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번 문제
25. 밑줄 그은 ‘이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안내 음성: 이것은 이 인물이 제주도 유배지에서 부인에게 보낸 한글 편지입니다. 편지에는 유배 생활의 곤궁함과 함께 위독한 부인에 대한 걱정과 그리움이 담겨 있습니다. 독창적인 서체로 유명한 이 인물은 유배지에서 세한도를 그리기도 하였습니다. |
①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을 전개하였다.
②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하였다.
③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④ 청으로부터 시헌력을 도입하자고 건의하였다.
⑤ 열하일기에서 수레와 선박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조선 후기 추사 김정희는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세한도를 그렸다.
또한 김정희는 우리 서예 발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고금의 필법을 두루 연구하여 굳센 기운과 다양한 조형성을 가진 추사체를 창안하여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① 기대승과 사단칠정 논쟁을 전개하였다.
퇴계 이황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고증하였다.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양명학을 연구하여 강화학파를 형성하였다.
정제두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청으로부터 시헌력을 도입하자고 건의하였다.
조선 후기 김육 등의 노력으로 시헌력이 도입되었다. 이는 서양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청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종전의 역법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약 6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시헌력을 채용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열하일기에서 수레와 선박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박지원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②번이다.
| 조선 후기 진경 산수화와 풍속화, 서예 |
진경 산수화는 중국 남종과 북종 화법을 고루 수용하여 우리의 고유한 자연과 풍속에 맞춘 새로운 화법으로 창안한 것이었다.
진경 산수화를 개척한 화가는 18세기에 활약한 정선이었다. 그는 서울 근교와 강원도의 명승지를 두루 답사하여 그것들을 사실적으로 그려 냈다. 정선은 대표작인 인왕제색도와 금강전도에서 바위산은 선으로 묘사하고, 흙산은 묵으로 묘사하는 기법을 사용하여 산수화의 새로운 경지를 이룩하였다.
풍속화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 정경과 일상적인 모습을 생동감 있게 나타내어 회화의 폭을 확대하였다.
풍속화에 새 경지를 열어 놓은 화가는 김홍도였다. 그는 정감어린 풍속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하다.그는 밭갈이, 추수, 씨름, 서당 등에서 자신의 일에 몰두하는 사람들의 특징을 소탈하고 익살스러운 필치로 묘사하였다. 이런 그림에서 18세기 후반의 생활상과 활기찬 사회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김홍도에 버금 가는 풍속화가로는 신윤복이 있었다. 그는 주로 양반과 부녀자의 생활과 유흥, 남녀 사이의 애정 등을 감각적이고 해학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밖에도 강세황 등의 화가가 개성 있는 그림으로 18세기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특히, 강세황은 서양화 기법을 반영하여 사물을 실감나게 표현하였다.
19세기에 이르러 장승업은 강렬한 필법과 채색법으로 뛰어난 기량을 발휘하였다.
김정희는 문인화 세한도를 그렸다.
이광사 – 서예에서도 우리의 정서와 개성을 추구하는 단아한 글씨의 동국진체가 이광사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김정희 – 김정희는 우리 서예 발전의 성과를 바탕으로 고금의 필법을 두루 연구하여 굳센 기운과 다양한 조형성을 가진 추사체를 창안하여 서예의 새로운 경지를 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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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국학 연구 |
실학의 발달과 함께 민족의 전통과 현실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면서 우리의 역사, 지리, 국어 등을 연구하는 국학이 발달하였다.
이익은 실증적이며 비판적인 역사 서술을 제시하고, 중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우리 역사를 체계화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민족에 대한 주체적 자각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익의 제자 안정복은 동사강목을 저술하여 이익의 역사 의식을 계승하였다.
이긍익은 조선 시대의 정치와 문화를 정리하여 연려실기술을 저술하였다.
한치윤은 500여 종의 중국 및 일본의 자료를 참고하여 해동역사를 편찬하여 민족사 인식의 폭을 넓히는 데 이바지하였다.
이종휘는 동사에서 고구려 역사 연구를 하였다.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사 연구를 심화하였다. 그는 이 책에서, 신라의 통일은 불완전한 것이고, 북쪽에 발해가 있었으므로 이를 남북국이라 불러야 한다고 처음으로 주장하였다. 고대사 연구의 시야를 만주 지방까지 확대시킴으로써 한반도 중심의 협소한 사관을 극복하는 데 힘썼다.
국토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여 우수한 지리서가 편찬되었다.
역사 지리서로 한백겸의 동국지리지가 나왔다.
역사 지리서로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등이 나왔다.
인문 지리서로 이중환의 택리지가 편찬되었다. 이 책은 자연과 인간 생활의 관계를 인과적으로 이해하려고 한 점에서 주목된다.
중국에서 서양식 지도가 전해짐에 따라 정밀하고 과학적인 지도가 많이 제작되었다.
영조 시기 제작된 정상기의 동국지도는 최초로 100리척을 사용하여 정확하고 과학적인 지도 제작에 공헌하였다.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산맥, 하천, 포구, 도로망의 표시가 정밀하고, 거리를 알 수 있도록 10리마다 눈금이 표시되었으며, 목판으로 인쇄되었다.
신경준의 음운 연구서인 훈민정음운해가 나왔다.
유희의 음운 연구서인 언문지가 나왔다.
우리의 방언과 해외 언어를 정리한 이의봉의 고금석림이 편찬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실학이 발달하고 문화 인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백과 사전류의 저서가 많이 편찬되었다.
이 방면의 효시가 된 책은 이수광의 지봉유설이다.
성호사설에서 이익은 나라가 가난하게 된 원인은 노비 제도, 과거 제도, 양반 제도 등이 잘못된 데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 고리대 활동과 농민의 게으름도 큰 잘못이라고 지적하였다.
이덕무의 청장관전서
서유구의 임원경제지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영⋅정조 때에는 국가적 사업으로 동국문헌비고가 편찬되었는데, 이 책은 우리 나라의 역대 문물을 정리한 한국학 백과 사전이다.
김정희는 금석과안록을 지어 북한산비가 진흥왕 순수비임을 밝혔다. 정약전은 자산어보를 편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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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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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전기 성리학의 발달 |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에서 비롯된 사학파의 학문적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경덕은 이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이언적은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황은 기대승과 사단 칠정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이이는 이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격몽요결,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저술하여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공물을 쌀로 받는 방안을 제안하였다(대동법).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선조 때에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이황 학파의 남인과, 서경덕 학파와 조식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광해군 때, 북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는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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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양명학의 수용 |
실천성 강조 – 성리학의 절대화와 형식화를 비판하며 실천성을 강조한 양명학은 중종 때에 조선에 전래되었다.
이단 – 학자들 사이에 관심을 끌어가던 양명학은 이황이 정통 주자학 사상과 어긋난다며 비판하면서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양명학 – 양명학은 인간의 마음이 곧 이(理)라는 심즉리(心卽理) 바탕으로, 인간이 상하 존비의 차별 없이 본래 타고난 천리(天理)로서의 양지를 실현하여 사물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치양지설(致良知說), 그리고 앎과 행함이 분리되거나 선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앎은 행함을 통해서 성립한다는 지행합일설( 知行合一說) 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강화 학파 – 18세기 초에 정제두는 강화도로 옮겨 살면서 몇몇 소론 학자가 명맥을 이어가던 양명학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학파로 발전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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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천문학과 지도 |
천문학은 서양 과학의 영향을 받아 크게 발전하였다.
김석문은 지전설을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주장하여 우주관을 크게 전환시켰다.
홍대용은 과학 연구에 힘썼으며, 김석문과 함께 지전설을 주장하였다. 지전설은 성리학적 세계관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또,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무한 우주론을 내놓았는데, 당시로서는 대담한 주장이었다. 이리하여 조선 후기의 천문학은 전통적 우주관에서 벗어나 근대적 우주관으로 접근해 갔다. <의산문답>을 저술하여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주해수용을 저술하여 조선ㆍ중국ㆍ서양 수학의 연구 성과를 정리하였다.
역법은 김육 등의 노력으로 시헌력이 도입되었다. 이는 서양 선교사인 아담 샬이 중심이 되어 만든 것으로 청에서 사용되고 있었는데, 종전의 역법보다 한 걸음 더 발전한 것이었다. 조선에서는 약 60여 년 간의 노력 끝에 시헌력을 채용하였다.
조선 후기에 서양 선교사가 만든 곤여만국전도 같은 세계 지도가 중국을 통하여 전해짐으로써 지리학에서도 보다 과학적이고 정밀한 지식을 가지게 되었고, 지도 제작에서도 더 정확한 지도가 만들어졌다. 이를 통하여 당시 조선인의 세계관이 확대될 수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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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후기 상공업 중심 실학 |
18세기 후반에는 농업뿐만 아니라,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주장하는 실학자가 나타났다. 청나라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부국강병과 이용후생에 힘쓰자고 주장하였으므로 이들을 이용후생 학파 또는 북학파라고도 한다.
상공업 중심 개혁론의 선구자는 18세기 전반의 유수원이었다. 그는 <우서>를 저술하여 상공업의 진흥과 기술의 혁신을 강조하고, 사농공상의 직업 평등과 전문화를 주장하였다.
홍대용은 청에 왕래하면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기술의 혁신과 문벌 제도의 철폐, 그리고 성리학의 극복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고 강조하였으며,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생각을 비판하였다.
박지원은 청에 다녀와 <열하일기>를 저술하고 상공업의 진흥을 강조하면서 수레와 선박의 이용, 화폐 유통의 필요성 등을 주장하고, 양반 문벌 제도의 비생산성을 비판하였다. 농업에서도 영농 방법의 혁신, 상업적 농업의 장려, 수리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하여 농업 생산력을 높이는 데 관심을 기울였다.
박지원의 실학 사상은 그의 제자 박제가에 의하여 더욱 확충되었다. 박제가는 청에 다녀온 후 <북학의>를 저술하여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할 것을 제창하였다. 그는 상공업의 발달, 청과의 통상 강화, 수레와 선박의 이용 등을 역설하였다. 또, 생산과 소비와의 관계를 우물물에 비유하면서 생산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절약보다 소비를 권장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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