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
31. 밑줄 그은 ‘사건’ 이후에 전개된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 조선왕 전하께
…… 9월 말에 평양의 대동강에서 좌초한 미국 상선에 승선한 사람들이 살해당했고 배가 불살라졌다는 고통스럽고 놀랄 만한 사건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본 총병은 본국 수사제독의 위임으로 파견되어 상세히 조사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과연 이러한 일이 있었는지, 사실인지 아닌지, 생존자가 몇 사람인지 등을 귀국에서 신속히 조사해 분명히 답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미국 군함 와추세트(Wachusett) 수사총병 슈펠트(Shufeldt) – |
①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다.
②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③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④ 어재연이 광성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⑤ 청의 요청으로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866년 대포로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들어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미국 선원들은 횡포를 부렸고, 이에 분노한 평양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침몰시켰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군함과 병력을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였다(신미양요, 1871년).
① 홍경래가 난을 일으켰다.
1811년 홍경래의 난이 발생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1862년 임술 농민 봉기가 일어났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황사영 백서 사건이 발생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박해 소식과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을 알리기 위해 중국 북경 교구장 구베아에게 보내려고 했던 밀서가 발각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어재연이 광성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1871년 신미양요 때 어재연이 광성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청의 요청으로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다.
조선 효종 시기 나선 정벌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신미양요 |
1866년 대포로 무장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까지 들어와 조선에 통상을 요구하였다. 미국 선원들은 횡포를 부렸고, 이에 분노한 평양 관민이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워 침몰시켰다(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군함과 병력을 동원하여 강화도를 공격하였다(신미양요, 1871년).
로저스 제독이 이끄는 미국의 함대는 초지진과 덕진진을 점령하고 광성보를 공격하였다. 어재연 등이 이끄는 조선의 수비대가 격렬하게 항전하였으나 광성보는 함락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선 대원군이 통상 수교 협상에 응하지 않자 미군은 퇴각하였다. |
|
| 조선 후기 홍경래의 난 |
19세기의 세도 정치하에서 국가 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 탐관오리의 부정과 탐학은 끝이 없었다. 삼정의 문란으로 극도에 달한 수령의 부정은 중앙 권력과도 연계되어 있어 암행어사의 파견만으로 막을 수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농촌 사회가 피폐하여 가는 가운데 농민의 사회 의식은 오히려 더욱 강해져 갔다.
홍경래의 난은 세도 정권의 수탈에 시달리던 농민들과 부당한 차별 대우에 불만을 품어 오던 평안도 지방 사람들을 중심으로 하여, 몰락한 양반인 홍경래의 지휘하에 영세 농민, 중소 상인, 광산 노동자 등이 합세하여 일으킨 봉기였다.
이들은 처음 가산에서 난을 일으켜 선천, 정주 등을 별다른 저항없이 점거하였다. 한때는 청천강 이북 지역을 거의 장악하였으나, 정주성 싸움에서 패하여 5개월 만에 평정되었다.
홍경래의 난은 평안도의 농민이 하나로 뭉쳐 탐관오리의 착취와 지방 차별에 반대한 농민 항쟁이었다. 이 난은 평안도 지역에 한정되어 일어났고, 지도자들이 농민층을 조직적으로 끌어들일 개혁안을 내놓지 못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정부에 큰 타격을 주었으며, 그 뒤에 발생한 임술 농민 봉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렇지만 관리들의 부정과 탐학은 시정되지 않았다. |
|
| 임술 농민 봉기 | 홍경래의 난은 실패로 끝났으나 그 영향은 의외로 커서, 이후 전국 각지에서 크고 작은 농민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철종 때에 진주에서 일어난 임술 농민 봉기(1862년)는 삼정의 문란과 경상 우병사 백낙신의 수탈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이 몰락한 양반 출신인 유계춘 등을 중심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임술 농민 봉기는 진주를 중심으로 확산되었는데, 농민들은 탐관오리와 토호의 탐학에 저항하여 한때 진주성을 점령하기도 하였다. 대규모의 농민 봉기에 당황한 세도 정권은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비리를 조사하였으며, 안핵사 박규수를 파견하여 주동자를 처벌하도록 하였다.
삼정의 문란을 해결하기 위한 기구로 삼정이정청을 설치하여 개혁 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정책은 삼정 문란의 원인을 운영상의 문제로만 파악하여 농민 봉기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
|
| 조선 후기 천주교의 전파 |
천주교는 17세기에 중국 베이징의 천주당을 방문한 우리 나라 사신들에 의하여 서학으로 소개되었다.
천주교가 신앙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18세기 후반이었다. 당시 정치와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고심하던 남인 계열의 일부 실학자들이 천주교 서적을 읽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되었다.
원래 마테오 리치가 한문으로 지었으나, 모든 사람이 이해하기 쉽도록 18세기에 한글로 옮겼다.
이승훈이 베이징에서 서양인 신부에게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이후로 신앙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다.
점차 교세가 확장되고 천주교가 조상에 대한 유교의 제사 의식을 거부하자,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 부정과 국왕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 사교로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천주교의 교세가 커진 것은 세도 정치로 말미암은 사회 불안과 어려운 현실에 대한 불만, 그리고 신 앞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논리, 내세 신앙 등의 교리가 일부 백성에게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정조 때인 1791년 윤지충 등이 조상의 신주를 불태웠고, 이를 계기로 이들을 처형하였다.
순조가 즉위하여 노론 벽파가 집권하자, 천주교에 대탄압이 가해졌다. 1801년 이승훈, 정약종 등 3백여 명이 처형되었다. 정약용은 유배되었다.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인 황사영이 박해 소식과 이에 대한 대응 방법을 알리기 위해 중국 북경 교구장 구베아에게 보내려고 했던 밀서가 발각되어 천주교에 대한 탄압이 심해졌다. |
|
|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용골산성)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72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 제72회 한능검 심화 1번 해설 – 청동기 시대
- 제72회 한능검 심화 2번 해설 – 고조선
- 제72회 한능검 심화 3번 해설 – 근초고왕, 진흥왕
- 제72회 한능검 심화 4번 해설 – 백제 한성 웅진 사비
- 제72회 한능검 심화 5번 해설 – 고구려
- 제72회 한능검 심화 6번 해설 – 통일 신라 경제
- 제72회 한능검 심화 7번 해설 – 발해
- 제72회 한능검 심화 8번 해설 – 통일 신라 말
- 제72회 한능검 심화 9번 해설 – 견훤
- 제72회 한능검 심화 10번 해설 – 신라 석탑
- 제72회 한능검 심화 11번 해설 – 고려 성종
- 제72회 한능검 심화 12번 해설 – 거란의 침입
- 제72회 한능검 심화 13번 해설 – 고려 김부식
- 제72회 한능검 심화 14번 해설 – 고려 무신 정권
- 제72회 한능검 심화 15번 해설 – 고려 공민왕
- 제72회 한능검 심화 16번 해설 – 고려 경제
- 제72회 한능검 심화 17번 해설 – 고려 석탑
- 제72회 한능검 심화 18번 해설 – 조선 태종
- 제72회 한능검 심화 19번 해설 – 집현전
- 제72회 한능검 심화 20번 해설 – 조선 성종
- 제72회 한능검 심화 21번 해설 – 을사사화
- 제72회 한능검 심화 22번 해설 – 조선 통신사
- 제72회 한능검 심화 23번 해설 – 강희안
- 제72회 한능검 심화 24번 해설 – 병자호란
- 제72회 한능검 심화 25번 해설 – 대동법
- 제72회 한능검 심화 26번 해설 – 송시열
- 제72회 한능검 심화 27번 해설 – 조선 후기 경제
- 제72회 한능검 심화 28번 해설 – 조선 정조
- 제72회 한능검 심화 29번 해설 – 근대 언론 기관
- 제72회 한능검 심화 30번 해설 – 일본과의 조약
- 제72회 한능검 심화 31번 해설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제72회 한능검 심화 32번 해설 – 제2차 갑오개혁
- 제72회 한능검 심화 33번 해설 – 동학 농민 운동
- 제72회 한능검 심화 34번 해설 – 정미의병
- 제72회 한능검 심화 35번 해설 – 광무개혁
- 제72회 한능검 심화 36번 해설 – 3.1 운동
- 제72회 한능검 심화 37번 해설 – 북로 군정서
- 제72회 한능검 심화 38번 해설 – 국외 이주 동포
- 제72회 한능검 심화 39번 해설 – 심훈
- 제72회 한능검 심화 40번 해설 – 일제 강점기 도시
- 제72회 한능검 심화 41번 해설 – 일제 민족 말살 통치
- 제72회 한능검 심화 42번 해설 – 신채호
- 제72회 한능검 심화 43번 해설 – 제주 4.3 사건
- 제72회 한능검 심화 44번 해설 – 이승만 정부
- 제72회 한능검 심화 45번 해설 – 유신 헌법
- 제72회 한능검 심화 46번 해설 – 6월 민주 항쟁
- 제72회 한능검 심화 47번 48번 해설 – 토지제도
- 제72회 한능검 심화 49번 해설 – 전두환 정부
- 제72회 한능검 심화 50번 해설 – 지역 역사
- 제72회 한능검 심화 1번~50번 전체 해설
한국사 시험 모음
- 연표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심화 1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3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2점 문제
-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기본 1점 문제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고급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중급
- (구) 한국사능력검정시험(한능검) 초급
- 한국사 공무원 시험
- 한국사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연표
- 선사 ~ 고조선 역사 연표
- 삼국 시대 역사 연표
- 통일 신라 발해 남북국 시대 역사 연표
- 후삼국·고려 시대 역사 연표
- 조선 전기 역사 연표
- 조선 후기 역사 연표
- 근대 개항 및 국권 피탈 역사 연표
- 일제 강점기 역사 연표
- 현대사 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