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33.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옳은 것은? [3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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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 계획서 • 주제: 동학 농민군의 발자취를 따라서 • 기간: 2024년 OO월 OO일 ~ OO일 • 답사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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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농민군이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②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되었다.
③ 홍계훈의 관군을 상대로 농민군이 승리하였다.
④ 피신해 있던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이 체포되었다.
⑤ 농민들이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① 농민군이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동학 농민군이 전주성을 점령한 후, 조선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은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주 화약이라고 한다(1894년 6월).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되었다.
1864년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하게 생각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홍계훈의 관군을 상대로 농민군이 승리하였다.
백산 봉기 후 동학 농민군이 홍계훈이 지휘하는 관군을 격파했다.
이후 농민군은 전주성을 점령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피신해 있던 농민군의 지도자 전봉준이 체포되었다.
1894년 11월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 농민군은 크게 패배했다.
이후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농민들이 조병갑의 탐학에 맞서 만석보를 파괴하였다.
1894년 1월 고부 군수 조병갑 횡포와 착취에 농민들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봉기하였다. 이를 고부 농민 봉기라고 한다.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풀어 주고, 창고의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 동학 농민 운동과 청일 전쟁 |
개항 이후 개화 정책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당시 농촌 사회는 정치적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그리고 외세의 침투에 대한 반발 등으로 인하여 현실에 대한 불만이 높아져 가고 있었다. 청일 상인에 의해 영국산 면직물이 싼값에 들어오면서 면포를 짜서 팔던 농민들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또한 일본으로의 곡물 수출이 늘어 곡물 가격이 오르자 일본에 대한 농민들의 반감이 커졌다. 개화 정책으로 늘어난 정부의 재정 지출은 농민의 세금 부담으로 이어졌다 정치⋅사회적 의식이 급성장한 농촌 지식인과 농민의 사회 변혁 욕구도 높아졌다.
이 무렵, 동학의 교세는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확대되어 갔다. 동학의 인간 평등 사상과 사회 개혁 사상은 새로운 사회로의 변화를 갈망하는 농민의 요구에 부합되었고, 동학의 포접제 조직은 대규모 농민 세력의 규합을 가능하게 하였다.
동학의 교세가 빠르게 확산되자 지방관들은 동학을 탄압하였고 농민들에게 동학 교도의 누명을 씌워 탄압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 동학교도들은 1892년부터 충청도 공주, 전라도 삼례, 한성 등에서 교조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고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하였다.
동학교도들은 전라도 삼례에서 집회를 가지고, 동학에 대한 박해를 중지할 것과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 줄 것을 요구하였다.
동학의 지도급 인사 40여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소를 하였다.
충청도 보은에서는 동학 교도와 농민 2만여 명이 모여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보은 집회에서 탐관 오리의 숙청, 일본과 서양 세력의 축출을 요구하는 정치적 구호를 내세우다가, 마침내 동학 중심의 종교 운동을 농민 중심의 정치 운동으로 전환시켜 갔다.
농촌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가운데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횡포와 착취를 저지르며 농민들을 수탈했다. 농민들은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여 봉기하였다.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려 세력을 모았다. 농민들은 고부 관아를 습격하여 억울하게 옥살이하던 사람들을 풀어 주고, 창고의 곡식을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수탈의 상징인 만석보를 허물었다. 이에 정부가 새로운 군수를 임명하자 농민들은 군수의 다짐을 받고 10여 일 만에 해산하였다.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봉기에 참여한 농민들을 동학교도라는 죄목으로 잡아들이고 탄압하자 농민들의 분노가 다시 거세졌다. 전봉준은 손화중과 함께 전라도 각지에서 농민군을 모아 무장에서 대규모로 봉기하였다.
이들은 고부를 점령하고 나서 백산에서 농민군을 조직하였다. 그리고 ‘폭정을 없애고 백성을 구한다’라는 뜻의 제폭구민(除暴救民), ‘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히 한다’라는 뜻의 보국안민(輔國安民) 등의 구호를 담은 격문을 전국에 보내 백성의 동참을 호소하였고, 4대 강령을 발표했다.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은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냈다. 전주성을 점령한 농민군은 외세가 개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둘러 정부와 화약을 맺었다. 이를 전주 화약이라고 한다.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 개혁 12개조를 건의하고, 전라도 각지에 집강소를 설치하여 개혁을 실천해 나갔다.
청이 조선에 파병하게 되자, 일본도 톈진 조약을 구실로 조선에 군대를 보내어 마침내 청⋅일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조선 정부는 청⋅일 양국에 철병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무시하고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간섭을 하였다(군국기무처 설치).
일본군이 청일 전쟁을 일으키면서 내정 간섭하자, 농민군은 다시 봉기하여 외세를 몰아 내기 위하여 서울로 진격하였다.
남접 농민군과 북접 농민군은 논산에 집결하였다가 공주의 우금치에서 관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벌였으나, 근대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패하여 큰 희생을 치렀다. 결국 전봉준 등 지도자들이 체포됨으로써 동학 농민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전쟁에서 패한 청은 일본과 시모노세키 조약을 체결하였다(1895년). 청은 일본에게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할양하고 배상금을 지불하기로 하였다.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의 랴오둥반도 점유가 동아시아 평화를 위협한다고 일본을 압박하였다. 그 결과 일본은 청에게 할양 받은 랴오둥 반도를 청에 돌려주는 대신 보상금을 받았다.
동학 농민 운동은 농민층이 봉건적 지배 체제에 반대하여 노비 문서의 소각, 토지의 평균 분작 등 개혁 정치를 요구하고, 외세의 침략을 자주적으로 물리치려 했다는 점에서 아래로부터의 반봉건적, 반침략적 민족 운동이었다. 이들의 요구는 갑오개혁에 부분적으로 반영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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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동학의 발생 |
동학은 1860년에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가 처한 여러 사회 상황이 반영되었다. 교리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고, 주문과 부적 등 민간 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또,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 내자는 주장을 폈다.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인내천 사상, 현세 구복 사상, 후천 개벽 사상, 보국 안민 사상 등이 동학의 중심 사상이다.
동학의 경전으로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있다.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하게 생각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1864년). 그 뒤를 이은 최시형은 교세를 확대하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다. |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72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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