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회 한능검 기본 38번 해설 – 일제 민족 말살 통치

38번 문제

38. 밑줄 그은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② 신사 참배가 강요되었다.

③ 교육 입국 조서가 발표되었다.

④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만주사변), 더 나아가 1937년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 국왕에 대한 숭배 사상을 주입하는 민족 말살 통치를 실시하였다. 이는 한국인을 침략 전쟁에 효율적으로 동원하려는 의도였다.

일제는 우리의 민족 정신을 뿌리뽑기 위해 이른바 일⋅선 동조론을 주장하였고,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창씨개명), 황국 신민 서사 암송(1937년),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①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일제 문화 통치 시기인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최대 규모의 합법적인 민족 협동 전선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신사 참배가 강요되었다.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③ 교육 입국 조서가 발표되었다.

1894년 제2차 갑오개혁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동양 척식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1908년 일본은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여러 가지 구실로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고, 일본인이 토지를 늘릴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일제의
문화 통치

  • 1920년 ~ 1936년

 

  • 배경

우리 민족의 거족적인 3⋅1 운동과 그로 인하여 악화된 국제 여론에 직면한 일제는 식민 통치 정책의 전환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 통치를 표방하였다.

일제의 문화 통치는 친일파를 길러 우리 민족을 이간, 분열시키려는 정책으로서, 우리 민족의 단결을 억제하고 독립 운동을 막으려는 방침에는 변함이 없었다.

 

  • 문화 통치의 실상
    • 문관 총독 임명

일제는 지금까지 현역 군인으로 조선 총독을 임명, 파견하던 것을 고쳐 문관도 그 자리에 임명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일제가 축출될 때까지 단 한 명의 문관 총독도 임명되지 않았다.

 

    • 보통 경찰 제도

일제는 헌병 경찰제를 보통 경찰제로 바꾸었다

하지만 경찰의 수와 장비, 그리고 그 유지비는 3⋅1 운동 이전보다 크게 증가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등 경찰 제도를 실시하여 우리 민족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시켰다.

 

    • 언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우리 민족의 신문 발행이 허가되었다.

하지만 일제는 언론에 대해서 검열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비위에 맞지 않는 기사는 마음대로 삭제하였고, 더 나아가 신문의 정간을 다반사로 하였으며, 폐간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 교육

일제는 제2차 조선 교육령(1922년)을 통해 보통 학교의 교육 연한을 4년에서 6년, 고등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5년으로 연장하였다.

또한 교육의 기회를 확대해 준다고 했다.

하지만 학교 수는 여전히 부족했고, 조선인의 취학률이 일본인보다 낮았다.

 

    • 부·면 합의회, 도 평의회

일제는 지방 자치제를 실시하는 것처럼 부 면 합의회를 민선으로 구성하고 도 평의회를 설치했다.

하지만 이 기구는 의결권이 없는 자문 기구일 뿐이었고, 일본인이나 친일 인사로 구성되었다.

 

  • 치안 유지법(1925년)

일제는 치안 유지법을 제정하여 항일 민족 운동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더욱 강화하여 많은 한국인을 구속하였다.

 

  • 자치론의 등장

문화 통치에 동조한 일부 지식인들은 민족 개조론, 자치론, 참정권론 등을 주장하며 민족 운족의 분열을 초래하기도 했다.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

  • 1937년(중일전쟁) ~ 1945년

 

  • 배경

1920년대 후반에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경제 공황의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일제는 일본 본토와 식민지를 하나로 묶는 경제 블록을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한반도의 노동력과 자원은 일제에게 보다 철저히 수탈당하였다.

그 후 일제는 1931년 만주를 점령하고(만주사변), 더 나아가 1937년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본격적인 대륙 침략을 강행하면서 한국을 대륙 침략의 병참 기지로 삼았다.

그리고는 식민 정책을 강화하여 우리 민족을 더욱 탄압하였고, 모든 방면에 걸쳐 식민지 수탈 정책을 강화하였다.

일제는 침략 전쟁을 확대하면서 한국인의 정신을 말살하고 일본 국왕에 대한 숭배 사상을 주입하는 민족 말살 통치를 실시하였다. 이는 한국인을 침략 전쟁에 효율적으로 동원하려는 의도였다.

 

  • 병참 기지화 정책
    • 조선 공업화 정책

일제는 만주 점령 이후 만주를 농업 원료 지대로, 한국을 중화학 공업 지대로 설정하고 조선 공업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 남면 북양 정책

일제는 일본에 필요한 공업 제품의 원료를 생산하기 위해 면화의 재배와 면양의 사육을 시도하는, 이른바 남면 북양 정책을 수립하였다.

 

  • 국가 총동원법(1938년)

일제는 1938년 국가 총동원법을 제정하여 본격적으로 인력과 물자의 수탈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일제는 강제 징용으로 한국인 노동력을 착취하였고, 학도 지원병 제도, 징병 제도 등을 실시하여 수많은 우리 젊은이를 전쟁에 동원하였다.

 

  • 황국 신민화 정책

일제는 우리의 민족 정신을 뿌리뽑기 위해 이른바 일⋅선 동조론을 주장하였고, 내선 일체의 구호를 내세워 우리 말과 글을 쓰지 못하게 하였다.

또한 성과 이름까지 일본식으로 고쳐 쓰도록 하고(창씨개명), 황국 신민 서사 암송(1937년), 궁성 요배, 신사 참배 등을 강요하였다.

그리고 1941년 소학교의 명칭을 ‘황국 신민 학교’라는 뜻의 국민학교로 바꾸었다.

 

  • 제3차 조선 교육령(1938년)

일제는 제3차 조선 교육령을 공포하여 조선어 교육을 사실상 폐지(선택 과목)하여,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 제4차 조선 교육령(1943년)

일제는 조선어 과목을 완전히 폐지했다.

 

  • 언론 폐간

1940년에는 한글을 사용하는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신문을 폐간하였다.

 

  • 일상생활·사상 통제

1930년대부터 일제는 직접적으로 저항하는 행동은 물론이고 사상까지 통제하고 감시하였다.

일제의 민족 말살 통치 시기, 중일전쟁 후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침략 전쟁에서 한국인의 협력을 강요하기 위해 국민정신 총동원 운동 조선 연맹을 조직하였다. 연맹의 가장 하부에는 애국반을 조직하였고, 반상회를 통해 일본어 사용, 전쟁을 위한 애국 저금 등의 정책을 홍보하였다.

1940년 초 일제가 강점기 막바지에 여성의 노동력을 얻기 위해 몸뻬를 고안해 냈다.

1936년 제정된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은 <치안 유지법> 위반자 중 집행 유예, 형 집행 종료 또는 가출옥한 사람을 대상으로 2년간 보호 관찰을 할 수 있도록 한 법안이었다.

1941년 제정된 <조선 사상범 예방 구금령>은 이에 더 나아가서 <치안 유지법>을 위반하여 형에 처해진 경력이 있는 자를 그 집행을 마치고 석방된 이후에도 필요한 경우 검경이 법원의 영장 없이도 자의적으로 계속하여 구금하거나 일정하게 제재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반인권적 조치였다.

민족 유일당
운동과

신간회

  • 제1차 국공 합작

1924년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의 제1차 국공 합작이 이루어졌다. 이를 배경으로 분열된 독립운동 진영을 통합하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일어났다.

 

  •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

1926년 중국 북경에서 안창호의 주도로, 한국 독립 유일당 북경 촉성회가 창립되었다.

이로 인해 만주에서 3부 통합 운동이 전개되었다.

 

  • 민족주의 진영의 분열

국내에서는 최린, 이광수 등이 자치 운동(자치론)을 전개하며 일제에 타협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에 이상재, 안재홍 등의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비판하였고, 나아가 사회주의자들과 연대하여 민족 운동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 사회주의 진영의 세력 약화

일제는 1925년 치안 유지법을 만들어 사회주의 세력을 강력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진영과의 연대하고자 하였다.

 

  • 정우회 선언

치안 유지법으로 인해 활동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사회주의 세력은 정우회 선언을 발표하여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동을 강조하였다.

이로 인해 신간회 설립의 계기가 마련되었다.

정우회 선언

“민족주의적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질을 분명히 인식함과 동시에 과정상의 동맹자적 성질도 충분하게 승인하여, 그것이 타락되지 않는 한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대중의 이익을 위해서도 종래의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싸워야 할 것이다.”

〈조선 일보, 1926. 11. 17.〉

 

타협적
민족주의
← 분열 → 비타협적
민족주의
← 연대 → 사회주의
이광수, 최린 등 이상재, 안재홍 등 치안 유지법으로 위축됨
자치론 주장 자치론 비판 정우회 선언
↓↓
신간회 결성

 

  • 신간회 결성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과 사회주의자들이 연대하여 최대 규모의 합법적인 민족 협동 전선 단체인 신간회를 결성하였다. 이상재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 강령

신간회는 민족의 단결과 정치적·경제적 각성을 촉구하고 기회주의자를 배격하는 것을 기본 강령으로 내세웠다.

‘우리는 정치적ㆍ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 부인함’

 

  • 근우회(1927년)

신간회 출범과 더불어 탄생한 것이 근우회였다. 근우회는 김활란 등이 중심이 되어 여성계의 민족 유일당으로 조직되었고, 여성 노동자의 권익 옹호와 새생활 개선을 행동 강령으로 하였다.

근우회의 창립이념과 활동의 기본 방향은 강령에 제시된 “조선 여성의 단결과 지위향상”이다.

 

  • 활동

신간회는 합법적인 공간을 활용하여 한국인 본위의 교육 실시, 식민지 교육 반대, 타협적 정치 운동 반대 등을 주장하고 일제의 식민 통치 정책을 비판하였다.

 

  •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7년)

신간회는 광주에 진상 조사단을 파견하여 전국적인 민중 대회를 준비하였다.

 

  • 해소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제1차 국공 합작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사회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 계열과의 협동 전선 해체를 지시하였다.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은 신간회 해소를 적극적으로 반대하였으나, 1931년에 열린 전체 대회에서 신간회를 해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코민테른

국제 공산당 조직 연합체로, 각국의 공산주의 운동을 지원하였다. 코민테른의 결정은 각국의 사회주의 운동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 의의

신간회의 결성은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민족의 독립을 위해 이념과 노선의 차이를 극복하여 민족 협동 전선을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제2차
갑오개혁
  • 배경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유리해지자 조선의 내정에 적극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일본에서 망명 중이던 박영효를 불러들였다.

1894년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을 구성하여 군국기무처를 폐지하고 제2차 갑오개혁을 추진하였다.

  • 제2차 김홍집 내각

고종은 종묘에 나가 독립 서고문을 바치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한 홍범 14조를 반포하였다. 이는 최초의 근대적 헌법의 성격을 지녔다.

홍범 14조

1. 청에 의존하는 생각을 버리고 자주 독립의 기초를 세운다.

2. 왕실 전범(典範)을 제정하여 왕위 계승의 법칙과 종친과 외척과의 구별을 명확히 한다.

3. 임금은 각 대신과 의논하여 정사를 행하고, 종실(宗室), 외척의 내정 간섭을 용납하지 않는다.

4. 왕실 사무와 국정 사무를 나누어 서로 혼동하지 않는다.

5. 의정부(議政府) 및 각 아문(衙門)의 직무, 권한을 명백히 규정한다.

6. 납세는 법으로 정하고 함부로 세금을 징수하지 아니한다.

7. 조세의 징수와 경비 지출은 모두 탁지아문(度支衙門)의 관할에 속한다.

8. 왕실의 경비는 솔선하여 절약하고, 이로써 각 아문과 지방관의 모범이 되게 한다.

9. 왕실과 관부(官府)의 1년 회계를 예정하여 재정의 기초를 확립한다.

10. 지방 제도를 개정하여 지방 관리의 직권을 제한한다.

11. 총명한 젊은이들을 파견하여 외국의 학술, 기예를 견습시킨다.

12. 장교를 교육하고 징병을 실시하여 군제의 근본을 확립한다.

13. 민법, 형법을 제정하여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전한다.

14. 문벌을 가리지 않고 인재 등용의 길을 넓힌다.

 

  • 주요 개혁 내용
    • 정치
      • 내각제 도입
      • 8아문을 7부로 고쳐 내각을 편성
      • 지방 행정을 8도를 23부로 개편
      • 재판소 설치
      • 지방관 권한 축소(사법권과 군사권을 배제, 행정권만 행사)
    • 사회
      • 교육 입국 조서 반포
    • 군사
      • 훈련대와 시위대 창설

 

  • 중단

당시 일본이 삼국 간섭에 의해 세력이 약화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 조선의 내각 대신들, 특히 내무 대신 박영효의 주도하에 단행되었다.

그러나 민비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된 박영효가 민씨 일파에 의해 실각됨에 따라 개혁은 중단되었다.

삼국 간섭

한반도와 만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러시아가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이 청⋅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도록 만든 사건

일본
토지 약탈

  • 일본의 토지 약탈

일제는 러⋅일 전쟁 중에 철도 부지와 군용지 확보를 구실로 국유지, 사유지, 황실 소유의 토지 등을 빼앗았다.

 

  • 동양 척식 주식회사(1908년)

1908년 일본은 동양 척식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여러 가지 구실로 많은 토지를 국유지로 편입시키고, 일본인이 토지를 늘릴 수 있도록 지원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기본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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