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회 한능검 기본 42번 해설 – 이봉창

42번 문제

42. (가)에 들어갈 단체로 옳은 것은? [2점]

① 보안회

② 독립 의군부

③ 조선어 학회

④ 한인 애국단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김구는 1931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① 보안회

1904년 보안회는 토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독립 의군부

1912년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조선어 학회

1931년 조선어 연구회는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 학회로 개편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더 나아가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한인 애국단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④번이다.

 

의열 투쟁

  • 의열단

1919년 11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은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 (1923년)

의열단원들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 목표

의열단은 일제의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5파괴, 7가살)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5파괴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매일신보사(조선 총독부 기관지),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7가살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지주와 자본가

 

    • 활동

박재혁 – 1920년 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익상 –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 –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지섭 – 1924년 일본 도쿄 궁성 폭탄 투척

나석주 –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 투척

 

    • 활동 변화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의열단원들은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관내 대부분의 민족 운동 단체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 결성(1935년)을 주도하였다.

 

  • 한인 애국단
    • 배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 대표 회의 이후 침체를 겪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졌다.

김구는 1931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만보산 사건

1931년 중국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사건이다.

 

    • 이봉창의 의거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중국 상하이를 침략하였다(상하이 사변).

 

    • 윤봉길의 의거

1932년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일제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이때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요 장성과 고관들을 처단하였다.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 의의

한국 애국단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크게 호전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광복군이 조직되는 토대가 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
  • 보안회(1904년)

보안회는 토지 약탈을 목적으로 한 일본의 황무지 개간권 요구에 반대 운동을 벌여 이를 저지하는 데 성공하였다.

 

  • 헌정 연구회(1905년)

독립 협회에 영향을 받은 헌정 연구회는 국민의 정치 의식 고취와 입헌 정체의 수립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 대한 자강회(1906년)

대한 자강회는 전국 각지에 지회를 설치하고, 15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으나, 일제가 헤이그 특사 파견을 구실로 고종 황제의 퇴위를 강요하자, 격렬한 반대 운동을 주도하다가 강제로 해체되었다.

대한 자강회 취지문

국민의 지혜를 열고 국가의 힘을 기르는 길은 교육과 산업의 발달에 달려 있다고 아니할 수 있겠는가!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 곧 자강의 방도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이 자강의 목적을 관철하기를 바랄진대 부득불 먼저 그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여 단군과 기자 이래 4천 년 한국의 정신으로 2천만 모든 사람의 정신 속에 흐르도록 하여, 한 번 숨을들이고 내쉬는 시간에도 자기 나라 정신을 잊지 않게 만든 연후에야 바야흐로 자강의 마음을 단련하고 국권 회복의활기를 만들게 될 것이다.

 

  • 대한 협회(1907년)

대한 협회는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교육의 보급, 산업의 개발, 민권의 신장, 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 지배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대한 협회의 국권 회복에 대한 의지가 크게 약화되었다.

 

  • 신민회

신민회는 1907년 사회 각계 각층의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된 비밀 결사였다.

안창호, 양기탁 등을 지도부로 하였다.

신민회는 국권의 회복과 공화 정체의 국민 국가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표면적으로는 문화적, 경제적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면서, 내면적으로는 독립군 기지의 건설에 의한 군사적 실력 양성을 기도하였다.

 

    •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

신민회는 평양에 대성 학교, 정주에 오산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길렀다.

 

    • 태극 서관과 자기 회사

신민회는 평양과 서울에 설립된 태극 서관에서 계몽 서적을 출판하였다. 또한 평양에 자기 회사를 세워 민족 산업의 육성에도 힘썼다.

 

    •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만주에 독립군 기지(삼원보)를 건설하고, 신흥 무관 학교를 세워 독립군을 기르는 데 힘을 기울였다.

 

    • 해산

일제는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고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1910년대
국내 비밀 결사
  • 독립 의군부(1912년)

임병찬 등은 고종의 밀지를 받고 국내에서 전국 각지의 유생들을 모아 독립 의군부를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복벽주의 이념에 따라 고종의 복위를 목표로 전국적인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조선 총독부와 일본 정부에 국권 반환 요구서를 보내려고 계획하던 중에 조직이 발각되어 해체되었다.

 

  • 대한 광복회(1915년)

박상진, 김좌진 등은 대구에서 대한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삼았다.

대한 광복회는 군대식 조직을 갖추고 독립군 양성, 무기 구입, 군자금 모집, 친일 부호 처단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상덕태상회를 통하여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 송죽회(1913년)

평양 숭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들은 송죽회를 결성하여 국외로 망명한 독립운동가의 독립운동 자금을 후원하였다.

일제 강점기
국어 연구
  • 조선어 연구회(1921년)

3⋅1 운동 이후 국문 연구소의 전통을 이어 이윤재, 최현배 등은 조선어 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조선어 연구회는 ‘한글’이란 잡지를 간행하여 그 연구 성과를 정리, 발표하였다.

또한 이들은 한글 기념일인 ‘가갸날’(1926년)을 정하고 우리말쓰기를 권장함으로써 한글을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 조선어 학회(1931년)

조선어 연구회는 이윤재, 최현배, 이희승 등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 학회로 개편되었다.

조선어 학회의 가장 큰 성과는 한글 맞춤법 통일안과 표준어의 제정이었다.

더 나아가 조선어 학회는 우리말 큰 사전을 편찬하려 하였지만,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고 말았다.

일제는 조선어 학회를 독립 운동 단체로 간주하여 관련된 인사들을 체포하고, 학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를 조선어 학회 사건(1942)이라 한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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