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회 한능검 심화 24번 해설 – 청나라, 병자호란

24번 문제

24. (가) 국가에 대한 조선의 정책으로 옳은 것은? [2점]

<답사 보고서>

주제: 남한산성에서 삼학사의 충절을 만나다

내용: 현절사(顯節祠)는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충절을 기려 남한산성에 세운 사당이다. 그들은 (가)의 침입으로 발생한 전쟁에서 화의를 반대하며 결사 항전을 주장하였다. 항복 이후 그들은 (가)(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그들과 함께 척화를 주장하였던 김상헌, 정온도 추가로 이곳에 모셔졌다.

① 만권당을 세워 학문 교류를 장려하였다.

② 어영청을 강화하는 등 북벌을 추진하였다.

③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④ 사신 접대를 위해 한성에 동평관을 설치하였다.

⑤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유정을 회답 겸 쇄환사로 파견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636년 후금은 조선에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김상헌 등이 남한산성에서 화의에 반대하여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① 만권당을 세워 학문 교류를 장려하였다.

1314년 원에서 만권당을 설치하여, 이제현 등 고려 유학자와 조맹부 등 한족 출신 유학자를 불러모아 서로 교류하게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어영청을 강화하는 등 북벌을 추진하였다.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였으며, 어영청을 중심으로 국방력을 강화하고 북벌을 준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화통도감을 설치하여 군사력을 증강하였다.

1377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중심으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사신 접대를 위해 한성에 동평관을 설치하였다.

조선은 일본과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사신 접대를 위해 한양에 동평관을 두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유정을 회답 겸 쇄환사로 파견하였다.

임진왜란 후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임진왜란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려왔다(1604년).

또한 160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회답 겸 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이다.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 정묘호란(1627년)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용골산성)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 병자호란(1636년)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강화도에서는 김상용이 항전 끝에 순절하였다.

 

  • 북벌 운동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였으며, 어영청을 중심으로 국방력을 강화하고 북벌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 나선 정벌(1654년, 1658년)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변급과 신유가 지휘하는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고려
성리학의 전래
  •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소개한 사람은 충렬왕 때 안향이었다. 원과의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고려는 원에서 성리학을 받아들였다.
  • 이제현은 원에 설립된 만권당에서 원의 학자들과 교류하였다.
  • 공민왕 때 이색은 정몽주, 권근, 정도전 등을 가르쳐 성리학을 더욱 확산시켰다.
  • 성리학을 수용한 사람은 대부분 신진 사대부였다. 이들은 유교적인 생활 관습을 시행하고자 소학과 주자가례를 중시하고, 권문세족과 불교의 폐단을 비판하였다.
고려의
화약 무기 제조
  • 1377년 고려 말 왜구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해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최무선을 중심으로 화약과 화포를 제작.
  • 최무선은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금강 하구) 해전에서 왜구를 격퇴
조선 전기
일본과의 관계
  • 교린 정책

조선은 일본과의 교류에는 교린 정책을 원칙으로 하였다.

사신 접대를 위해 한양에 동평관을 두었다.

 

  • 쓰시마 섬 정벌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에 대한 토벌은 고려 말과 조선 초에 이루어졌다. 1419년(세종 1)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 3포 개항과 계해약조

왜구의 요구를 받아들여 부산포, 제포(진해), 염포(울산) 등 3포를 개방하여 무역을 허용하고, 계해약조(1443년)를 체결하여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하였다.

 

  • 해동제국기

세종 때 일본에 다녀온 신숙주가 왕의 명령에 따라 쓴 견문기이다.

조선 후기
일본과의 관계
  • 일본의 국교 요청

임진왜란으로 침략을 받은 조선은 일본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에도 막부는,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쓰시마 섬 도주를 통하여 조선에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다.

 

  • 조선인 포로 송환

조선은 막부의 사정을 알아보고 임진왜란 때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하여 유정(사명대사)을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하고 조선인 포로 3500여 명을 데려왔다(1604년).

또한 1607년부터 세 차례에 걸쳐 포로 송환을 목적으로 회답겸쇄환사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1607년 부산 두모포에 왜관이 설치되었다.

 

  • 기유약조

조선은 일본과 기유약조를 맺어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섭을 허용하였다(1609년).

1678년 부산 초량에 왜관이 건설되었다.

 

  • 통신사 파견

일본 에도 막부의 요청으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사절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통신사 일행은 적을 때에는 300여 명, 많을 때에는 400~500명이나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하였다. 일본은 이들을 통하여 조선의 선진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자 하였다. 따라서, 통신사는 외교 사절로서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 을릉도와 독도

숙종 때,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 내고,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3년 제63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연표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