후기에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를 통하여 당시 조선인의 세계관이 확대될 수 있었다.

 

    • 지구전요

최한기가 저술한 지구전요는 국외의 각종 지리서를 참조하여 편찬한  세계지리서이다.

조선 후기
서민 문화의 발달
  • 한글 소설의 보급

허균의 홍길동전, 춘향전 등. 한글 소설을 읽어주는 전기수가 등장했다.

세책가에서 도서를 대여했다.

  • 판소리

판소리 작품으로는 열두 마당이 있었으나, 지금은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적벽가, 수궁가 등 다섯 마당만 전하고 있다. 신재효는 19세기 후반에 이런 판소리 사설을 창작하고 정리하였다.

장시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는 판소리와 탈춤 공연이 인기를 얻었다.

  • 탈놀이

탈놀이와 산대놀이는 조선 후기의 사회 변화와 함께 성행하였다. 이런 가면극에서는 지배층과 그들에게 의지하여 살아가는 승려의 부패와 위선을 풍자하기도 하였다.

  • 사설 시조

이 시기의 시조에는 서민의 감정을 솔직하게 나타내는 경향이 나타났다.

  • 시사(詩社) 조직

역관 등 중인층과 서민층의 문학 창작 활동이 활발해지면서 동호인들이 모여 시사를 조직하였다.

  • 정약용

정약용은 삼정의 문란을 폭로하는 한시를 남겼다.

  • 박지원

양반전, 허생전, 호질, 민옹전 등의 한문 소설을 써서 양반 사회의 허구성을 지적하며 실용적 태도를 강조하였다.

  • 회화

회화에서는 그 저변이 확대되어 풍속화와 민화가 유행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