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회 한능검 심화 20번 해설 – 조광조, 현량과

20번 문제

20. 다음 자료에 대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2점]

  • 조광조 등이 아뢰기를, “소격서가 요사하고 허탄함은 이미 경연에서 다 아뢰었고 전하께서도 그것이 허탄함을 환히 아시니 지금 다시 말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 신광한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조광조가 아뢰었던 천거로 인재를 뽑는 일은 여럿이 의논한 일입니다. 각별히 천거하는 것은 한(漢)에서 시행한 현량과와 효렴과를 따르는 것이 가합니다. 이것은 자주 할 수는 없으나 지금은 이를 시행할 만한 기회입니다. ……”라고 하였다.

① 호포제를 실시한 배경을 조사한다.

② 기해 예송의 전개 과정과 결과를 파악한다.

③ 중종 때 사림파 언관들이 제기한 주장을 검색한다.

④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입은 피해를 찾아본다.

⑤ 인현 왕후가 폐위되고 남인이 권력을 차지한 사건을 알아본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조선 연산군 때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사림들이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연산군이 중종 반정으로 물러나고 즉위한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① 호포제를 실시한 배경을 조사한다.

흥선 대원군 집권 시기에 대한 내용이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기해 예송의 전개 과정과 결과를 파악한다.

조선 현종 때 효종의 상을 당하자 자의 대비의 복제가 문제 되었는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1년설을,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여 1년설이 채택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중종 때 사림파 언관들이 제기한 주장을 검색한다.

중종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파 언관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④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동인이 입은 피해를 찾아본다.

조선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인현 왕후가 폐위되고 남인이 권력을 차지한 사건을 알아본다.

조선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적장자로 인정하여 원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서인을 대거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남인이 주도권을 가졌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송시열이 사형을 당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정답은 ③번이다.

 

사림의 성장과
사화
  • 사림의 등장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권력에 참여함으로써 훈구 세력을 견제하였다.

김종직과 그 문인이 성종 때에 중앙에 진출하면서 사림은 정치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사림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한 데 비해, 향촌 자치를 내세우며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또한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꾸준히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 사림의 계보

 

  • 사림의 성장

과거를 통하여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이조 전랑과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훈구 세력의 비리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 사화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대립으로 사화가 발생하였다.

 

    • 무오사화

성종을 이어 즉위한 연산군은 훈구 대신과 사림을 모두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였다. 특히, 사림 세력의 분방한 언론 활동을 억제하였다.

무오사화(1498년)는 조선에서 발생한 첫 번째 사화로, 김일손의 사초에 불손한 내용이 담겨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어 발생했다.

김일손의 사초 가운데 문제가 된 부분은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수록한 일이었는데, <조의제문>은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회왕, 즉 의제를 조선 단종에 비유하여 세조의 찬탈을 풍자하는 내용이었다.

사화

‘사림의 화’의 준말. 관리 및 선비들이 정치적 반대파에 몰려 참혹한 화를 입었던 일을 말한다.

 

    • 갑자사화

연산군의 전횡이 심해지자, 3사는 연산군에 대한 간쟁의 수위를 높여 갔고, 대신들 또한 연산군의 실정에 대해 논하며 시정을 요구했다.

결국 연산군은 임금을 능멸하는 행위와 폐비 윤씨 사건의 보복이라는 명분으로 갑자사화를 일으켰다(1504년).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이 알려져 김굉필 등이 처형되었다.

 

    • 기묘사화

연산군은 이후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 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중종반정으로 쫓겨났다(1506년).

중종은 사림을 다시 등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다. 당시 명망이 높았던 조광조가 중용되면서 천거제의 일종인 현량과를 통하여 사림이 대거 등용되었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해 나가고자 하였다.

하지만 조광조의 청렴함과 원리 원칙에 충실한 태도는 남곤⋅심정 등으로 대표되는 훈구 재상들과의 대립을 불러왔다. 이들의 위훈을 삭제하면서 대립 양상이 더욱 심화되었다.

결국 공신들의 반발로 말미암아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되었다(1519년).

조광조의 개혁 정치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경연의 강화, 언론 활동의 활성화, 위훈 삭제, 소격서의 폐지, 소학의 보급, 방납의 폐단 시정 등을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 을사사화

중종이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도 하였으나, 명종이 즉위하면서 외척끼리의 권력 다툼에 윤임이 제거당하고, 사림 세력 역시 정계에서 밀려났다(1545년).

 

    • 정미사화

1547년 조선 명종 2년 ‘양재역 벽서 사건’이 일어나 을사사화(1545년)에서 제거되었던 ‘대윤’ 윤임의 남은 관련자들이 제거되었다. 이를 정미사화라고 한다.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
  • 안동 김씨 축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안동 김씨를 비롯한 세도 가문의 중심 인물들을 몰아내고 당파와 관계없이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다.

 

  • 비변사 기능 축소·폐지

세도 정권의 핵심 권력 기구로 왕권을 제약하였던 비변사를 축소하여 사실상 폐지하였다.

 

  • 의정부와 삼군부 부활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시켜 행정권과 군사권을 나누어 맡도록 함으로써 권력 독점을 견제하였다.

 

  • <대전회통>, <육전조례> 편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 법전을 편찬하여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였다.

 

  • 경복궁 중건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임진왜란 때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 원납전

경복궁 중건에 필요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원납전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거두었다.

 

  • 당백전

고액 화폐인 당백전을 발행하였다. 당백전을 발행하면서 물가가 크게 오르기도 하였다. 무리한 경복궁의 중건은 양반과 백성의 불만을 샀다.

당백전

 

  • 서원 철폐

흥선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철폐하였다. 이에 지방 유생들과 양반들은 강력히 반발하였다. 만동묘가 이때 철폐되었다.

 

  • 호포제

군역 면제 대상인 양반을 포함하여 모든 가구에 군포를 동등하게 부과하게 하였다.

 

  • 사창제

환곡을 개혁하기 위해 사창제를 실시하였다.

조선 후기
붕당 정치 전개
  • 정여립 모반 사건

붕당 정치 초기에는 동인이 우세한 가운데 정국이 운영되었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온건파인 남인과 급진파인 북인으로 나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발생
↙    분화     ↘
북인(급진파) 남인(온건파)
서경덕, 조식 이황, 이언적

처음에는 남인이 정국을 주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이 끝난 뒤 북인이 집권하여 광해군 때까지 정국을 주도하였다.

 

  • 인조 반정

광해군의 지지 세력인 북인은 서인과 남인을 배제한 채 정권을 독점하려 하였다.

또한 북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광해군의 영창 대군 살해와 인목 대비 유폐 등으로 결국 인조 반정이 일어나 광해군과 북인은 몰락하였다.

반정을 주도한 서인은 남인 일부와 연합하여 정국을 운영해 나갔다. 이들은 기본적으로 서로의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서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를 이루어 나갔다.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비판하고, 친명 배금 정책을 추진하여 후금을 자극하였다.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 산림이란 이름으로 재야에서 그 여론을 주재하였다.

산림

시골에 은거해 있던 학덕이 높은 학자 가운데 국가의 부름을 받아 특별 대우를 받던 사람으로 붕당 정치기의 사상적 지주였다.

 

  • 예송

현종 때까지 서인이 우세한 가운데 남인과 연합하여 공존하는 구도가 유지된 채 붕당 정치가 전개되었다.

현종 때에 효종의 왕위 계승에 대한 정통성과 관련하여 두 차례의 예송이 발생하면서 서인과 남인 사이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 1차 예송

1659년 기해예송.

기년복 1년.

효종의 상을 당하여 자의 대비의 복제가 문제 되었는데,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1년설을, 남인은 3년설을 주장하여 1년설이 채택되었다.

당시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 2차 예송

1674년 갑인예송.

기년복 1년.

효종비의 상을 계기로 또 자의 대비의 복제가 문제 되었는데, 서인은 9개월설을, 남인은 1년설을 주장하여 1년설이 채택되었다.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서인이 약화되고 남인 중심의 정국이 운영되었다.

조선 전기
성리학의 발달
  • 성리학의 정착
    • 관학파

정도전, 권근 등 관학파로 불리는 이들은 성리학에만 국한하지 않고 한⋅당 유학, 불교, 도교, 풍수지리 사상, 민간 신앙 등을 포용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고 하였으며, 특히 주례를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중요하게 여겼다.

이들은 고려 시대부터 누적되어 온 대내외적인 모순을 극복하고 왕조 교체에 따른 새로운 문물 제도를 정비하고 부국강병을 추진하였다.

 

    • 사림

고려 말 온건 개혁파로 조선의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재야로 물러난 길재에서 비롯된 사학파의 학문적 전통은 성종 때에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진출한 사림이 계승하였다.

이들은 형벌보다는 교화에 의한 통치를 강조하였으며, 공신과 외척의 비리와 횡포를 성리학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비판하고, 당시의 사회 모순을 성리학적 이념과 제도의 실천으로 극복해 보려고 하였다.

 

  • 성리학의 융성

16세기 사림은 도덕성과 수신을 중시하였으며, 그것을 사회적으로 실천하는 가운데 인간 심성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다.

 

    • 서경덕과 이언적

서경덕과 이언적은 각각 조선 성리학의 이기론에서 선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리론은 도덕적 원리를 중시하는 학설로, 이언적에서 시작하여 이황이 대성하였다.

주기론은 경험적 세계를 중시하는 학설로, 서경덕이 처음 주장하고 이이가 이를 크게 발전시켰다.

 

      • 서경덕·조식(주기론)

서경덕은 이보다는 기를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하고 불교와 노장 사상에 대해서 개방적인 태도를 지녔다.

역시 노장 사상에 포용적이었던 조식은 학문의 실천성을 특히 강조하였다.

서경덕과 조식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학문 경향은 16세기 중반 이후 하나의 중요한 사상적 조류를 형성하였다.

 

      • 이언적(주리론)

이언적은 기보다는 이를 중심으로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여 후대에 큰 영향을 끼쳤다.

 

    • 이황과 이이

성리학이 조선 사회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은 이황과 이이였다.

 

      • 이황(주리론)

이황은 주자서절요, 성학십도 등을 저술하였으며, 주자의 이론에 조선의 현실을 반영시켜 나름대로의 체계를 세우려고 하였다.

그의 사상은 도덕적 행위의 근거로서 인간의 심성을 중시하고, 근본적이며 이상주의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이황의 사상은 임진왜란 이후 일본에 전해져 일본의 성리학 발전에도 영향을 끼쳤다.

또한 이황은 기대승과 사단 칠정에 관한 논쟁을 벌였다.

 

      • 이이(주기론)

이이는 이황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기의 역할을 강조하여 현실적이며 개혁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이는 격몽요결, 동호문답, 성학집요 등을 저술하여 16세기 조선 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통치 체제의 정비와 수취 제도의 개혁 등 다양한 개혁 방안을 제시하였다.

해주 향약을 시행하여 향촌 교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공물을 쌀로 받는 방안을 제안하였다(대동법).

성학십도와 성학집요의 차이점

성학십도에서는 군주 스스로가 성학을 따를 것을 제시한 반면, 성학집요에서는 현명한 신하가 성학을 군주에게 가르쳐 그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학파의 형성과 대립

16세기 중반부터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심화되면서 학설과 지역적 차이에 따라 서원을 중심으로 학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 동인과 서인

선조 때에 서경덕 학파와 이황 학파, 조식 학파가 동인을 형성하였으며, 이이 학파와 성혼 학파가 서인을 형성하였다.

 

      • 동인의 분화

조선 선조 때 정여립 모반 사건을 빌미로 기축옥사가 일어났다.

동인은 정여립 모반 사건 등을 계기로 이황 학파의 남인과, 서경덕 학파와 조식 학파의 북인으로 분화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남인 북인
이황, 이언적 서경덕, 조식

 

    • 서인과 남인

광해군 때, 북인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취하는 등 성리학적 의리 명분론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이는 서인과 남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정국을 주도하자, 서경덕과 조식의 사상, 양명학, 노장 사상 등은 배척당하고, 이황과 이이의 학문, 즉 주자 중심의 성리학만 조선 사상계에서 확고한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서인 동인
이이, 성혼 서경덕, 조식, 이황
정여립 모반사건
남인 북인
이황, 이언적 서경덕, 조식

 

이후 서인과 남인은 명에 대한 의리 명분론을 강화하고 반청 정책을 추진하여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이후 격렬한 주화⋅척화 논의를 거쳐 인조 말엽부터 송시열 등 서인 산림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척화론과 의리 명분론이 대세를 이루었다. 이 시기에 각 학파는 대동법과 호포법 등 사회⋅경제 정책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과 대립을 하기도 하였다.

 

  • 예학의 발달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할 정도로 예학이 발달하였다.

이 무렵 예는 양난으로 인하여 흐트러진 유교적 질서의 회복이 강조되면서 더욱 중시되었다.

예가 사회를 이끌어 가는 하나의 방도로서 부각되어, 학문은 예학보다 절실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예치가 강조되었다.

이처럼 예학 연구가 심화되어 각 학파 간 예학의 차이는 전례 논쟁을 통하여 표출되었으며, 예송은 그 대립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후기
붕당 정치와
탕평론의 대두
조선 숙종
  • 탕평론의 대두

숙종은 인사 관리를 통하여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상황에 따라 한 당파를 일거에 내몰고 상대 당파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인 인사 관리로 일관하여 환국이 일어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 경신환국(1680년)

숙종 초 정권을 장악한 남인을 견제하고자 했던 숙종은 남인의 역모 사건 등을 계기로 남인을 처벌하고 서인으로 급격히 정권을 교체시켰다. 허적과 윤휴 등 남인이 대거 축출되었다. 이를 경신환국이라 한다. 서인이 주도권을 가졌다. 경신환국 이후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 기사환국(1689년)

숙종은 장희빈의 아들을 적장자로 인정하여 원자로 삼으려 하자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던 서인을 대거 몰아내고 인현왕후를 폐위시키면서 남인이 정권을 잡은 기사환국이 일어났다. 남인이 주도권을 가졌다. 제주도로 유배를 간 송시열이 사형을 당했다.

  • 갑술환국(1694년)

숙종은 인현왕후를 다시 맞아들이고 남인에서 서인으로 정권을 교체시켰다. 이를 갑술환국이라 한다. 서인(노론과 소론)이 주도권을 가졌다.

  • 금위영 설치

숙종 때 국왕의 호위와 수도 방어를 위해 금위영을 창설하였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70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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