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20번 기출 해설

문제

20. (가) 왕의 재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유자광의 고변으로 남이가 처형되었다.

②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죽임을 당하였다.

③ 외척 간의 권력 다툼으로 윤임이 제거되었다.

④ 위훈 삭제를 주장한 조광조 일파가 축출되었다.

⑤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김일손 등이 피해를 입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조선 연산군 때 연산군의 전횡이 심해지자, 3사는 연산군에 대한 간쟁의 수위를 높여 갔고, 대신들 또한 연산군의 실정에 대해 논하며 시정을 요구했다.

결국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행위와 폐비 윤씨 사건의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1504년).

 

① 유자광의 고변으로 남이가 처형되었다.

조선 예종 시기 남이의 옥에 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기사환국으로 송시열이 죽임을 당하였다.

조선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적장자로 인정하여 원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서인을 대거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남인이 주도권을 가졌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송시열이 사형을 당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외척 간의 권력 다툼으로 윤임이 제거되었다.

조선 명종 때 외척끼리의 권력 다툼으로 윤임이 제거되고 사림 세력 역시 정계에서 밀려났다. 이를 을사사화(1545년)이라고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위훈 삭제를 주장한 조광조 일파가 축출되었다.

연산군의 뒤를 이어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훈구 재상들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면서 대립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1519년). 이를 기묘사화라고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어 김일손 등이 피해를 입었다.

조선 연산군 때 발생한 무오사화(1498년)는 조선에서 발생한 첫 번째 사화로, 김일손의 사초에 불손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

김일손의 사초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한 일이었는데,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를 조선 단종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사림의 성장과
사화
  • 사림의 등장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사림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데 비해,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 사림의 계보

 

  • 사림의 성장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이조 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 사화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대립으로 사화가 발생하였다.

 

    • 무오사화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무오사화(1498년)는 조선에서 발생한 첫 번째 사화로, 김일손의 사초에 불손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

김일손의 사초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한 일이었는데,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를 조선 단종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사화

‘사림의 화’의 준말. 관리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 몰려 참혹한 화를 입었던 일을 말한다.

 

  • 갑자사화

연산군의 전횡이 심해지자, 3사는 연산군에 대한 간쟁의 수위를 높여 갔고, 대신들 또한 연산군의 실정에 대해 논하며 시정을 요구했다.

결국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행위와 폐비 윤씨 사건의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1504년).

 

  • 기묘사화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청렴함과 원리 원칙에 충실한 태도는 남곤⋅심정 등으로 대표되는 훈구 재상들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면서 대립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1519년).

조광조의 개혁 정치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 을사사화

중종이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 다툼에 윤임이 제거당하고, 사림 세력 역시 정계에서 밀려났다(1545년).

조선 후기
붕당 정치와
탕평론의 대두
조선 숙종
탕평론의 대두 –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경신환국(1680년) – 숙종 초 정권을 장악한 남인을 견제하고자 했던 숙종은 남인의 역모 사건 등을 계기로 남인을 처벌하고 서인으로 급격히 정권을 교체시켰다. 이를 경신환국이라 한다. 서인이 주도권을 가졌다. 경신환국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기사환국(1689년) –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적장자로 인정하여 원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서인을 대거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남인이 주도권을 가졌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송시열이 사형을 당했다.

갑술환국(1694년) – 숙종은 인현왕후를 다시 맞아들이고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을 교체시켰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서인(노론과 소론)이 주도권을 가졌다.

금위영 설치 – 숙종 때 국왕의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금위영을 창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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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제76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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