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회 한능검 심화 44번 해설 – 3선 개헌, 유신 헌법

44번 문제

44. (가), (나) 헌법이 제정된 시기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가) (나)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제64조 ① 대통령은 국민의 보통·평등·직접·비밀 선거에 의하여 선출한다.제69조 ① 대통령의 임기는 4년으로 한다.
③ 대통령의 계속 재임은 3기에 한한다.
제1조 ①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다.
②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국민은 그 대표자나 국민 투표에 의하여 주권을 행사한다.제39조 ① 대통령은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토론 없이 무기명 투표로 선거한다.제47조 대통령의 임기는 6년으로 한다.

제59조 ①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있다.

① 지방 자치제가 전면 시행되었다.

②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났다.

③ 일부 군인들이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④ 서울과 평양에서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6·3 시위가 전개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가)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구실로 대통령 3회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을 추진하였다.

1969년,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지만, 결국 여당 의원들만 따로 모여 편법적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71년 박정희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나) 1972년 10월 박정희 정부는 남북 통일을 위한 사회 질서 안정을 명분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비상 국무 회의에서 만들어진 유신 헌법은 국민 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서 9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로 확정되었다.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① 지방 자치제가 전면 시행되었다.

김영삼 정부에서는 지역 주민이 자치 단체장까지 직접 선출하는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시행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일어났다.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파견하려 핬다.

하지만 군대 내 좌익 세력이 출동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을 일시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여수·순천 10·19 사건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일부 군인들이 5·16 군사 정변을 일으켰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일부 군인들이 군사 정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서울과 평양에서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에는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 제시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한일 국교 정상화에 반대하는 6·3 시위가 전개되었다.

1964년 한·일 국교 회담에서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 정당한 배상 등에 대한 요구보다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였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대일 굴욕 외교로 평가하고 범국민적인 정권 퇴진 운동을 전개하였다(6·3 시위).

정부는 휴교령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3선 개헌
  • 배경

1967년 박정희는 제6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68년 북한 특수 부대가 청와대를 습격하고, 미해군의 푸에블로호가 북한에 나포되는 등 한반도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었다.

 

  • 3선 개헌(제6차 개헌)

박정희 정부는 국가 안보와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구실로 대통령 3회 연임을 허용하는 개헌을 추진하였다.

1969년, 3선 개헌을 반대하는 시위가 이어졌지만, 결국 여당 의원들만 따로 모여 편법적으로 개헌안을 통과시켰다.

1971년 박정희는 제7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유신 체제의
성립

  • 배경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냉전 체제가 완화되면서 국제적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또한 미국은 주한 미군 병력의 감축을 결정하였다.

이에 반공을 강조하던 박정희 정부에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박정희 정부의 대북 정책이 수정되었고, 1972년에는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 남북 공동 성명이 발표되었다.

 

  • 10월 유신 선포

1972년 10월 박정희 정부는 남북 통일을 위한 사회 질서 안정을 명분으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하였다.

그리고 비상 국무 회의에서 만들어진 유신 헌법은 국민 투표를 통해 확정되었다. 유신헌법은 국민투표에서 90%가 넘는 압도적인 지지로 확정되었다.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제8대 대통령에 박정희가 당선되었다.

 

  • 유신 헌법(제7차 개헌) 내용
    • 임기

<유신 헌법>에서 대통령 임기는 6년으로 늘어났고, 연임 제한도 없었다.

 

    • 통일 주체 국민 회의

대통령은 통일 주체 국민 회의에서 간선 선거로 선출하도록 하였다.

 

    • 긴급 조치권 등

대통령에게 긴급 조치권을 부여하여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법률의 효력을 중지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대통령에게 국회의원 1/3 추천권, 국회 해산권, 법관 인사권을 주어 삼권 분립이 무력화되었다.

 

    • 기출 자료

 

  • 유신 체제의 성격

유신 체제는 의회주의와 삼권 분립의 헌정 체제와는 달리 강력한 통치권을 대통령에 부여하는 권위주의 통치 체제였다.

 

  • 유신 체제에 대한 저항

재야 인사, 학생 종교인 등을 중심으로 한 민주 세력은 권력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치열하게 민주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개헌 청원 100만 명 서명 운동(1973년), 3·1 민주 구국 선언(1976년) 등을 통해 <유신 헌법> 폐지와 정권 퇴진을 요구하였다.

 

  • 유신 체제의 붕괴
    • 제2차 석유 파동

1979년 제2차 석유 파동으로 경제적 어려움은 박정희 정부에 대한 불만으로 이어졌다.

 

    • YH 무역 사건

박정희 정부는 노동자의 노동 3권을 크게 제한하여 노동 운동을 탄압하였다.

1979년 YH 무역 노동자들이 부당한 공장 폐쇄에 맞서 야당인 신민당 당사에서 시위를 벌였다. 박정희 정부는 이를 강제로 진압하였고, 이에 항의하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의원에서 제명하였다.

YH 무역 여성 노동자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가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 부마 민주 항쟁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에서는 유신 철폐와 독재 반대를 외치는 시위가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 10·26 사태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게 피살되면서 유신 체제는 사실상 무너졌다.

통일을 위한 노력

  • 이승만 정부

6·25 전쟁 발발 이후 남북 간의 적대 관계는 더욱 심해졌다. 이승만 정부는 무력에 의한 북진 통일을 내세웠다.

 

  • 장면 정부

4⋅19 혁명 직후 중립화 통일론이나 남북 협상론, 남북 교류론 등이 제기되었다.

장면 내각은 국회 시정연설을 통해 UN 감시 하의 남북한을 통한 총선거를 실시하는 방안을 추진할 것을 내세웠다.

대학생들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등을 외치며 남북 학생 회담을 열 것을 주장하였다.

 

  • 박정희 정부

초기 박정희 정부는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며 ‘선 건설, 후 통일론’을 주장하였다.

 

    • 닉슨 독트린

1969년 닉슨 독트린 발표 이후 냉전이 완화되고 국제적으로도 평화와 공존의 분위기가 고조되자 남과 북의 관계도 개선되었다.

 

    • 8⋅15 선언

1970년에 박정희 대통령은 8⋅15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북한에 대해서 평화적으로 선의의 체제 경쟁을 제의함으로써, 한반도에서 평화 정착을 이룩하기 위한 것이었다.

 

    • 남북 적십자 회담

1971년 남북 정부는 이산가족 상봉을 위한 남북 적십자 회담을 추진하였다.

 

    • 7·4 남북 공동 성명

1972년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였다.

7·4 남북 공동 성명에는 통일의 3대 원칙으로 자주, 평화, 민족 대단결이 제시되었다.

또한 남북 조절 위원회를 설치하여 통일 방안을 논의하였다.

서울·평양간 상설 전화가 개설되었다.

이후 남한은 유신 헌법, 북한은 사회주의 헌법을 공포하며 7·4 남북 공동 성명을 독재 체제 강화에 이용하기도 하였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 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 6⋅23 평화 통일 선언

1973년 남북 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남북한의 유엔 동시 가입과 호혜 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 대한 문호 개방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3 평화 통일 선언이 발표되었다.

 

  • 전두환 정부

1980년대에 이르러 남한의 민족 화합 민주 통일 방안과 북한의 고려 민주주의 연방 공화국 방안이 제시되었다.

1984년에는 서울에 수해가 발생하자 북한이 원조 물자를 보내왔으며, 이후 남북 경제 회담, 적십자 회담 등이 성사되었다. 이어 1985년에는 이산가족 상봉이 이루어져 남북한의 이산 가족이 각각 서울과 평양을 처음으로 방문하였다.

 

  • 노태우 정부
    • 7·7 선언

1988년 노태우 정부는 자주·평화·민주·복지의 원칙에 입각하여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의 새 시대를 열어나갈 것을 천명하는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약칭 7·7 선언)을 발표했다.

 

    •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

1989년 노태우 정부는 자주, 평화, 민주의 원칙 아래 ‘한민족 공동체 통일 방안’을 제안했다.

 

    • 남북 기본 합의서
      • 남북 유엔 동시 가입

1991년 남북한은 유엔에 동시 가입하였다.

 

      • 남북 기본 합의서 채택

1991년 남북한은 정부 당국 사이의 공식적인 합의를 통해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남북 기본 합의서)’를 채택하고,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을 발표하였다.

남북 기본 합의서는 남북한 정부 간에 최초의 공식 합의서로,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상호 불가침에 합의하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적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협력을 실천하여 민족 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 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한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제1조 남과 북은 서로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

제7조 남과 북은 서로의 긴밀한 연락과 협의를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판문점에 남북연락사무소를 설치·운영한다.

제9조 남과 북은 상대방에 대하여 무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상대방을 무력으로 침략하지 아니한다.

제12조 남과 북은 불가침의 이행과 보장을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구성 운영한다.

제15조 남과 북은 민족경제의 통일적이며 균형적인 발전과 민족전체의 복리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자원의 공동개발, 민족 내부 교류로서의 물자교류, 합작투자 등 경제교류와 협력을 실시한다.

제22조 남과 북은 경제와 문화 등 각 분야의 교류와 협력을 실현하기 위한 합의의 이행을 위하여 이 합의서 발효 후 3개월 안에 남북 경제교류·협력 공동위원회를 비롯한 부문별 공동위원회들을 구성·운영한다.

 

  • 김영삼 정부(문민정부)

1994년 김영삼 정부는 화해와 협력, 남북 연합, 통일 국가 완성으로 이어지는 ‘한민족 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 방안’을 제시하였다.

경수로 사업(1994년).

 

  • 김대중 정부(국민의 정부)
    • 햇볕 정책

김대중 정부는 한반도 평화 정책과 남북 교류 확대를 위해 적극적인 대북 화해 협력 정책인 ‘햇볕 정책’을 추진하였다.

 

    • 6⋅15 남북 공동 선언

2000년 평양에서 최초의 남북 정상 회담이 이루어져 6⋅15 남북 공동 선언이 발표되었다. 또, 금강산 관광(1998년)과 경의선 연결, 개성 공단 건설, 남북 이산 가족 상봉 등이 실현되어 남북 간의 긴장 완화와 화해 협력이 진전되었다.

 

합의 내용

1.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2. 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 나가기로 하였다.

 

    • 남북 경의선 철도 복원 기공식

2000년 9월 18일 남북 경의선 철도 복원 기공식이 있었다.

 

  • 노무현 정부(참여정부)
    • 개성 공단

2003년 개성에 남한 기업들의 공단을 착공·조성하였다.

 

    • 금강산 육로 관광

2003년부터 금강산 육로 관광이 시작되었다.

 

    • 남북 경제 협력 협의 사무소

2005년 개성에 남북 경제 협력 협의 사무소가 설치되었다.

 

    • 10⋅4 남북 공동 선언

노무현 정부도 한반도 평화 통일을 위해 2007년 평양에서 제2차 남북 정상 회담을 가져 남북 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10⋅4 남북 공동 선언)을 하였다

 

  • 문재인 정부
    • 평창 동계 올림픽 개최

2018년 2월 강원도 평창에서 평창 동계 올림픽이 개최되었다. 개막식에서 남북 선수단이 공동 입장하였다. 또한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였다.

 

    • 2018 제1차 남북 정상 회담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1차 남북 정상 회담이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판문점 선언을 채택했다.

 

    • 2018 제3차 남북 정상 회담

2018년 8월 평양에서 3차 남북 정상 회담이 열렸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평양공동선언을 발표했다.

김영삼 정부
  • 문민정부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여당의 김영삼이 당선되면서 5·16 군사 정변 이후 처음으로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 금융 실명제

1993년 김영삼 정부는 금융 실명제를 실시하여 탈세와 부정부패를 막고자 하였다.

 

  • 지방 자치제 실시

김영삼 정부에서는 지역 주민이 자치 단체장까지 직접 선출하는 지방 자치제를 전면적으로 시행하였다.

 

  • 역사 바로 세우기

역사 바로 세우기를 진행하여 1995년 조선 총독부 청사를 해체하였다.

 

  • 삼풍 백화점 붕괴

1995년 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 OECD 가입

김영삼 정부는 1996년 경제 협력 개발 기구(OECD)에 가입하였다.

 

  • IMF 외환 위기

김영삼 정부임기 말인 1997년, 외환 위기가 발생해 국제 통화 기금(IMF)의 구제 금융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대규모 해고 사태가 발생하였다.

 

  •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과 세계 무역 기구(WTO)

1986년에는 자유 무역을 촉진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우루과이에서 다자간 무역 협상 개시를 위한 각료 선언(우루과이 라운드)을 발표하였다.

이에 정부는 미국 등의 개방 압력과 우루과이 라운드에 따라 시장과 자본의 전면적인 개방을 서둘렀고, 그 결과 다국적 기업과 국제 금융 자본 등이 국내에 진출하였다.

1994년에 타결된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과 다음 해에 세계 무역 기구(WTO)가 출범하자, 상품과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중시하는 새로운 국제 무역 질서가 수립되었다.

한국 정부는 1995년 1월 1일부터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다.

 

  • 초등학교

국민학교가 초등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 하나회 청산

군내 비밀 사조직이었던 하나회를 청산했다.

 

  • 거창 사건 특별법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었다.

여수·순천
10·19 사건
  • 여수·순천 10·19 사건

1948년 10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정부는 제주도에서 발생한 무장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여수에 주둔 중이던 군대를 파견하려 핬다.

하지만 군대 내 좌익 세력이 출동을 거부하고 여수와 순천을 일시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이 여수·순천 10·19 사건이다.

 

  • 국가 보안법

여수·순천 10·19 사건으로 인해 국가 보안법이 제정되었다.

5·16 군사 정변
  • 배경

장면 내각 시기에 전개된 민간 차원의 통일 운동과 정부의 군비 축소 계획에 대해 일부 군인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

 

  • 5·16 군사 정변
    • 전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와 일부 군인들이 군사 정변을 일으켜 헌정을 중단하였다.

 

    • 혁명 공약

군사 정변 세력은 군사 혁명 위원회를 조직하고, 반공을 국시로 내건 ‘혁명 공약’을 발표하였으며,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 국가 재건 최고 회의

군사 정변 세력은 국가 재건 최고 회의를 구성하고 군정을 시행하였다.

 

    • 중앙정보부 창설

1961년 군사 정변 세력은 5·16 군사 정변 직후 중앙정보부를 창설하였다.

 

  • 정치 활동 정화법 제정

군사 정변 세력은 정치 정화법을 제정하여 주요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을 규제하였다.

 

  • 제5차 개헌

군사 정변 세력은 대통령 직선제, 대통령 중심제와 단원제 국회 구성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안을 국민 투표로 확정하여 공포하였다.

 

  • 민주 공화당 창당

군사 정변 세력은 민주 공화당을 창당했다.

 

  • 박정희 대통령 당선(1963년)

군사 정변 당시 군부 세력은 민간에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하였으나 박정희는 전역 직후 제5대 대통령 선거에 민주 공화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한일 국교 정상화
  • 배경

박정희 정부는 집권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경제 개발을 추진하였다.

그래서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 마련 등을 이유로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였다.

 

  • 김종필·오히라 회담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일본 오히라 외무대신이 만나서 일본이 한국에 경제 협력 자금이라는 명목의 지원금과 유·무상 차관을 제공하기로 합의하였다.

 

  • 6·3 시위(1964년)

한·일 국교 회담에서 식민 지배에 대한 사죄, 정당한 배상 등에 대한 요구보다 경제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데 집중하였다는 내용이 알려지자, 국민들은 대일 굴욕 외교로 평가하고 범국민적인 정권 퇴진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는 휴교령과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시위를 진압하였다.

 

  • 한·일 협정

1965년 박정희 정부는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한·일 협정(한일 기본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서는 독도 영유권에 관한 문제가 다뤄지지 않았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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