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번 문제
22. (가), (나) 사이의 시기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2점]
| (가) 임금이 여러 도(道)에 명을 내렸다. “나라의 운세가 매우 좋지 않아 역적 이괄이 군사를 일으켰는데, 여러 장수들이 좌시하여 수도가 함락되고 말았다. …… 예로부터 반역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지만, 이처럼 극도로 흉악한 역적은 없었다. 종사와 자전*을 염려하여 남쪽으로 피란하기로 결정하였다.”
(나) 정명수가 심양에 있는 소현 세자의 관소에 와서 용골대의 뜻을 전하기를, “세자가 이곳에 들어온 지가 이미 5년이 되었으니, 어찌 스스로 먹고살 길을 마련하지 않는가. 세자와 인질들에게 어찌 먹고살 식량을 늘 지급해 줄 수가 있겠는가. 경작할 땅을 주어 내년부터 각자 농사를 지어 먹도록 함이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자전(慈殿): 임금의 어머니 |
① 정문부가 길주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②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③ 영창 대군이 사사되고 인목 대비가 유폐되었다.
④ 이덕형이 구원병 요청을 위해 명에 청원사로 파견되었다.
⑤ 김상헌 등이 남한산성에서 화의에 반대하여 항전을 주장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가) 1624년 조선 후기 인조 때 이괄이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으나 2등 공신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이것을 이괄의 난이라고 한다.
(나) 1636년 병자호란이 조선의 패배로 끝나고, 인조의 아들이었던 소현세자가 인질이 되어 청나라로 끌려갔다.
① 정문부가 길주에서 의병을 이끌었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 당시 의병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임진왜란 도중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이 설치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영창 대군이 사사되고 인목 대비가 유폐되었다.
광해군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인조 반정의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이덕형이 구원병 요청을 위해 명에 청원사로 파견되었다.
임진왜란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김상헌 등이 남한산성에서 화의에 반대하여 항전을 주장하였다.
1636년 인조 때 병자호란이 발생하여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였다.
김상헌 등이 남한산성에서 화의에 반대하여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 조선 인조 |
인조 2년(1624)에 이괄이 주동이 되어 일으킨 반란.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을 세웠으나 2등 공신이 된 것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켰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마침 조선에서 이괄의 난이 일어나 사회가 혼란해지자, 후금은 광해군을 위하여 보복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쳐들어왔다(1627년). 이를 정묘호란이라 한다. 정봉수와 이립 등은 의병을 일으켜 관군과 합세하여 적을 맞아 싸웠다. 후금의 군대는 보급로가 끊어지자 강화를 제의하여 화의가 이루어졌다.
세력을 더욱 확장한 후금은 군신 관계를 맺자고 요구하였고, 국호를 청이라 고친 다음 친명배금을 명분으로 다시 대군을 이끌고 침입해 왔다(1636년).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청군에 대항하고 김준룡이 광교산 전투에서 항전했다. 한편 김상헌 등이 남한산성에서 화의에 반대하여 항전을 주장하였으나 결국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과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강화를 맺었다(삼전도의 굴욕). 그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이때 소현세자가 청에 인질로 끌려갔다.
인조 때 연분9등법을 따르지 않고 풍년이건 흉년이건 관계 없이 전세를 토지 1결당 미곡 4두로 고정시켰다. 이를 영정법이라 한다(1635년). |
| 임진왜란 |
중종 때의 3포 왜란(1510년), 명종 때의 을묘왜변(1555년) 발생 비변사를 설치하여 군사 문제를 전담하게 하는 등 대책 강구
일본은 전국 시대의 혼란을 수습한 뒤 철저한 준비 끝에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1592년). 송상현이 동래성에서 항전하였지만 패배
전라도 지역에서 이순신이 이끈 수군은 옥포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남해안 여러 곳에서 연승을 거두어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 한산도 대첩, 명량 해전에서 큰 승리를 거둠 한산도 대첩에서 거북선 사용
의병은 경상도에서 곽재우가 처음 일으킨 후 김천일, 조헌, 고경명, 정문부, 유정(사명대사), 서산대사 등이 여러 지방에서 왜군과 전투 함경도에서는 정문부가 가토 기요마사에게 점령된 지역을 수복. 이를 북관대첩이라고 함.
이덕형이 구원병 요청을 위해 명에 청원사로 파견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평양성 전투). 권율 장군은 관군, 백성과 함께 합심하여 행주산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 방어(행주 대첩). 진주에서는 김시민이 이끄는 관민이 일본군을 패배시킴(진주 대첩, 제1차 진주성 전투).
류성룡의 건의에 따라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1597년). 조⋅명 연합군이 왜군을 직산에서 격퇴하고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명량 해전),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
조선 – 토지 대장과 호적의 대부분이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지고, 식량 부족. 왜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 서적, 실록 등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감 징비록 – 류성룡이 지은 징비록에는 임진왜란 이전 일본과의 관계, 임진왜란 당시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명의 군대 파견 등에 대한 내용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일본 –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가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가 발달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 명 –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 |
| 광해군의 중립 외교 |
명에 요청에 따라 강홍립을 도원수로 삼아 1만 3000명의 군대를 파견하였다. 하지만 조⋅명 연합군은 후금군에게 패하였고, 사르후 전투에 참전했던 강홍립 등은 후금에 항복하였다.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후금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중립 외교 정책을 폈다. 그러나 의리와 명분을 중시하는 사림은 이를 명에 대한 배신 행위로 간주하였다.
일부 사림은 명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외교 정책을 비판하였다. 게다가 광해군과 북인 정권은 왕권의 안정을 이루고자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유폐시키는 등 유교 윤리에 어긋나는 정치를 펴 도덕적으로 큰 약점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이를 빌미로 서인이 인조반정을 일으킴으로써 광해군은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허준, 동의보감 편찬 경기도에 대동법 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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