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회 한능검 심화 21번 해설 – 을사사화

21번 문제

21. 밑줄 그은 ‘이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선생님: 이곳은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경주 옥산서원입니다. 이언적은 이른바 대윤과 소윤이라는 정치 세력 간의 갈등으로 윤임 등 대윤 세력이 탄압받은 이 사건 당시 관련자들의 처리를 두고 갈등이 생기자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났습니다. 이후 양재역 벽서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습니다.

①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었다.

②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이 원인이 되었다.

③ 왕실 외척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일어났다.

④ 진성 대군이 왕으로 즉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⑤ 조광조 등이 반정 공신의 위훈 삭제를 주장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조선 인종이 8개월 만에 승하하고 명종이 즉위하였다.

이후 인종의 외척인 대윤(윤임)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윤원형)의 권력 다툼이 발생했고, 결국 윤임이 제거당하는 을사사화가 발생했다(1545년).

1547년 조선 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 을사사화(1545년)에서 제거되었던 ‘대윤’ 윤임의 남은 관련자들이 제거되었다. 이를 정미사화라고 한다.

 

① 김종직의 조의제문이 발단이 되었다.

연산군 때 발생했던 무오사화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이 원인이 되었다.

연산군 때 발생했던 갑자사화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왕실 외척 간의 권력 다툼으로 일어났다.

조선 명종 때 발생했던 을사사화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진성 대군이 왕으로 즉위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1506년 연산군의 폭정으로 인해 중종 반정이 일어났다.

진성 대군이 곧 중종이 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조광조 등이 반정 공신의 위훈 삭제를 주장하였다.

중종 때 발생했던 기묘사화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사림의 성장과
사화
  • 사림의 등장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사림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데 비해,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 사림의 계보

 

  • 사림의 성장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이조 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 사화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대립으로 사화가 발생하였다.

 

    • 무오사화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무오사화(1498년)는 조선에서 발생한 첫 번째 사화로, 김일손의 사초에 불손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

김일손의 사초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한 일이었는데,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를 조선 단종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사화

‘사림의 화’의 준말. 관리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 몰려 참혹한 화를 입었던 일을 말한다.

 

    • 갑자사화

연산군의 전횡이 심해지자, 3사는 연산군에 대한 간쟁의 수위를 높여 갔고, 대신들 또한 연산군의 실정에 대해 논하며 시정을 요구했다.

결국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행위와 폐비 윤씨 사건의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1504년).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이 알려져 김굉필 등이 처형되었다.

 

    • 기묘사화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청렴함과 원리 원칙에 충실한 태도는 남곤⋅심정 등으로 대표되는 훈구 재상들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면서 대립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1519년).

조광조의 개혁 정치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 을사사화

중종이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 다툼에 윤임이 제거당하고, 사림 세력 역시 정계에서 밀려났다(1545년).

 

    • 정미사화

1547년 조선 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 을사사화(1545년)에서 제거되었던 ‘대윤’ 윤임의 남은 관련자들이 제거되었다. 이를 정미사화라고 한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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