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42. ㉠~㉤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2점]
| 단재 신채호 연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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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 –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② ㉡ – 이륭양행에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 연락을 취하였다.
③ ㉢ – 의열단이 활동 지침으로 삼았다.
④ ㉣ –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하였다.
⑤ ㉤ –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이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① ㉠ – 광주 학생 항일 운동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였다.
신민회가 아니라 신간회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 – 이륭양행에 교통국을 설치하여 국내와 연락을 취하였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 – 의열단이 활동 지침으로 삼았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 –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하였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 –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곳이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①번이다.
| 애국 계몽 운동 |
보안회는 토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독립 협회에 영향을 받은 헌정 연구회는 국민의 정치 의식 고취와 입헌 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대한 자강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15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나,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자, 격렬한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강제로 해체되었다.
대한 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민권의 신장, 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지배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대한 협회의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신민회는 1907년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안창호, 양기탁 등을 지도부로 하였다.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표면적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적 실력 양성을 기도하였다.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신민회는 평양과 서울에 설립된 태극 서관에서 계몽 서적을 출판하였다. 또한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워 민족 산업의 육성에도 힘썼다.
만주에 독립군 기지(삼원보)를 건설하고,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기르는 데 힘을 기울였다.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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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0 만세 운동을 계기로 학생 운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학생들은 독서회 등 각종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으며 동맹 휴학 등 저항 운동을 벌였다. 학생들은 한국인 중심 교육 제도 확립, 식민지 교육 및 한·일 학생 사이의 차별 철폐 등을 요구하였다.
1929년 10월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하여 발생한 한국인 학생과 일본인 학생 간의 충돌로 시작되었다.
경찰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자, 광주 지역의 성진회와 각 학교 독서회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광주에서 시작된 항일 학생 운동은 목포와 나주로 확산되었으며, 12월에는 서울 지역까지 확대되었다. 학생들은 ‘식민지 교육 철폐’, ‘일본 제국주의 타도’, ‘민족 해방’을 주장하였으며, 1930년 3월까지 전국에서 시위와 동맹 휴학을 지속하였다.
신간회는 광주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지원하였으며 전국적인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3·1 운동 이후 학생들의 주도로 이루어진 최대 규모의 항일 민족 운동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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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 후 독립 운동을 체계적으로 조직할 지도부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여러 지역에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연해주에서는 대한 국민 의회가 조직되었다. 대통령 손병희, 국무총리 이승만 선임. 서울에서는 13도 대표가 모여 한성 정부가 수립되었다. 집정관 총재 이승만, 국무 총리 이동휘 선임. 상하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임시 의정원 구성, 국무총리 이승만 선임.
정부 통합 운동은 민족 지도자들에 의하여 성사되었다. 국내에서 수립된 한성 정부를 계승하고, 대한 국민 의회를 흡수하여 상하이에 통합 정부인 대한 민국 임시 정부를 수립하였다(1919년 9월).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각지의 임시 정부를 통합한 후, 민주주의에 입각한 근대적 헌법을 갖추고,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추대하였다. 헌정 체제를 입법 기관인 임시 의정원, 사법 기관인 법원, 행정 기관인 국무원으로 구성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3권 분립에 입각한 민주 공화제 정부로 출범하였다.
임시 정부의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은 국내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 조직망이었다. 연통제는 임시 정부의 지방 행정 기관으로 국내의 각 도, 군, 면에 독판, 군감, 면감을 두어 정부 문서와 명령 전달, 군자금의 송부, 정보 보고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교통국은 통신 기관으로 정보의 수집, 분석, 교환, 연락의 업무를 관장하였다.
임시 정부 활동에는 막대한 독립운동 자금이 필요하였다. 임시 정부는 이 자금을 독립 공채의 발행이나 국민의 의연금으로 마련하였다. 국내외에서 수합된 자금은 연통제나 교통국의 조직망에 의해 임시 정부에 전달되었으며, 또 만주의 이륭 양행이나 부산의 백산 상회를 통하여 전달되기도 하였다.
임시 정부는 파리 강화 회의에 김규식을 대표로 파견하여 독립을 주장하였다. 또한 미국에 구미 위원부를 두어 이승만을 중심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독립 문제를 국제 여론화하는 데 노력하였다.
임시 정부는 정부 조직에 군무부를 설치하여 군사 업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 군무부 아래에는 광복군 사령부와 광복군 총영 등을 두었으며, 이후 육군 주만 참의부(1924년)를 편성하여 무장 투쟁을 펼쳤다.
임시 정부는 기관지로 독립신문을 간행하여 배포하였으며, 사료 편찬소를 두어 한⋅일 관계 사료집을 간행하였다.
1920년대 초 일제의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 조직이 발각되어 자금 사정은 어려워졌다. 또한 임시 정부 내에서 독립운동 노선을 둘러싼 갈등이 계속되었다. 더욱이 외교 활동은 강대국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얻지 못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승만의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사건을 계기로 신채호, 박용만 등의 무장 투쟁론자들은 이를 문제 삼아 임시 정부의 개편을 요구하였다. 이어 여러 민족 운동가는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는 임시 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수립하자는 창조파와 임시 정부의 조직만 바꾸자는 개조파의 대립으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국민 대표 회의가 결렬되자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임시 정부를 떠났다.
1925년 임시 의정원에서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곧이어 헌법을 고쳐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바꾸고 일종의 집단 지도 체제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이동녕과 김구 등을 중심으로 체제를 재정비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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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년 11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은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의열단원들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의열단은 일제의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5파괴, 7가살)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박재혁 – 1920년 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익상 –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 –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지섭 – 1924년 일본 도쿄 궁성 폭탄 투척 나석주 –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 투척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의열단원들은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관내 대부분의 민족 운동 단체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 결성(1935년)을 주도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 대표 회의 이후 침체를 겪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졌다. 김구는 1931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중국 상하이를 침략하였다(상하이 사변).
1932년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일제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이때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요 장성과 고관들을 처단하였다.
한국 애국단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크게 호전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광복군이 조직되는 토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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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다.
1925년 조선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주의 사관을 토대로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발전 주체가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 정신을 혼(魂)으로 파악하여, 혼이 담겨 있는 민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를 지어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독사신론을 저술하였다. 신채호는 낭가 사상을 강조하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 사학은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으로 계승되었고, 이들은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인보는 ‘얼’ 사상을 강조하였다. 문일평은 ‘조선심’을 강조했다.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기를 맞아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실증 사학자들은 문헌 고증으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역사가의 주관적인 판단 없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이병도 등은 1934년 진단 학회를 조직하고 진단 학보를 발간하였다.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 사학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유물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다.
손진태는 조선민족사개론을 저술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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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항일 의병 운동 |
명성 황후 시해로 분노한 국민들의 반일 감정이 단발령을 계기로 폭발하여 을미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다. 유인석, 이소응, 허위 등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유생이 주도하였다. 이소응 부대는 춘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고, 유인석 부대는 제천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다.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의 해산을 권유하자, 의병들은 대부분 활동을 중단하였다.
을미의병의 활동 후, 1900년을 즈음하여 해산된 농민들의 일부가 활빈당을 조직하여 반봉건⋅반침략 운동을 계속 전개하였다. 활빈당은 양반·부호, 관청, 장시 등을 습격하여 무기와 재물을 약탈하고, 그 중에서 일부를 빈민에게 분배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과 행상, 유민, 노동자, 걸인 등으로 조직되었다.
을사늑약이 체결된 이후, 대규모의 의병 부대가 여러 곳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하였다. 민종식, 최익현 등 양반 출신 의병장을 비롯하여, 평민 출신 의병장인 신돌석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최익현은 태인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장으로 국내외에서 항일전을 전개하고 있던 안중근은, 우리나라 침략에 앞장섰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 대표와 회담하기 위하여 하얼빈에 도착했을 때, 그를 사살하여 민족의 독립 의지를 분명히 보여 주었다(1909년). 안중근은 뤼순 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였다. 또한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당했다.
이재명은 명동 성당 앞에서 을사 5적 중 한 명인 이완용을 칼로 찔러 부상을 입혔다.
고종 황제를 호위하는 임무를 맡고 있던 민영환은 동포에게 전하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하였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제목으로 논설을 실어 일본의 침략을 비난하였으며, 조약 체결에 앞장선 친일 대신들을 격렬하게 비판하였다.
나철, 오기호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 5적의 집을 불사르고 일진회를 습격하는 등 매국노를 처단하고자 하였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는 1908년 전명운, 장인환이 일본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주장한 미국인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의병 운동은 그 규모와 성격면에서 의병 전쟁으로 발전되어 갔다. 이 때의 의병을 정미의병이라고 한다.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이 결정되자 시위대 제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였고, 해산된 군인들이 일본군과 서울 시가전을 전개하면서 대일 항전을 개시하였다. 그 뒤 각 지방의 해산 군인들도 잇달아 봉기하였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 부대에 합류하면서 의병 부대는 보다 조직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고, 근대적인 무기를 갖추어 전투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정미의병 이후, 각지에서 의병 부대가 일본군과의 전투를 계속하는 과정에서 서울에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한다는 주장이 일어나, 의병장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하는 13도 창의군을 편성하였다. 이 때, 의병은 서울 주재 각국 영사관에 의병을 국제법상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발송하여, 스스로 독립군임을 내세웠다. 그 중 300명의 선발대는 서울 진공 작전을 펼쳤으나, 일본군의 선제 공격을 받아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처럼 활발하게 전개되던 의병 투쟁은 그 후 일본군의 남한 대토벌 작전을 계기로 크게 위축되었다. 일부 의병 부대는 국권을 빼앗긴 후에 만주나 연해주로 이동하여 독립군으로 활동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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