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회 한능검 심화 24번 해설 – 조선 숙종

24번 문제

24. 밑줄 그은 ‘이 왕’의 재위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①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되었다.

② 변급, 신류 등이 나선 정벌에 참여하였다.

③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창설되었다.

④ 경신환국 등 여러 차례 환국이 발생하였다.

⑤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712년 조선 숙종 때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웠다.

이 정계비에서 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① 최제우가 혹세무민의 죄로 처형되었다.

1864년 고종 1년,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하게 생각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변급, 신류 등이 나선 정벌에 참여하였다.

조선 효종 때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국왕의 친위 부대인 장용영이 창설되었다.

조선 정조 때 장용영이 창설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경신환국 등 여러 차례 환국이 발생하였다.

조선 숙종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조선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조선 후기
청과의 관계
  • 북벌론 제기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하여 표면상 사대 관계를 맺고 사신이 왕래하면서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청에 대한 적개심이 오랫동안 남아 있어서 북벌 정책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효종은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을 높이 등용하여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하였다.

그 후, 숙종 때에도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 움직임이 제기되었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 북학론 제기

이 시기에 청은 중국 대륙을 장악한 뒤 국력이 크게 신장되고, 중국의 전통 문화를 보호, 장려하고 서양의 문물까지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조선 사신은 귀국 후에 기행문이나 보고서를 통하여 변화하는 청의 사정을 전하였고,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였다.

이후 학자들 중에도 청을 무조건 배척하지만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조선 정부는 청의 수도인 북경에 정기적으로 연행사를 파견했다.

 

  • 백두산 정계비

한편, 청은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에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여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 사람들의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났다.

이에,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웠다(조선 숙종 1712년).

이 정계비에서 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고 하였다.

조선 후기
붕당 정치와
탕평론의 대두
조선 숙종
  • 탕평론의 대두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 경신환국(1680년)

숙종 초 정권을 장악한 남인을 견제하고자 했던 숙종은 남인의 역모 사건 등을 계기로 남인을 처벌하고 서인으로 급격히 정권을 교체시켰다. 허적과 윤휴 등 남인이 대거 축출되었다. 이를 경신환국이라 한다. 서인이 주도권을 가졌다. 경신환국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 기사환국(1689년)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적장자로 인정하여 원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서인을 대거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남인이 주도권을 가졌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송시열이 사형을 당했다.

  • 갑술환국(1694년)

숙종은 인현왕후를 다시 맞아들이고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을 교체시켰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서인(노론과 소론)이 주도권을 가졌다.

  • 금위영 설치

숙종 때 국왕의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금위영을 창설하였다.

조선 후기
동학의 발생
  • 동학의 창도

동학은 1860년에 경주 출신인 최제우가 창도하였다.

동학에는 19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조선 사회가 처한 여러 사회 상황이 반영되었다. 교리는 유⋅불⋅선의 주요 내용이 바탕이 되었고, 주문과 부적 등 민간 신앙의 요소들이 결합되었다.

또, 사회 모순을 극복하고, 일본과 서양 국가의 침략을 막아 내자는 주장을 폈다.

 

  • 사상

동학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시천주(侍天主)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강조하였다.

양반과 상민을 차별하지 않고, 노비 제도를 없애며, 여성과 어린이의 인격을 존중하는 사회를 추구하였다.

 

  • 동학의 중심 사상

인내천 사상, 현세 구복 사상, 후천 개벽 사상, 보국 안민 사상 등이 동학의 중심 사상이다.

 

  • 경전

동학의 경전으로는 동경대전과 용담유사가 있다.

 

  • 탄압

조선의 지배층은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동학을 위험하게 생각하여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현혹한다는 죄로 최제우를 처형하였다(1864년).

그 뒤를 이은 최시형은 교세를 확대하면서 동경대전과 용담유사를 펴내어 교리를 정리하는 한편, 의식과 제도를 정착시켜 교단 조직을 정비하였다.

호란의 발발과
북벌 운동
  • 정묘호란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용골산성)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 병자호란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 북벌 운동

병자호란 이후 오랑캐에 당한 수치를 씻고, 임진왜란 때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 청에 복수하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청에 인질로 잡혀 있었던 효종은 북벌을 나라의 가장 중요한 정책 목표로 삼았다.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남한산성 및 북한산성을 수축하고 군대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으나,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 나선 정벌

만주 북부의 헤이룽 강 부근에 러시아가 침략해 오자, 청은 이를 물리치기 위해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 효종은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를 출병시켜 큰 전과를 올렸다. 이를 나선 정벌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
정조의 탕평 정치
  • 조선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
  • 탕평 정치 시행
  • 초계문신제 실시 – 신진 인물이나 중⋅하급 관리 중에서 유능한 인사를 재교육
  • 규장각 설치 – 규장각은 학문과 정책을 연구하는 기구. 서얼 출신 박제가, 유득공, 이덕무 등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
  • 장용영 설치 –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왕권을 뒷받침
  • 수원 화성 건설
  • 신해통공 실시 – 금난전권을 폐지하여 도성 안에서 시전 상인이 아닌 난전의 상업 활동 허락
  • ‘대전통편’, ‘동문휘고’, ‘탁지지’, ‘규장전운’, ‘무예도보통지’ 등 수많은 책 편찬
  • 중국에서 <고금도서집성> 수입
조선 전기
성리학의 발달
  • 성리학의 정착
    • 관학파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 사림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에서 비롯된 사학파의 학문적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 성리학의 융성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 서경덕과 이언적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리론은 도덕적 원리를 중시하는 학설로, 이언적에서 시작하여 이황이 대성하였다.

주기론은 경험적 세계를 중시하는 학설로, 서경덕이 처음 주장하고 이이가 이를 크게 발전시켰다.

 

      • 서경덕·조식(주기론)

서경덕은 이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 이언적(주리론)

이언적은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이황과 이이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 이황(주리론)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황은 기대승과 사단 칠정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 이이(주기론)

이이는 이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격몽요결,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저술하여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공물을 쌀로 받는 방안을 제안하였다(대동법).

성학십도와 성학집요의 차이점

성학십도에서는 군주 스스로가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한 반면, 성학집요에서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학파의 형성과 대립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 동인과 서인

선조 때에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 동인의 분화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이황 학파의 남인과, 서경덕 학파와 조식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남인 북인
이황, 이언적 서경덕, 조식

 

    • 서인과 남인

광해군 때, 북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남인 북인
이황, 이언적 서경덕, 조식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는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 예학의 발달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71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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