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35번 기출 해설

문제

35. 다음 기사가 보도된 시기에 볼 수 있는 모습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OO신문

[사설] 대홍수의 재난에서 조선의 형제들을 구하라

▲ 침수된 용산 일대

대홍수로 중부 지방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하였다. 7월 18일에는 용산과 뚝섬 일대가 완전 침수되었고 이튿날은 광주군 선리 주민 292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경부선은 10일간 불통이었다. 그럼에도 총독부는 이와 같은 홍수 피해에 무성의하게 대처하고 있다. 재작년 일본에서 관동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조선인들이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선의 형제들은 능력껏 구제의 손길을 뻗쳤었다. 그러나 지금 조선에서 홍수 피해로 각지에서 재난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총독부와 일본인 거류민들은 모른 척하고 있다. 조선인이여! 조선인을 구하라. 재난을 당한 형제와 같이 울며 아프며 살 길을 구하라.

① 영선사 일행으로 청에 가는 생도

② 경성 제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

③ 국채 보상 운동의 모금에 참여하는 상인

④ 육영 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미국인 교사

⑤ 전차 개통식에 참여하는 한성 전기 회사 직원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고 나서 일본인들이 6천 명이 넘는 동포들을 학살하였다.

조선 총독부는 일제 강점기 일제가 식민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설치한 중추 기관이다.

 

① 영선사 일행으로 청에 가는 생도

1881년 조선 정부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임명하여 중인 자제들을 이끌고 청에 가서 무기 화약 기계 제조법을 배우게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경성 제국 대학에서 공부하는 학생

일제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교육하고 한국인의 교육열을 무마하기 위해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국채 보상 운동의 모금에 참여하는 상인

국권 피탈 전,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경제적 예속화 정책에 저항하여 1907년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육영 공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미국인 교사

1886년 정부는 육영 공원을 세워 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 세 사람을 초빙하여 주로 현직 관료와 상류층의 자제들에게 신지식과 외국어를 가르쳤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전차 개통식에 참여하는 한성 전기 회사 직원

1899년 한성 전기 회사는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운행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국외 이주 동포의
활동과 시련
  • 만주 이주 동포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의 침략이 가속화되자 확고한 민족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항일 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많이 건너갔다.

이들은 수많은 민족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 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였다. 뿐만 아니라 항일 운동 단체를 결성하고 군사 훈련을 실시하여 무장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하지만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후에 일본군 대부대가 만주로 출병하여 독립 운동 기지를 초토화하면서 무차별 학살하는 간도 참변에 의해 많은 동포들이 피살되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지기도 했다.

 

    • 만보산 사건

1931년 중국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사건이다.

 

  • 일본 이주 동포

일본 도쿄에 있던 한국인 유학생들은 조선 청년 독립단을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독립 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2⋅8 독립 선언이다(1919년 2월 8일).

1923년 관동 대지진이 발생하고 나서 일본인들이 6천 명이 넘는 동포들을 학살하였다.

1938년 일제가 중·일 전쟁을 일으킨 후 강제 동원으로 일본에 끌려간 한국인이 늘어었다.

 

  • 연해주 이주 동포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만들어졌고,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또한 이곳에서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하지만 1921년 자유시 참변이 발생하여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1937년에는 연해주의 한인들이 소련 당국에 의해 중앙 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한인들이 희생되고 재산을 잃어버렸다.

 

  • 미주 이주 동포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10년에는 통합 단체인 대한인 국민회를 조직하여 항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단체는 미국 조야에 일제의 야만성을 폭로,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주장하는 외교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14년 박용만은 하와이로 거점을 옮겨 대조선 국민 군단과 대조선 국민 군단 사관학교을 창립하였다.

외교 사절과
시찰단 파견
  • 수신사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정부는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여 근대화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조사하였다.

    • 1차 수신사

1차 수신사 김기수 일행은 일본의 근대 시설을 시찰하였다(1876년).

    • 2차 수신사

일본과의 조약 개정을 위해 파견된 2차 수신사 김홍집 일행은 목적을 이루지는 못하였지만 일본의 발전상을 살펴보고 돌아왔다(1880년).

이때 김홍집은 <조선책략>을 가지고 들어왔다.

    • 3차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에 파견되었다.

 

  • 조사 시찰단

정부는 1881년에 박정양, 어윤중, 홍영식, 유길준 등을 비밀리에 조사 시찰단으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제도와 법률, 공장 등을 조사하고 국왕에게 보고서를 올려 개화 정책의 자료로 삼게 하였다.

 

  • 영선사(1881년)

정부는 김윤식을 영선사로 임명하여 중인 자제들을 이끌고 청에 가서 무기 화약 기계 제조법을 배우게 하였다.

정부의 재정 부족으로 인원이 줄고 임오군란이 일어나면서 이들은 일찍 돌아오게 되었으나 이를 계기로 기기창이 설치되었다.

기기창

1883년 한성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이었다.

 

  • 보빙사

정부는 조미 수호 통상 조약 체결 후 미국과 수교한 이후 미국에 답례 사절단을 파견하여 근대 시설을 살펴보게 하였다(1883년).

민영익, 유길준, 홍영식 등이 파견되었다. 유길준은 귀국 후에 <서유견문>을 썼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
  • 배경

1910년대 한국인 교육은 보통 교육과 실업 교육에 치중되었고, 학교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한국인도 많지 않았다.

3·1운동 이후 교육에 대한 한국인들의 요구가 높아졌고, 제2차 조선 교육령에 따라 대학 설립이 가능해지자 실력 양성 운동 차원에서 한국인의 힘으로 고등 교육 기관을 설립하자는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일어났다.

 

  • 전개

이상재 등이 중심이 된 조선 교육회의 제안으로 서울에서 조선 민립 대학 기성 준비회가 만들어졌다(1922년).

이를 바탕으로 출범한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는 ‘한민족 1천만이 한 사람이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전국적인 모금 운동을 벌였다.

 

  • 결과

그러나 일제가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을 방해하고, 잇따른 자연재해로 모금 운동이 어려워지면서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실패하였다.

한편 일제는 한국에 있는 일본인을 교육하고 한국인의 교육열을 무마하기 위해 1924년에 경성 제국 대학을 설립하였다.

국채 보상 운동

  • 배경

일제는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시설 개선 등의 명목을 내세워 우리 정부로 하여금 일본으로부터 거액의 차관을 들여 오게 하였는데, 1907년까지 들여 온 차관 총액은 대한 제국의 1년 예산과 맞먹는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일제의 차관 제공에 의한 경제적 예속화 정책에 저항하여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 국채 보상 운동
    • 전개

1907년 서상돈, 김광제의 제안으로 대구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시작되었다.

국채 보상 기성회가 조직되었으며,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은 금연과 금주로 모은 돈과 반지, 비녀 등을 성금으로 냈으며, 여러 단체와 대한 매일 신보 등의 언론 기관도 모금 운동에 앞장섰다.

 

    • 결과

일제 통감부의 탄압으로 인해 국채 보상 운동은 좌절되고 말았다.

근대 교육의
발달

  • 원산학사

1883년에 원산(덕원부)에 사립 교육 기관인 원산 학사가 설립되어 최초로 근대 교육을 했다.

 

  • 동문학

1883년에 정부는 통역관 양성을 위한 동문학을 설립하였다.

 

  • 육영 공원

1886년 정부는 육영 공원을 세워 헐버트 등 미국인 교사 세 사람을 초빙하여 주로 현직 관료와 상류층의 자제들에게 신지식과 외국어를 가르쳤다.

좌원과 우원을 구분하여 학생을 선발하였다.

 

  • 배재 학당와 이화 학당

외국의 개신교 선교사들도 정부의 협조를 얻어 배재 학당, 이화 학당 등을 세워 신학문과 서양 문화 및 영어 등을 가르쳤다.

 

  • 한성 사범 학교

갑오개혁 이후 정부에서는 교육 입국 조서를 발표하여 교육의 중요성을 널리 알린 후에, 한성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소학교 등을 차례로 세워 인재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웠다.

근대 문물의
수용

  • 전신

1885년 서울-인천, 서울-의주 전신선이 가설되었다.

 

  • 우편

1884년 우정총국을 설립하고 근대적 우편 제도를 실시하려 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중단되었다.

정부가 우체사를 설립하면서 우편 사업을 다시 시작하였고, 1900년부터는 국제 우편 업무(만국 우편 연합 가입)도 실시하였다.

 

  • 전화

1898년 경운궁에 최초로 설치되었다.

덕률풍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 전기

1887년 경복궁에 최초로 전등을 설치하였다.

이후 우리나라 최초 전기 회사인 한성 전기 회사가 설립되어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전기 사업을 주도하였다.

묘화라고 불리기도 했다.

 

  • 전차

1899년 한성 전기 회사는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에 전차를 운행하였다.

 

  • 철도

경인선(1899년), 경부선(1905년), 경의선(1906년)이 차례로 개통되었다.

철마라고 불리기도 했다.

 

  • 의료 시설
    • 광혜원(제중원) → 세브란스 병원

1885년 갑신정변 때 부상을 입은 민영익을 치료한 알렌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인 광혜원(이후 제중원으로 개칭)을 설립하였다.

제중원은 나중에 세브란스 병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광제원 → 대한의원

<종두법>으로 유명한 지석영의 건의로 정부가 관립 의학교와 광제원(1900년)을 설립하였는데, 광제원은 대한 의원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 근대 시설
    • 박문국

1883년 박영효의 주도로 박문국에서 한성순보를 발간하였다.

    • 기기창

1883년 기기창에서 서양 무기를 제조하였다.

    • 전환국

1883년 전환국에서 새로운 화폐를 주조하였다.

 

  • 건축
    • 독립문

독립문은 프랑스의 개선문을 본떠서 건립되었다.

 

    • 덕수궁 석조전

르네상스식의 건물인 덕수궁 석조전이 건립되었다.

 

    • 명동 성당

1898년 중세 고딕식의 건물인 명동 성당이 세워졌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5년 제75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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