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6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23번 기출 해설

문제

23. (가)에 대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1점]

서울에 있는 간사한 무리가 경주인(京主人)이라고 하며 각 도의 공물을 방납하면서 그 값을 두 배에서 수십 배까지 징수하였다. …… 영의정 김육이 (가)을/를 충청도에서 먼저 시험할 것을 청하였다. 왕이 여러 차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서로 엇갈렸다. 이때에 왕이 다시 김육 등 여러 신하들을 불러 그것이 편리한지 여부에 대한 의견들을 듣고 비로소 호서(湖西)에 먼저 행하기로 정하였다.

① 전시과에서 전지 지급 기준의 변화를 찾아본다.

②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포를 거둔 목적을 알아본다.

③ 과전 지급 대상을 현직 관리로 제한한 까닭을 검색한다.

④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 부담액을 고정한 이유를 분석한다.

⑤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한 배경을 조사한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부의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자,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방납의 폐단을 시정하여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개혁론이 제기되어 광해군 때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징수하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

 

① 전시과에서 전지 지급 기준의 변화를 찾아본다.

전시과는 고려의 토지 제도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포를 거둔 목적을 알아본다.

조선 영조 때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균역법이 시행되었다.

이로 인해 기존에 농민이 부담하던 군포는 2필에서 1필로 감소하였다.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결작, 산무군관포 등으로 보충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과전 지급 대상을 현직 관리로 제한한 까닭을 검색한다.

조선 건국과 함께 과전법이라고 하는 토지 제도가 시행되었다.

그런데 과전법에 의해 토지가 세습되자, 새로 관직에 나간 관리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선 세조 때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는 직전법으로 바뀌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 부담액을 고정한 이유를 분석한다.

조선 인조 때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6두로 고정시켰다. 이를 영정법이라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이 등장한 배경을 조사한다.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조선 후기
수취 체제의 개편
  • 배경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농촌 사회는 심각하게 파괴되었다. 수많은 농민이 전란 중에 사망하거나 피난을 가고 경작지는 황폐화되었다. 게다가 굶주림과 질병까지 널리 퍼져서 농촌 생활의 어려움은 극에 달하였지만, 농민의 조세 부담은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국가는 수취 체제를 개편하여 농촌 사회를 안정시키고 재정 기반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것은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의 개편으로 나타났다.

 

  • 전세 제도 개편

양 난 이후 조선 정부의 가장 큰 어려움은 농경지의 황폐와 전세 제도의 문란이었다. 이에 정부는 개간을 권장하면서 서둘러 경작지를 확충하고자 하였다. 또, 전세를 확보하기 위하여 토지 조사 사업도 서둘렀다. 이것은 토지 대장인 양안에서 빠진 토지를 찾아 내어 전세의 수입원을 증대시키려는 의도에서 시행되었다.

하지만 이런 정책으로는 농민의 삶을 향상시킬 수 없었다. 농민은 자신들의 고통을 줄여 주는 정책을 기대하였다.

 

    • 영정법 실시

인조 때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6두로 고정시켰다. 이를 영정법이라 한다(1635년).

 

  • 공납 제도 개편

당시 농민에게 가장 큰 부담을 주던 것은 공납이었다. 특히, 방납의 폐해가 나타나면서 농민의 부담은 더욱 커져 갔다. 부담을 견디지 못한 농민은 농토를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 대동법 실시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정부의 재정 상태가 더욱 악화되어 가자,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완하고 농민의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한 개혁론이 제기되어 광해군 때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대동법은 집집마다 부과하여 토산물을 징수하던 공물 납부 방식을 토지의 결수에 따라 쌀, 삼베나 무명, 동전 등으로 납부하게 하는 제도였다.

농민은 대체로 토지 1결당 미곡 12두만 납부하면 되었다. 이 때문에 토지가 없거나 적은 농민에게 과중하게 부과되던 공물 부담은 없어지거나 어느 정도 경감되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대동법이 실시된 뒤에도 왕실에 상납하는 진상이나 별공을 여전히 부담하였고, 지방 관청에서도 필요에 따라 수시로 특산물을 징수하였다.

    • 공인 등장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인이라는 어용 상인이 나타났다. 이들은 관청에서 공가를 미리 받아 필요한 물품을 사서 납부하였다. 공인이 시장에서 많은 물품을 구매하였으므로 상품 수요가 증가하였다.

    • 상품 화폐 경제 발전

이와 같이 물품의 수요와 공급이 증가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가 한층 발전하였다.

 

  • 군역 제도 개편

양 난 이후 5군영의 성립으로 모병제가 제도화되자, 군영의 경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포를 내는 것으로 군역을 대신하는 수포군이 점차 증가하였다.

그러나 5군영은 물론, 지방의 감영이나 병영까지도 독자적으로 군포를 징수하면서 장정 한 명에게 이중 삼중으로 군포를 부담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이 바치는 군포의 양도 소속에 따라 2필 또는 3필 등으로 달랐다.

    • 군포 부담 증가

임진왜란 이후 납속이나 공명첩으로 양반이 되어 면역하는 자가 늘어나면서 군역의 재원은 점차 줄어드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국의 장정 수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여, 재정 상태가 어려워지자 군포의 부과량을 점차 늘릴 수밖에 없었다.

군역의 부담이 과중해지자, 농민은 도망가거나 노비나 양반으로 신분을 바꾸어 군역을 피하는 경향이 더욱 심해졌다.

납속(納粟)

부족한 재정 보충 및 빈민구제를 목적으로, 돈이나 곡물을 납부한 사람에게 특혜를 준 정책. 면천, 면역은 물론 관직을 주는 경우도 있었다.

공명첩(空名帖)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

    • 균역법 실시

이에 군역의 폐단을 시정하려는 개혁 방안이 논의되고, 마침내 영조 때 균역법이 시행되었다(1750년). 이로부터 농민은 1년에 군포 1필만 부담하면 되었다.

    • 결작

균역법의 시행으로 감소된 재정은 지주에게 결작이라고 하여 토지 1결당 미곡 2두를 부담시켰다.

    • 선무군관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이라는 칭호를 주고 군포 1필을 납부하게 하였으며, 어장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으로 보충하게 하였다.

    • 균역법의 폐해

토지에 부과되는 결작의 부담이 소작 농민에게 돌아가고, 군적 문란이 심해지면서 농민의 부담은 다시 가중되었다.

 

  • 요약
전세 제도 공납 제도 군역 제도
영정법 대동법 균역법
토지 1결당 미곡 4~6두 토지 1결당 미곡 12두 농민 – 1년 군포 1필

지주 및 상류층

결작 – 토지 1결당 미곡 2두

선무군관 – 군포 1필, 어장세, 선박세

고려
전시과 제도와
토지 소유
  • 역분전

태조 때에 역분전을 나누어 주었는데, 이것은 후삼국 통일 과정에서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준 토지였다.

  • 시정 전시과

시정 전시과 제도는 경종 때에 공복 제도와 역분전 제도를 토대로 만들어졌다. 관직의 높고 낮음과 함께 인품을 반영하여 토지를 지급하였다.

  • 개정 전시과

목종 때 기존 전시과를 개정하여 관직만을 고려하여 지급하는 기준을 마련하고 지급량도 재조정하였다.

  • 경정 전시과

관료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자 문종 때에 현직 관료에게만 주도록 다시 조정하였다.

  • 내용

문무 관리로부터 군인, 한인에 이르기까지 18등급으로 나누어 곡물을 수취할 수 있는 전지와 땔감을 얻을 수 있는 시지를 주었다.

  • 수조권만 지급

지급된 토지는 소유권이 아닌 수조권만 가지는 토지였다.

  • 반납

관직 복무와 직역에 대한 대가로 지급되었으므로 토지를 받은 자가 죽거나 관직에서 물러날 때에는 토지를 국가에 반납하도록 하였다.

  • 기타
    • 공음전

문벌 귀족의 세습적인 경제적 기반이 되었던 것은 공음전이었다. 공음전은 5품 이상의 관료가 되어야 받을 수 있는데, 자손에게 세습할 수 있었다. 이는 음서제와 함께 귀족의 지위를 유지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이었다.

    • 한인전

한인전은 6품 이하 하급 관료의 자제로서 관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에게 지급한 토지인데, 이것은 관인 신분의 세습을 위한 것이다.

    • 군인전

군인전은 군역의 대가로 주는 토지로, 군역이 세습됨에 따라 자손에게 세습되었다.

    • 구분전

하급 관료와 군인의 유가족에게는 구분전을 지급하여 생활 대책을 마련해 주었다.

    • 녹과전

점차 귀족들이 토지를 독점하여 세습하는 경향이 커지면서 전시과 제도가 원칙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 민전

민전은 매매, 상속, 기증, 임대 등이 가능한 사유지로서, 귀족이나 일반 농민의 상속, 매매, 개간을 통하여 형성되었다.

조선
과전법
  • 과전법

과전법은 공양왕 3년(1391년)에 실시된 토지 제도로, 조선 시대의 기본적인 토지 제도가 되었다.

과전법은 국가의 재정 기반과 조선의 건국에 참여한 신진 사대부 세력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과전은 받은 사람이 죽거나 반역을 하면 국가에 반환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러나 죽은 관료의 가족들이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받았던 토지 중 일부를 수신전, 휼양전 등으로 다시 지급하여 세습이 가능하였고, 공신전도 세습할 수 있었다.

수조권을 받은 자는 스스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10분의 1을 농민에게 세금으로 거두었다.

과전법에서는 과전의 지급을 경기도에 있는 토지로 한정하였다.

과전(科田)

관리에게 준 토지로 소유권이 아니라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 직전법

과전법에 의해 토지가 세습되자, 새로 관직에 나간 관리에게 줄 토지가 부족하게 되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려고 세조 12년(1466년) 직전법으로 바꾸어 현직 관리에게만 수조권을 지급하였다.

  • 관수관급제

수조권을 받은 자는 스스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과전법의 경우에는 10분의 1을 농민에게 세금으로 거두었다.

이 과정에서 수조권을 가진 양반 관료가 이를 남용하여 과다하게 수취하는 일이 잦았다.

이를 시정하기 위하여 성종 1(1470년) 때 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거두고, 관리에게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 직전법 폐지

1556년 직전법이 폐지되어 수조권 지급 제도가 없어졌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5년 제76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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