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번, 48번 문제
[47~48] 다음 자료를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 (가) 살리타이가 처인성을 공격하였다. 적을 피해 성에 와 있던 한 승려가 살리타이를 쏘아 죽였다. 국가에서 그 전공을 칭찬하여 상장군 벼슬을 주었다. 승려가 전공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며 말하기를, “전투할 때 나는 활과 화살이 없었으니, 어찌 감히 공 없이 무거운 상을 받겠습니까.”라고 하고, 굳게 사양하며 받지 않았다.
(나) [우리 부대가] 대군(大軍)과 연합하여 평양을 포위하였다. 보장왕이 먼저 연남산 등을 보내 영공에게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영공은 보장왕과 왕자 복남·덕남 및 대신 등 20여 명을 끌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각각 김인문과 대아찬 조주는 영공을 따라 돌아갔다. (다) 비국(備局)에서 아뢰기를, “적병이 두 차례나 용골산성을 공격해 왔지만 정봉수는 홀로 고립된 성을 지키면서 충성과 용맹을 더욱 떨쳤습니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사를 더 모집하여 육로로 혹은 배편으로 달려가서 기세(氣勢)를 돕게 하소서. 용골산성이 비록 포위에서 풀렸으나 이 일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라) 부사 송상현은 왜적이 바다를 건넜다는 소식을 듣고 지역 주민과 군사 그리고 이웃 고을의 군사들을 모두 불러 모아 성에 들어가 지켰다. …… 성이 포위당하자 상현이 성의 남문에 올라가 전투를 독려하였으나 한나절 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상현은 갑옷 위에 조복(朝服)*을 입고 의자에 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 적이 모여들어 생포하려고 하자 상현이 발로 걷어차면서 항거하다가 마침내 해를 입었다. *조복(朝服): 관원이 조정에 나아가 하례할 때 입던 예복 |
47. (가)~(라) 전투를 일어난 순서대로 옳게 나열한 것은? [2점]
① (가) – (나) – (다) – (라)
② (가) – (나) – (라) – (다)
③ (나) – (가) – (라) – (다)
④ (나) – (다) – (가) – (라)
⑤ (다) – (라) – (나) – (가)
48. (라) 전투가 벌어진 지역에서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내상이 무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② 안승이 왕으로 봉해진 보덕국이 세워졌다.
③ 지역 차별에 반발하여 홍경래가 봉기하였다.
④ 만적을 비롯한 노비들이 신분 해방을 도모하였다.
⑤ 지주 문재철의 횡포에 맞서 소작 쟁의가 일어났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47번 문제 해설
(가) 1232년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처인성 전투에서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나) 668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으로 고구려가 멸망했다.
(다) 1627년 후금이 조선을 침입하는 정묘호란이 발생했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정봉수는 용골산성에서 후금의 침입에 맞써 싸웠다.
(라) 1592년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했다(임진왜란).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항전하였지만 패배하였다.
정답은 ③번이다.
48번 문제 해설
동래성이 있던 위치는 현재 부산에 해당한다.
① 내상이 무역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선 후기 사상이 활동하던 시기, 내상은 동래부(현재의 부산)에서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② 안승이 왕으로 봉해진 보덕국이 세워졌다.
674년 신라는 고구려의 왕족 안승으로 하여금 금마저(전북 익산)에 보덕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하여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지역 차별에 반발하여 홍경래가 봉기하였다.
1811년 세도 정권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어 오던 평안도 지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만적을 비롯한 노비들이 신분 해방을 도모하였다.
1198년, 고려 신종 때 개경에서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 해방 운동을 시도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지주 문재철의 횡포에 맞서 소작 쟁의가 일어났다.
1923년 전라도 암태도에서 소작인들이 친일 지주 문재철의 횡포와 일본 경찰의 탄압에 맞서 암태도 소작 쟁의를 벌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①번이다.
| 고려 몽골의 침입 |
13세기 초, 몽골 초원에서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여 금을 공격하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1225년 고려에 왔다가 귀국하던 몽골 사신이 피살되는 사건(저고여 피살 사건)이 일어나자, 고려와 몽골의 외교관계는 단절되었다.
1231년, 몽골의 침입으로 고려 고종은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강화 천도), 주민을 산성과 섬으로 피난시킨 뒤 항전과 외교를 병행하면서 저항. 귀주성에서는 박서의 지휘 아래 몽골군에 맞서 끝까지 성을 지킴
1232년, 처인성 전투에서는 김윤후와 처인 부곡민이 몽골군 사령관 살리타를 사살
1236년 몽골이 고려를 침입했을 때, 송문주가 죽주성에서 적군을 격퇴하였다.
1253년 몽골의 5차 침입 때 김윤후가 충주성에서 관민을 이끌고 몽골군을 격퇴.
대구 부인사에 보관하고 있던 대장경의 판목과 경주의 황룡사 9층 목탑 등이 몽골군에 의해 소실
몽골과 강화를 맺자는 주화파가 득세하고, 최씨 정권이 무너지면서 전쟁 종결. 1270년, 고려 원종 때 무신의 마지막 권력자인 임유무가 피살되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
1270년 고려 정부가 개경으로 환도하자, 대몽 항쟁에 앞장섰던 삼별초는 왕족인 승화후 온을 왕으로 삼고 배중손의 지휘 아래 반기를 들었다. 진도와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면서 여⋅몽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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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고구려 멸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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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용골산성)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강화도에서는 김상용이 항전 끝에 순절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변급과 신유가 지휘하는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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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왜란 |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항전하였지만 패배 신립이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웠지만 패배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둠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 사용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점령된 지역을 수복. 이를 북관대첩이라고 함.
이덕형이 구원병 요청을 위해 명에 청원사로 파견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 방어(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패배시킴(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동래성 전투 – 1592년 5월 탄금대 전투 – 1592년 6월 한산도 대첩 – 1592년 8월 제1차 진주성 전투 – 1592년 10월 평양성 전투(평양 탈환) – 1593년 2월 행주 대첩 – 1593년 3월 명량 대첩 – 1597년 10월 노량 해전 – 1598년 12월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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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산 | 고려시대 정서가 부산에서 유배 중에 정과정이라는 고려 가요를 지었다.
임진왜란 당시 동래성 전투가 벌어졌다. 1609년 일본과의 기유약조 체결 이후 초량에 왜관이 지어졌다. 조선 후기 사상인 내상이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범어사가 있다. 독립 협회가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를 저지시켰다. 부산항은 강화도 조약으로 개항되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이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1920년 의열단원 박재혁이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유신 체제에 반대하는 부마 민주 항쟁이 일어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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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사상의 대두 |
조선 후기에는 농업 생산력이 증대되고 수공업 생산이 활발해지면서 상품의 유통도 활성화되었다. 부세 및 소작료의 금납화, 인구의 자연 증가와 인구의 도시 유입도 상품 화폐 경제의 진전을 더욱 촉진하였다.
1791년 정조는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도성 안에서 시전 상인이 아닌 난전의 상업 활동을 허락하였다. 이를 신해통공이라고 한다. 이로써 상인들은 보다 자유롭게 상업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처음에는 공인이 상업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사상의 활동은 주로 칠패, 송파 등 도성 주변에서 이루어졌지만, 개성, 평양, 의주, 동래 등 지방 도시에서도 활발하였다. 그들은 각 지방의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품을 교역하고, 각지에 지점을 두어 상권을 확장하였다.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활동 기반을 강화하였는데, 주로 인삼을 재배, 판매하고 대외 무역에도 깊이 관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경강상인은 운송업에 종사하면서 거상으로 성장하였다. 그들은 한강을 근거지로 하여 주로 서남 연해안을 오가며 미곡, 소금, 어물 등을 거래하였다. 또한 선박의 건조 등 생산 분야에까지 진출하여 활동 분야를 넓히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동래부(東萊府, 현재의 부산)에서 일본과 무역을 하였다.
의주에서 활동하던 만상은 대중국 무역을 주도하면서 부를 많이 축적하였다.
일부 공인과 사상은 독점적 도매상인인 도고로 성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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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제, 고구려 부흥 운동 |
복신과 흑치상지, 도침 등은 왕자 부여풍을 왕으로 추대 복신과 도침은 주류성,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군사를 일으킴 200여 성을 회복하고 사비성과 웅진성의 당군을 공격하면서 4년간 저항하였으나, 나⋅당 연합군에 의하여 부흥 운동은 좌절 661~663년경 백제의 흑치상지가 당의 유인궤에게 항복 663년, 왜의 수군이 백제 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백강 입구까지 왔으나 패배
670년 보장왕의 서자 안승을 받든 검모잠과 고연무 등은 고구려의 유민을 모아 부흥 운동을 전개 검모잠은 한성, 고연무는 오골성을 근거지로 삼음 674년 신라는 고구려의 왕족 안승으로 하여금 금마저(전북 익산)에 보덕국이라는 나라를 세우게 하여 고구려 부흥 운동 세력을 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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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 |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1811년 세도 정권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어 오던 평안도 지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홍경래의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정주성 싸움에서 패하여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의 농민이 하나로 뭉쳐 탐관오리의 착취와 지방 차별에 반대한 농민 항쟁이었다. 이 난은 평안도 지역에 한정되어 일어났고, 지도자들이 농민층을 조직적으로 끌어들일 개혁안을 내놓지 못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 뒤에 발생한 임술 농민 봉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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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민 운동 |
일제의 토지 조사 사업과 산미 증식 계획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갈수록 어려워졌다. 농민들은 수확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와 세금 등을 부담하였기 때문에 식량 부족과 경제적 궁핍에 시달렸다. 결국 많은 농민이 자작농에서 자소작농으로, 자소작농에서 토목 공사장이나 광산 노동자로 몰락하였다
1920년대 들면서 농민들은 생존권을 요구하는 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23년 전라도 암태도에서 소작인들이 친일 지주 문재철의 횡포와 일본 경찰의 탄압에 맞서 암태도 소작 쟁의를 벌였다.
1927년 전국적인 농민 운동 단체인 조선 농민 총동맹이 결성되어 농민 운동의 규모와 조직이 한층 발전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공황의 영향으로 농민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고, 농민 운동은 사회주의 혁명을 지향하는 비합법적이고 혁명적인 농민 조합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또한 이 시기 농민 운동은 반제국주의 항일 운동의 모습을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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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무신정권기 |
1170년, 의종이 개경 부근의 보현원에서 놀이를 즐길 때를 이용하여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 문신들을 제거하고 의종을 귀양 보낸 다음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 무신 간 내분으로 정중부가 피살되고, 경대승, 이의민이 차례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됨. 중방 – 최고위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최고 권력 기구 무신 집권자의 변화: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충헌
최씨 정권의 성립 – 1196년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후 4대 60여년간 최씨 정권이 지속됨 명종 때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 교정도감 – 희종 때 설치된 최씨 정권 최고 권력 기구. 최고 집권자는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
아버지인 최충헌의 뒤를 이어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1225년)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 서방을 설치하여 유명 문신을 머무르게 하며 정권 운영의 고문을 담당 고려 고종은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몽 항쟁을 위해 강화 천도 삼별초 설치. 삼별초는 도방과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
1173년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에서 무신 정권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의종의 복위를 추진했지만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1174년,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일으킴. 이의민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여 상장군이 됨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
1193년, 경상도의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 김사미와 효심이 저항 운동을 일으킴
1198년, 고려 신종 때 개경에서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 해방 운동을 시도, 사전 발각 후 실패
1237년, 고려 고종 때 원율과 담양 지역에서 이연년 형제가 봉기를 일으켰다. 김경손이 이를 진압했다. |
기출 문제 키워드
- 고려 몽골과의 전쟁
- 김윤후
- 백제, 고구려 멸망
- 정묘호란
- 임진왜란
- 부산 지역의 역사
- 조선 후기 사상의 대두
- 내상
- 백제, 고구려 부흥 운동
- 안승
- 보덕국
- 홍경래의 난
- 만적의 난
- 암태도 소작 쟁의
2023년 제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 63회 한능검 심화 해설 1번~50번
- 63회 한능검 심화 1번 해설 – 구석기 시대
- 63회 한능검 심화 2번 해설 – 동예
- 63회 한능검 심화 3번 해설 – 백제, 고구려
- 63회 한능검 심화 4번 해설 – 백제 멸망
- 63회 한능검 심화 5번 해설 – 통일 신라
- 63회 한능검 심화 6번 해설 – 최치원
- 63회 한능검 심화 7번 해설 – 신라 진흥왕
- 63회 한능검 심화 8번 해설 – 발해 문왕
- 63회 한능검 심화 9번 해설 – 고려 최충헌
- 63회 한능검 심화 10번 해설 – 불국사 3층 석탑
- 63회 한능검 심화 11번 해설 – 견훤
- 63회 한능검 심화 12번 해설 – 고려 광종
- 63회 한능검 심화 13번 해설 – 고려 관학 진흥 정책
- 63회 한능검 심화 14번 해설 – 고려 거란의 침입
- 63회 한능검 심화 15번 해설 – 고려 문화유산
- 63회 한능검 심화 16번 해설 – 고려 지눌
- 63회 한능검 심화 17번 해설 – 고려 요동 정벌, 위화도 회군, 과전법
- 63회 한능검 심화 18번 해설 – 고려 시대 경제
- 63회 한능검 심화 19번 해설 – 조선 영조
- 63회 한능검 심화 20번 해설 – 무오사화
- 63회 한능검 심화 21번 해설 – 조선 세조
- 63회 한능검 심화 22번 해설 – 율곡 이이
- 63회 한능검 심화 23번 해설 – 사림의 분화, 기해예송
- 63회 한능검 심화 24번 해설 – 청나라, 병자호란
- 63회 한능검 심화 25번 해설 – 조선 후기 경제
- 63회 한능검 심화 26번 해설 – 비변사
- 63회 한능검 심화 27번 해설 – 김정희
- 63회 한능검 심화 28번 해설 – 신해박해, 병인박해
- 63회 한능검 심화 29번 해설 – 박규수
- 63회 한능검 심화 30번 해설 – 갑신정변
- 63회 한능검 심화 31번 해설 – 3.1 운동
- 63회 한능검 심화 32번 해설 – 제1차 갑오개혁
- 63회 한능검 심화 33번 해설 – 독립협회
- 63회 한능검 심화 34번 해설 – 스티븐스 저격
- 63회 한능검 심화 35번 해설 – 임병찬
- 63회 한능검 심화 36번 해설 – 조선 혁명군
- 63회 한능검 심화 37번 해설 – 일제 강점기 형평 운동
- 63회 한능검 심화 38번 해설 – 일제 무단 통치
- 63회 한능검 심화 39번 해설 – 조선어 학회
- 63회 한능검 심화 40번 해설 – 김구, 여운형
- 63회 한능검 심화 41번 해설 – 제헌 국회
- 63회 한능검 심화 42번 해설 – 6.25 전쟁
- 63회 한능검 심화 43번 해설 – 이승만 정부
- 63회 한능검 심화 44번 해설 – 3선 개헌, 유신 헌법
- 63회 한능검 심화 45번 해설 – 박정희 정부
- 63회 한능검 심화 46번 해설 – 영주 부석사 소조 여래 좌상
- 63회 한능검 심화 47번 48번 해설 – 몽골, 고구려 멸망, 정묘호란, 임진왜란
- 63회 한능검 심화 49번 해설 – 6월 민주 항쟁
- 63회 한능검 심화 50번 해설 – 7·7 선언
한국사 시험 모음
- 한능검 개념 요약 정리
- 연표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1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1점 문제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고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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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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