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번 문제
43. (가) 부대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2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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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독립운동사
[해설] 이 사진은 충칭에서 열린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 |
① 자유시 참변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② 영릉가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③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④ 미군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⑤ 쌍성보 전투에서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총사령관을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1943년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한국광복군은 미얀마·인도 전선에 참가하여,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포로 심문, 정보 수집, 선전 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① 자유시 참변으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 후 독립군들은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으로 조직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영릉가에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두었다.
1930년대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신개령 전투, 통화현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물리쳤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미군과 연계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작전명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일찍 항복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⑤ 쌍성보 전투에서 한중 연합 작전을 전개하였다.
1930년대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승리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④번이다.
1937년 김구의 한국 국민당,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 3당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옹호, 유지한다는 전제하에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1937년 김원봉의 주도 하에 조선 민족 혁명당은 다른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 1938년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장제스는 두 세력의 합작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민족주의계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와 사회주의계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의 이견 차이로 인해 좌우익 세력의 통일 운동은 결렬되었다.
1940년 중국 충칭에서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총사령관을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한국광복군은 임시 정부의 정규군이 되었다.
1942년 화북 지방으로 이동하지 않은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았던 조선 의용대 일부가 중국 팔로군과 연합한 이후, 한국광복군은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에 근거해 중국 군사위원회의 간섭을 받았다. 1944년 <한국광복군 행동 준승 9개항>이 폐기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한국 광복군의 지휘권을 가지면서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식으로 일제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다.
1943년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한국광복군은 미얀마·인도 전선에 참가하여, 주로 일본군을 상대로 한 포로 심문, 정보 수집, 선전 활동 등을 수행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작전명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일찍 항복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다.
1942년 중국 화북 지역에서 김두봉이 주도하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 독립 동맹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등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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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운동을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인 전개가 지름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1920년 6월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을 포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이다.
봉오동 전투에서 패패한 일제는 중국 마적들을 매수하여 훈춘의 일본 영사관을 습격하게 하였고(훈춘 사건),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독립군을 공격하였다. 1920년 10월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 백운평, 완루구, 어랑촌, 고동하 등지에서 6일 동안 10여 차례의 전투 끝에 일본군을 격파하였다. 이것이 청산리 전투이다.
일본군은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패배에 대한 보복으로 간도 참변을 일으켜 우리 동포를 학살였다.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 군단을 조직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독립군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 이로 인해 독립군 세력이 와해되었다.
독립군은 간도 참변과 자유시 참변으로 큰 시련을 겪고 만주로 돌아와 조직을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 3부로 재정비하였다. 이들 3부는 한인 사회를 자치적으로 이끌어 가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 및 작전 등을 담당하는 군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다.
압록강 연안 지역을 담당했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설립되었다.
남만주 지린성과 봉천성 일대를 담당했다.
북만주 지역을 담당했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독립군의 탄압을 위하여 맺어진 이른바 미쓰야 협정에 의해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다. 이 협정은 일제와 만주 군벌이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이었다.
1920년대 후반 제1차 국공 합작의 영향으로 중국 관내에서는 안창호 등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이루려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전개되었다.
3부 통합 운동이 일어나 남만주에는 국민부가, 북만주에는 혁신 의회가 조직되었다. 양세봉 등이 중심이 된 국민부는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아래에 조선 혁명군을 조직하였다. 지청천 등이 중심이 된 혁신 의회는 해체된 후, 한국 독립당과 한국 독립군이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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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만주사변(1931년)을 일으키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독립군은 보다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에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은 각각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 전쟁을 전개하였다.
지청천이 이끄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대전자령 전투 등에서 일본군에 승리했다. 지청천을 비롯한 한국 독립군의 일부는 중국 관내로 이동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합류하였고, 한국광복군을 만드는 데 참여하였다.
양세봉이 이끄는 조선 혁명군은 중국 의용군과 함께 영릉가 전투, 흥경성 전투, 신개령 전투, 통화현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하였다.
일제가 만주를 점령한 이후 만주 일대에서 무장 투쟁이 어려워지자,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1935년 중국 난징에서 민족 유일당 운동의 연결선상에서 김원봉, 조소앙, 지청천 등이 민족 혁명당을 결성하였다. 민족 혁명당 결성에는 김구를 제외한 한국 독립당, 의열단, 신한독립당, 조선 혁명당, 대한독립당 등이 참여하였다.
1935년 민족 혁명당에 합류하지 않은 김구는 한국 국민당을 결성했다.
의열단의 김원봉의 전권 장악에 반발한 한국 독립당계(조소앙)와 신한 독립당계(지청천 또는 이청천)가 탈퇴한 후, 민족 혁명당은 조선 민족 혁명당으로 개편됐다. 탈퇴한 조소앙은 한국 독립당을 재건했다. 탈퇴한 지청천(또는 이청천)은 조선 혁명당을 재건했다.
1937년 중·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민족 혁명당은 다른 단체들을 통합하여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
1938년 중국 우한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민족 전선 연맹 아래 중국 관내 최초의 한국인 무장 부대인 조선 의용대가 김원봉의 주도로 만들어졌다. 조선 의용대는 일본군의 정보 수집, 포로 신문, 후방 교란, 심리전 등을 수행하였다.
조선 의용대는 항일 투쟁에 대한 노선이 나뉘어져 분화되었다.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원하는 조선 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화북 지역으로 이동하여,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결성했다.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호가장 전투 등이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김원봉을 포함한 조선 의용대 본대 잔류 인원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가 있는 충칭으로 이동하여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만주 지역 곳곳에 만들어진 항일 유격대를 통합하여 동북 인민 혁명군을 조직하였다(1933년).
이후 동북 인민 혁명군은 사상에 관계없이 모든 반일 세력을 받아들인다는 원칙을 내세우고 동북 항일 연군으로 확대·개편되었다(1936년).
동북 항일 연군 내의 한 부대로 편성된 한인 유격대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까지 포함하여 조국 광복회를 결성하였다(1936년). 1937년 이들은 국내 독립운동가들의 지원 아래 함경도 보천보의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였다(보천보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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