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27번 기출 해설

문제

27. (가) 왕의 재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였다.

② 이만손이 주도하여 영남 만인소를 올렸다.

③ 이시애가 길주를 근거지로 난을 일으켰다.

④ 홍경래 등이 봉기하여 정주성을 점령하였다.

⑤ 곽재우, 고경명 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조선 후기 순조의 장인은 김조순이다.

 

①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하였다.

조선 고종 시기이자 흥선 대원군의 집권 시기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발생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이만손이 주도하여 영남 만인소를 올렸다.

조선 고종 시기 개화 정책이 실시되고 <조선책략>이 퍼지자,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 및 미국과의 수교에 반대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이시애가 길주를 근거지로 난을 일으켰다.

조선 세조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홍경래 등이 봉기하여 정주성을 점령하였다.

1811년 조선 순조 시기 홍경래의 난이 발생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곽재우, 고경명 등이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조선 선조 임진왜란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조선 후기
세도 정치
  • 세도 정치의 전개

정조의 탕평 정치로 말미암아 왕에게 집중되었던 권력은 결과적으로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되었다.

정조의 뒤를 이어 순조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서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몇몇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였다. 이것을 세도 정치라고 한다.

정조가 죽은 후 순조, 헌종 , 철종의 3대 60여 년 동안 안동 김씨나 풍양 조씨 같은 왕의 외척 세력이 권력을 행사한 것이다.

 

  • 세도 가문

안동 김씨 – 순조가 11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김조순이 왕의 장인이 되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안동 김씨는 철종 때에도 세도를 누렸다.

풍양 조씨 – 헌종 이 8세로 즉위하자, 왕의 외조부인 조만영이 정치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 순조 수렴 청정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 정순 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정조 때 정권에서 소외되었던 노론 벽파 세력이 정국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 훈련도감 정상화

이들은 신유박해를 이용하여 정조가 규장각을 통하여 양성한 인물들을 몰아냈고, 장용영을 혁파하고 훈련도감을 정상화시켜 이를 장악하였다.

 

  • 안동 김씨

정순 왕후가 죽고 벽파 세력이 퇴조하고, 순조의 장인 김조순을 중심으로 하는 안동 김씨 일파의 세도 정치가 전개되었다.

김조순은 반남 박씨와 풍양 조씨 등 일부 유력 가문의 협력을 얻어 정국을 주도하였다.

 

  • 효명 세자의 견제 실패

순조 말년에는 효명 세자가 대리청정을 통하여 세도가들을 견제하고 권력 집단을 결집하려 했으나 갑자가 죽음으로써 실패하였다.

 

  • 헌종

헌종이 즉위하면서 헌종의 외척인 풍양 조씨 가문이 득세하였다.

 

  • 철종

철종 때에 이르러 안동 김씨 세력이 다시 권력을 장악하였다.

결국 안동 김씨 중심의 세도 정치는 흥선 대원군이 정국을 주도하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 세도 정치기의 권력 구조

권력 구조에서 고위직만 정치적 기능을 발휘하고, 그 아래의 관리는 언론 활동 같은 정치적 기능을 거의 잃은 채 행정 실무만 맡게 되었다.

비변사가 핵심적인 정치 기구로 자리잡았으며, 유력한 가문 출신의 몇몇이 실제 권력을 행사하였다.

 

  • 세도 정치의 폐단

19세기의 세도 정권은 사회 전반의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 가려는 능력도 지니지 못하였다.

세도 정권은 정조가 등용하였던 재야 세력인 남인, 소론, 지방 선비들을 권력에서 배제하여 사회 통합에 실패하였다.

향촌에서는 지방 사족을 배제한 채 수령이 절대권을 가지고 조세를 거두도록 하였다.

세도 정치기에는 관직이 매매되는 등 비리가 만연하였으며, 탐관오리들의 부당한 조세 수탈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하였다.

더욱이 자연 재해가 잇따르고 기근과 질병이 널리 퍼졌으며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였으나 농민의 조세 부담은 더욱 무거워져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에 달하였다.

 

  • 매관 매직의 실태

세도 정치하에서는 정치의 도리가 지켜지지 않고, 관리의 기강이 무너지면서 관직을 사고 파는 현상이 일반화되었다. 감사 자리는 보통 5만~6만 냥, 수령 자리는 2만~3만 냥 정도에 거래되었다.

오페르트
도굴 사건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일 상인 오페르트는 조선에 들어와 몇 차례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거부당하였다.

오페르트는 프랑스 선교사, 미국 자본가의 지원을 받아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 하였다(1868년).

하지만 주민들의 저항으로 도굴에 실패하였다.

위정척사
운동
  • 위정척사 운동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에 대해 전통적인 유생층은 성리학적 전통 질서를 지키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개항과 개화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려 정부의 정책에 반발하였다.

 

  • 1860년대

1860년대 천주교가 퍼지고 서구 열강이 무력을 앞세워 통상을 요구하자 유생들은 통상에 반대하였다. 이항로, 기정진 등은 척화 주전론을 내세우며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지지하였다.

 

  • 1870년대

1870년대 강화도 조약의 체결 무렵에는 최익현 등이 왜양일체론을 내세우며 일본의 개항 요구에 반대하였다(개항 반대 운동).

 

  • 1880년대

1880년대 들어 개화 정책이 실시되고 <조선책략>이 퍼지자, 이만손을 중심으로 한 영남 유생들은 만인소를 올려 정부의 개화 정책 및 미국과의 수교에 반대하였다. 이러한 개화 반대 운동은 정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수신사 김홍집이 가지고 와서 유포한 사사로운 책자를 보노라면 어느새 털끝이 일어서고 쓸개가 떨리며 울음이 북받치고 눈물이 흐릅니다.…

청은 우리가 신하로서 섬기는 바이며 해마다 옥과 비단을 보내는 수레가 요동과 계주를 이었습니다. 신의와 절도를 지키고 속방의 직분을 충실히 지킨 지 벌써 2백년이나 되었습니다. …

미국은 우리가 본래 모르던 나라입니다. 잘 알지 못하는데 공연히 타인의 권유로 불러들였다가 그들이 재물을 요구하고 우리의 약점을 알아차려 어려운 청을 하거나 과도한 경우를 떠맡긴다면 장차 이에 어떻게 응할 것입니까?

일본은 우리에게 매어있던 나라입니다. … 그들은 이미 우리 땅을 잘알고 수륙 요충 지대를 점거하고 있습니다. … 그들이 우리의 허술함을 알고 함부로 쳐들어오면 장차 이를 어떻게 막겠습니까?

러시아는 본래 우리와 혐의가 없는 나라입니다. 공연히 남의 말만 듣고 틈이 생기게 된다면 우리의 위신이 손상될 뿐만 아니라 만약 이를 구실로 침략해 온다면 장차 이를 어떻게 막을 것입니까?…

– 영남만인소 중에서 –

  • 1890년대

반외세·반침략의 성격을 띤 위정척사 운동은 항일 의병 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양반 중심의 성리학적 질서를 유지하려 했다는 한계를 지녔다. 유인석은 을미의병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하였다.

조선 세조
  • 계유정난으로 김종서 등을 제거하고 왕위에 올랐다.
  • 6조 직계제 실시 – 강력한 왕권 행사
  • 집현전 폐지
  • 직전법 실시(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
  • 간경도감 설치(불서 간행 목적)
  • 진관 체제 실시
  • 이시애의 난 발생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
  • 배경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삼정의 문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수취 제도 문란으로 전정(전세 수취 제도), 군정(군포 징수 제도), 환곡(구휼 제도)의 문란을 말한다.

  • 홍경래의 난(1811년)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권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어 오던 평안도 지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였다.

 

  • 과정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정주성 싸움에서 패하여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 의의와 실패 원인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의 농민이 하나로 뭉쳐 탐관오리의 착취와 지방 차별에 반대한 농민 항쟁이었다.

이 난은 평안도 지역에 한정되어 일어났고, 지도자들이 농민층을 조직적으로 끌어들일 개혁안을 내놓지 못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 영향

그러나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 뒤에 발생한 임술 농민 봉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임진왜란
  • 배경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 임진왜란 발발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 이순신과 수군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둠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 사용

 

  • 의병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점령된 지역을 수복. 이를 북관대첩이라고 함.

 

  • 육군

조⋅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 방어(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패배시킴(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 훈련도감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 정유재란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 임진왜란의 영향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기출 문제 키워드

 

2025년 제7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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