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회 한능검 기본 13번 해설 – 고려 현종

13번 문제

13. 밑줄 그은 ‘왕’의 재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3점]

○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새로운 을 옹립하였다.

○ 거란이 서경을 공격하여 아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이 나주로 피란하였다.

○ 강감찬이 거란을 물리치고 돌아오자, 이 몸소 영파역에 나아가 그를 맞이하였다.

① 교정도감이 설치되었다.

② 농사직설이 편찬되었다.

③ 초조대장경이 제작되었다.

④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고려 시대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시기코 현종을 옹립하였다.

거란이 서경을 공격하여 아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현종이 나주로 피란하였다.

강감찬이 귀주대첩에서 거란을 물리치고 돌아오자, 현종이 몸소 영파역에 나아가 그를 맞이하였다.

 

① 교정도감이 설치되었다.

무신 정권기이자 고려 희종 때 교정도감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농사직설이 편찬되었다.

조선 세종 때 농사직설이 편찬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초조대장경이 제작되었다.

고려 현종 때에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려고 대장경을 간행하였다.

70여 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목판에 새겨 간행한 이 초조대장경은 몽골 침입 때에 불타 버리고 인쇄본 일부가 남아 고려 인쇄술의 정수를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이자겸의 난이 발생하였다.

1126년 고려 인종 때 이자겸이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몰려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고려
거란의 침입
거란의 1차 침입 – 993년 고려 성종 때 거란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침략하여 고려가 차지하고 있는 옛 고구려 땅을 내놓고 송과 교류를 끊을 것을 요구. 서희의 담판 외교로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 확보

거란의 2차 침입 – 1010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목종을 폐하고 현종을 즉위시킨 강조의 정변을 트집잡아 다시 두 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 현종은 나주까지 몽진. 양규가 이끄는 고려군이 강화를 맺고 물러가는 거란군을 크게 격파

거란의 3차 침입 – 1018년 고려 현종 때 거란은 다시 10만의 대군으로 침입. 강감찬이 흥화진 전투에서 승리. 1019년 강감찬이 지휘한 고려군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전멸시킴(귀주대첩).

강감찬의 건의에 따라 개경에 나성을 쌓아 도성 수비를 강화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음

고려
무신정권기
  • 무신정변

1170년, 의종이 개경 부근의 보현원에서 놀이를 즐길 때를 이용하여 정중부, 이의방 등의 무신들이 정변을 일으킴

문신들을 제거하고 의종을 귀양 보낸 다음 명종을 세워 정권을 장악

무신 간 내분으로 정중부가 피살되고, 경대승, 이의민이 차례로 무신 정권의 최고 권력자가 됨.

중방 – 최고위 무신들로 구성된 회의 기구. 무신정변 직후부터 최충헌이 권력을 잡을 때까지 최고 권력 기구

무신 집권자의 변화: 이의방 → 정중부 → 경대승 → 이의민 → 최충헌

 

  • 최충헌

최씨 정권의 성립 – 1196년 최충헌은 이의민을 제거하고 최고 권력자가 되었고, 이후 4대 60여년간 최씨 정권이 지속됨

명종 때 봉사 10조와 같은 사회 개혁책을 제시

교정도감 – 희종 때 설치된 최씨 정권 최고 권력 기구

최고 집권자는 교정별감이 되어 국가의 중요한 정책을 결정

사병 기관인 도방을 설치하여 신변을 경호

도방은 삼별초와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

 

  • 최우

아버지인 최충헌의 뒤를 이어 교정도감을 통하여 정치 권력을 행사, 자기 집에 정방을 설치(1225년)하여 모든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장악

서방을 설치하여 유명 문신을 머무르게 하며 정권 운영의 고문을 담당

고려 고종은 최우의 건의를 받아들여 대몽 항쟁을 위해 강화 천도

삼별초 설치. 삼별초는 도방과 함께 최씨 정권을 유지하는 군사적 기반

 

  • 무신 정권 시기 봉기
    • 김보당의 난

1173년 동북면병마사로 있던 김보당 등 문신 계열이 동계에서 무신 정권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고려 의종의 복위를 추진했지만 실패하여 처형당했다.

    • 조위총의 난

1174년, 서경에서 조위총이 무신 정권에 대한 저항 운동을 일으킴. 이의민이 조위총의 난을 진압하여 상장군이 됨

    • 망이·망소이의 난

1176년, 공주 명학소에서는 무거운 조세 부담에 시달리던 주민들이 망이, 망소이 형제를 중심으로 봉기

    • 김사미·효심의 난

1193년, 경상도의 운문(청도)과 초전(울산)에서는 김사미와 효심이 저항 운동을 일으킴

    • 만적의 난

1198년, 개경에서 최충헌의 사노비인 만적이 중심이 되어 신분 해방 운동을 시도, 사전 발각 후 실패

조선 세종
  • 집현전 설치

집현전 학사는 학문 연구와 아울러 경연에 참여하여 국왕의 통치를 자문하였다. 이 기능은 뒤에 홍문관으로 이어졌다.

  • 의정부 서사제

6조에서 올라오는 모든 일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이 중심이 되는 의정부에서 논의한 다음, 합의된 사항을 국왕에게 올려 결재를 받는 형식이다.

  • 쓰시마섬 정벌

1419년 이종무는 병선 227척, 병사 1만 7000명을 이끌고 쓰시마 섬을 토벌하여 왜구의 근절을 약속받고 돌아왔다.

  • 4군 6진

세종 때 4군과 6진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오늘날과 같은 국경선을 확정하였다. 최윤덕이 4군을, 김종서가 6진을 개척했다.

  • 계해약조

3포 개항 이후 세종 25년(1443년)에 계해약조를 맺어 쓰시마 도주에게 세사미두 200석, 세견선 50척으로 허용해 주었다.

  • 훈민정음 창제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1443년)하여 반포하였다(1446년).

  • 지도·지리지

세종 때 전국 지도로서 팔도도를 만들었고, 지리지의 편찬도 추진되어 신찬팔도지리지가 편찬되었다.

  • 삼강행실도

세종 때 모범이 될 만한 충신, 효자, 열녀 등의 행적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붙여 윤리서인 삼강행실도를 편찬하였다.

  • 과학 

천체 관측기구로 혼천의(혼의)와 간의를 제작하고, 시간 측정 기구로 물시계인 자격루와 해시계인 앙부일구 등을 만들었다. 또한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만들어(1441년) 전국 각지의 강우량을 측정하였고, 토지 측량 기구인 인지의와 규형을 제작하여 토지 측량과 지도 제작에 활용하였다.

  • 칠정산

세종 때 만든 칠정산은 중국의 수시력과 아라비아의 회회력을 참고로 하여 만든 역법서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로 서울을 기준으로 천체 운동을 정확하게 계산했다.

  • 갑인자

세종 때 구리로 갑인자를 주조하였는데, 이는 글자 모습이 아름답고 인쇄에 편리하게 만들어졌다.

  • 총편등록

세종 때 화약 무기의 제작과 그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을 편찬하였다.

  • 농사직설

세종 때 정초 등이 편찬한 농사직설은 우리나라에서 편찬된 최초의 농서로서 중국의 농업 기술을 수용하면서 우리의 실정에 맞는 독자적인 농법을 정리하였다.

  • 의학

우리 풍토에 알맞은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향약집성방을 편찬하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간행하였다.

  • 부민고소금지법

하급 서리나 일반 백성들이 경외의 상급 관리들에 대해 고소를 금지하는 부민고소금지법을 시행하였다.

고려 현종
  • 전국을 5도와 양계, 경기로 크게 나누는 지방 행정 조직을 정비
  • 거란의 침입을 받았던 고려는 부처의 힘을 빌려 이를 물리치려고 초조대장경 간행
고려
이자겸의 난
  • 문벌 귀족 경원 이씨

11세기 이래 대표적인 문벌 귀족인 경원 이씨 가문은 왕실의 외척이 되어 80여 년 간 정권을 잡았다.

경원 이씨는 이자연의 딸이 문종의 왕비가 되면서 정치 권력을 장악하기 시작하였고, 이자연의 손자인 이자겸도 예종과 인종의 외척이 되어 집권하였다.

특히, 이자겸은 예종의 측근 세력을 몰아 내고 인종이 왕위에 오를 수 있게 하면서 그 세력이 막강해졌다.

 

  • 이자겸의 난

이자겸의 세력은 문벌 중심의 질서를 유지하고, 금과 타협하는 정치적 성향을 보였다.

이러한 이자겸의 권력 독점에 반대한 왕의 측근 세력은 왕을 중심으로 결집하였다.

이에 이자겸은 반대파를 제거하고 척준경과 함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하였다(고려 인종 1126년).

그러나 이자겸이 척준경에 의하여 몰려나고 척준경도 탄핵을 받고 축출됨으로써 이자겸 세력은 몰락하였다.

이자겸의 난은 중앙 지배층 사이의 분열을 드러냄으로써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를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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