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회 한능검 심화 41번 해설 – 조소앙

 41번 문제

41. 밑줄 그은 ‘나’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3점]

①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였다.

②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였다.

③ 극동 인민 대표 대회에서 의장단으로 선출되었다.

④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⑤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이념으로 삼균주의를 주장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문제 해설

1912년 7월 신규식과 박은식 등은 상하이에서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조소앙은 동제사에 참여하였다.

1917년에는 신규식, 조소앙 등이 국민 주권론과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1930년 김구, 안창호, 조소앙 등은 상하이에서 한국 독립당을 창당하였다. 이 한국 독립당은 지청천이 만주에서 결성한 한국 독립당과는 다른 정당이다.

1941년 대한민구 임시 정부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하여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① 조선 혁명 선언을 작성하였다.

1923년 의열단원들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②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였다.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③ 극동 인민 대표 대회에서 의장단으로 선출되었다.

극동 인민 대표 대회는 1922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주도로 열린 동아시아 각국 공산당 및 민족 혁명 단체의 연석회의이다.

의장단에 김규식과 여운형이 선출되었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④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로 파견되었다.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기 위해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지 않다.

 

⑤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이념으로 삼균주의를 주장하였다.

1941년 임시 정부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하여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따라서 보기의 내용은 옳다.

 

정답은 ⑤번이다.

 

1910년대
국외 민족 운동
  • 서간도(남만주) – 삼원보, 신한민촌, 경학사, 신흥 강습소(신흥 무관 학교)

국권 피탈 이후 서간도로 이주한 신민회 회원인 이회영, 이상룡 등은 서간도(남만주)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였고, 이곳에서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고 신흥 강습소를 세웠다.

지치 기관인 경학사는 부민단,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서로 군정서를 조직하였다.

신흥 강습소는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였고, 이후 신흥 무관 학교로 발전하였다.

 

  • 북간도 – 서전서숙, 명동 학교, 중광단

북간도로 이주한 동포들은 용정촌, 명동촌 등 한인 집단촌을 형성하고 간민회 등의 자치 단체를 만들어 동포 사회를 이끌었다.

이상설, 김약연 등은 각각 서전서숙과 명동 학교 등을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대종교는 북간도로 거점을 옮겼고, 서일 등 신자 중 일부가 무장 독립 단체인 중광단을 만들었다. 이 단체는 3·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개편하였다.

 

  • 북만주 – 한흥동

이상설, 이승희 등은 북만주 밀산부에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을 건설하였다.

 

  • 연해주 – 신한촌, 권업회, 대한 광복군 정부

연해주로 이주한 동포들에 의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한인 집단 거주지인 신한촌이 만들어졌고, 자치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한인들의 권익 신장에 힘썼다. 권업회는 권업신문을 발행하였다.

1914년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조직되었다.

이외 한인 단체인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가 결성되었고, 이동휘 등이 사회주의 정당인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 중국 – 동제사, 박달 학원, 신한 청년당 김규식, <대동단결선언>

중국 상하이에서 동제사(1912년), 박달 학원(1913년) 등이 조직되었다.

1912년 7월 신규식과 박은식 등은 상하이에서 동제사를 조직하였다. 조소앙은 1913년에 참여하였다. 동제사는 장차 전개될 독립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군사교육을 중시했고, 중국의 각종 군사교육기관을 통해 100여명 정도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1915년 베이징에서는 신규식, 박은식 등이 신한 혁명당을 조직하였다. 1917년에는 신규식, 조소앙 등이 국민 주권론과 공화주의를 바탕으로 한 임시 정부가 수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다.

1918년 상하이에서 여운형, 김규식 등이 신한 청년당을 결성했다. 신한 청년당은 1919년 <한국 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작성해 김규식을 대표로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였다. 그리고 미국 윌슨 대통령에게 이를 전달했다.

 

  • 미주 – 대한인 국민회, 흥사단, 대조선 국민 군단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한국인의 집단 이주가 이루어지면서 미주 지역에 한인 동포 사회가 형성되었다.

1905년 멕시코의 유카탄 반도에 한국인들이 이주하여 에네켄 농장에서 가혹한 노동 생활을 하였다. 1910년에는 숭무학교가 설립되어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1908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미국인 스티븐스를 저격한 사건을 계기로 1910년 안창호 등이 대한인 국민회가 결성하였다. 대한인 국민회는 신한민보를 발행하였다.

1913년에는 안창호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흥사단을 조직하였다.

1914년 하와이에서는 박용만이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군사 훈련을 하였다.

1920년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군무총장 노백린은 미국 캘리포니아에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위해 한인 비행 학교를 설립하였다.

건국 준비와
한국 독립의 약속

  •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윤봉길 의거 이후 큰 활력을 얻었다. 그러나 더 강화된 일제의 감시와 탄압 때문에 상하이를 떠나야만 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여러 차례 이동을 거듭한 끝에 충칭에 정착하였다.

 

  • 한국 독립당 재창당

1940년 김구의 한국 국민당,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 3당은 한국 독립당을 결성하여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 한국광복군과 김구 주석

1940년 임시 정부는 중국 충칭에 정착하여, 총사령관을 지청천, 참모장을 이범석으로 하는 한국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임시 정부는 주석 중심의 단일 지도 체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김구를 주석으로 선출하였다.

김구 주석

 

  • 건국 강령 제정

1941년 임시 정부는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초로 하여 대한민국 건국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 강령에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정 수립, 토지와 대기업 국유화, 의무 교육 제도 시행, 노동권 보장 등이 내용은 담았다.

 

  • 조선 의용대 합류

1942년 화북 지방으로 이동하지 않은 조선 민족 전선 연맹(민족 혁명당 후신)의 김원봉이 이끄는 조선 의용대 일부가 한국광복군에 합류하였다.

 

  • 대일 선전 포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정식으로 일제에 대일 선전 포고를 하였다.

1944년 한국광복군은 미국 전략 정보국(OSS)와 함께 국내 진공 작전(작전명 독수리 작전)을 준비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일찍 항복하면서 작전은 무산되었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개헌 변천과정
구분 연도 정부 형태
제1차 개정헌법 1919년 대통령중심제
제2차 개정헌법 1925년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
제3차 개정헌법 1927년 국무위원 중심의 집단지도체제
제4차 개정헌법 1940년 주석 중심의 단일지도체제
제5차 개정헌법 1944년 주석·부주석 체제

 

  • 조선 독립 동맹

화북 지방으로 이동한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의 공세에 맞서 호가장 전투 등이 참가하여 큰 전과를 거두었다.

1942년 중국 화북 지역에서 김두봉이 주도하고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였다.

조선 독립 동맹은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조선 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조선 의용군은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 등과 함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 조선 건국 동맹

국내에서도 건국 준비 활동이 시작되었다.

1944년 여운형, 안재홍 등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조선 건국 동맹이 만들어졌다.

일제의 패망을 확신한 여운형은 독립 선언서를 준비하고, 무장 세력도 조직하면서 해외 독립운동 세력과의 연계를 시도하였다.

조선 건국 동맹은 일제 타도를 위한 대동단결, 민주주의 원칙에 바탕을 둔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하는 강령을 발표하였다.

 

  • 국제 사회의 한국 독립 약속
    • 카이로 선언

1943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개최된 카이로 회담에 미국, 중국, 영국의 3국 정상이 참석하였다.

3국 대표는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킬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이는 최초로 한국의 독립이 약속된 것이다.

 

    • 얄타 회담

1945년 미국, 중국, 영국의 3국 정상이 얄타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소련이 일본과의 전쟁에 참여한다는 내용의 협정이 체결되었다.

 

    • 포츠담 선언

1945년 미국, 중국, 영국의 3국 정상이 독일 포츠담에서 회담을 열었다.

이 회담에서 일본의 무조건 항복과 카이로 선언에서 결정된 한국의 독립을 재확인한다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의열 투쟁

  • 의열단

1919년 11월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인 김원봉, 윤세주 등은 만주 지린성에서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 (1923년)

의열단원들은 신채호가 작성한 <조선 혁명 선언>을 활동 지침으로 삼아 민중 직접 혁명을 달성하고자 노력하였다.

 

    • 목표

의열단은 일제의 기관 파괴와 요인 암살(5파괴, 7가살) 등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5파괴

조선 총독부, 동양 척식 주식회사, 매일신보사(조선 총독부 기관지),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7가살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적탐(밀정), 반민족적 지주와 자본가

 

    • 활동

박재혁 – 1920년 부산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익상 – 1921년 조선 총독부에 폭탄 투척

김상옥 – 1923년 종로 경찰서에 폭탄 투척

김지섭 – 1924년 일본 도쿄 궁성 폭탄 투척

나석주 – 1926년 동양 척식 주식회사와 조선 식산 은행에 폭탄 투척

 

    • 활동 변화

의열단은 1920년대 후반부터 개인 폭력 투쟁에 한계를 느끼고 조직적인 항일 무장 투쟁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의열단원들은 중국 황푸 군관 학교에 입학하여 정규 군사 훈련을 받았다.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그리고 의열단은 민족 유일당 운동의 일환으로 중국 관내 대부분의 민족 운동 단체를 통합한 민족 혁명당 결성(1935년)을 주도하였다.

 

  • 한인 애국단
    • 배경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 대표 회의 이후 침체를 겪었다.

또한 1931년 만보산 사건 이후 한국인에 대한 중국인들의 감정이 나빠지면서 중국과의 관계도 어려워졌다.

김구는 1931년 임시 정부에 활기를 불어넣고자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의열 투쟁을 전개하였다.

만보산 사건

1931년 중국 지린성 만보산 지역에서 한인 농민과 중국인 농민이 충돌한 사건이다.

 

    • 이봉창의 의거

1932년 이봉창은 일본 도쿄에서 천황이 타고 가는 마차에 폭탄을 던져 일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중국 상하이를 침략하였다(상하이 사변).

 

    • 윤봉길의 의거

1932년 상하이 사변에서 승리한 일제는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기념식을 열었다.

이때 윤봉길이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제의 주요 장성과 고관들을 처단하였다.

윤봉길 의사

이봉창 의사

 

    • 의의

한국 애국단의 의거로 인해 중국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은 크게 호전되었으며, 중국 국민당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중국 영토 내에서 한국광복군이 조직되는 토대가 되었다.

일제 강점기
한국사 연구

  • 일제의 한국사 왜곡

일제는 침략과 식민 지배를 정당화할 목적으로 우리의 역사를 철저히 왜곡하거나 말살하려고 하였다.

일제는 타율성론, 정체성론, 당파성론을 주장하는 식민주의 사관을 앞세워 한국사의 자율성과 독창성을 부정하였다.

 

  • 조선사 편수회

1925년 조선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 편수회는 식민주의 사관을 토대로 조선사를 편찬하여 한국사 왜곡에 앞장섰다.

 

  • 민족주의 사학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한국사의 발전 주체가 우리 민족임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학의 허구성을 밝히는 데 힘을 기울였다.

 

    • 박은식

박은식은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 참여하면서 한국통사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저술하여 일제의 불법적인 침략을 규탄하였다.

또한 그는 민족 정신을 혼(魂)으로 파악하여, 혼이 담겨 있는 민족사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 기출 자료
우리 민족은 단군 성조(檀君聖祖)의 자손으로서 동해의 명승지에 자리잡고 있다. 인재의 배출과 문물의 제작에 있어서 우수한 자격을 갖추어, 다른 민족보다 뛰어난 것도 사실이다. …(중략)… 우리의 국혼(國魂)은 결코 다른 민족에 동화될 수 없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

한국은 중국과 비슷한 시기에 세워져 문화가 일찍부터 열렸고, 그 백성들은 착하여 천하 사람들이 군자의 나라라고 일컬었다. 역사는 면면히 흘러 4300여 년이나 되었다.

오호라! 옛 문화가 일본에 펴져, 저들(일본)의 음식, 의복, 가옥이 우리에게서 나갔고, 종교와 학술 또한 우리에게서 나간 것이다. 그러므로 저들은 일찍이 우리를 스승으로 삼아 왔음에도 이제는 우리를 노예로 삼으려 하는가?

………(중략)………

아름다운 산천이여, 우리 조상들이 여기에 살았고, 울창한 산림이여, 우리 조상들이 이를 심었으며, 금, 은, 동, 철도 우리 조상들이 채취했고, 가축과 물고기도 우리 조상들이 길러 왔다. 이 땅의 모든 문명이 다 우리 조상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중략)………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없어져도 민족의 역사는 없어질 수 없다고 하였으니, 그것은 나라는 형체이고 역사는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은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라도 곧게 남아야 한다. 이것이 이 책을 저술한 까닭이다.

-한국통사-

 

    • 신채호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와 조선사연구초를 지어 우리 고대 문화의 우수성과 독자성을 강조하여 식민주의 사관을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역사를 아와 비아의 투쟁으로 정의하였다.

또한 독사신론을 저술하였다.

신채호는 낭가 사상을 강조하였다.

 

역사란 무엇이뇨? 인류 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에서 발전하여 공간까지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 하면 조선 민족이 그리 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니라.

그리하여 아에 대한 비아의 접촉이 많을수록 비아에 대한 아의 투쟁이 더욱 맹렬하여 인류 사회의 활동이 휴식할 사이가 없으며, 역사의 전도가 완결될 날이 없다. 그러므로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의 기록이니라.

〈조선 상고사〉

 

    • 조선학 운동

1930년대에 이르러 민족주의 사학은 정인보, 안재홍, 문일평 등으로 계승되었고, 이들은 조선학 운동을 전개하였다.

정인보는 ‘얼’ 사상을 강조하였다.

문일평은 ‘조선심’을 강조했다.

다산 정약용 서거 99주기를 맞아 여유당전서를 간행했다.

 

  • 실증 사학

실증 사학자들은 문헌 고증으로 객관적인 역사 서술을 강조하였다.

이들은 역사가의 주관적인 판단 없이 사실을 있는 그대로 서술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이병도 등은 1934년 진단 학회를 조직하고 진단 학보를 발간하였다.

 

  • 사회 경제 사학

1930년대에는 백남운 등에 의해 사회 경제 사학이 대두되었다.

이들은 마르크스의 유물 사관의 입장에서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적 발전 법칙에 입각하여 발전하였음을 강조하면서 식민주의 사관의 정체성 이론을 반박하였다.

백남운은 조선사회경제사, 조선봉건사회경제사를 저술하였다.

 

    • 기출 자료
조선사의 계기적 변동의 법칙을 파악할 경우, 과거 몇 천 년 간의 사적(史蹟)을 살피는 것도 당연히 우리의 과제이지 않으면 안 된다. …(중략)… 나의 조선관은 그 사회 경제의 역사적 발전 과정을 본질적으로 분석, 비판, 총관하는 일에 집중되어 있다.

조선사회경제사

우리 조선 역사 발전의 전 과정은, 예를 들어 지리적인 조건, 인류학적인 골상 등에서 다소의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외관적인 특수성은 다른 문화 민족의 역사적 발전 법칙과 구별될 만큼 독자적인 것은 아니다. 세계사적 역사 법칙에 따라 다른 여러 민족과 거의 같은 발전 과정을 거쳤다.

 

  • 신민족주의 사학

손진태는 조선민족사개론을 저술하였다.

일제의
국권 피탈
  • 제1차 영·일 동맹

중국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난 후, 만주와 한반도에서 러시아와 일본이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했다.

1902년 영국과 일본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제1차 영·일 동맹을 체결했다.

 

  • 러시아의 용암포 점령

이후, 1903년 러시아가 압록강에 위치한 용암포를 강제로 점령하는 일이 발생했다.

 

  • 전시 국외 중립 선언

러시아와 일본이 전쟁을 벌일 조짐을 보이자 대한 제국은 ‘전시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 러·일 전쟁 발발(1904년 2월)

인천항과 뤼순항에 정박해 있던 러시아 군함을 기습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켰다.

 

  • 한⋅일 의정서(1904년 2월)

러·일 전쟁 발생 직후, 일본은 한국 정부를 위협하여 일본군이 전략상 필요한 지역을 마음대로 사용하고, 일본의 동의 없이 제3국과 조약을 체결할 수 없다는 내용의 한⋅일 의정서를 강요하였다.

이때 일본은 독도를 시마네현 소속으로 고시하였다.

 

  • 제1차 한·일 협약(1904년 8월)

일본은 러·일 전쟁에서 전세가 유리해지자 일제는 한국 식민지화 방안을 확정하고, 이어서 제1차 한⋅일 협약의 체결을 강요하여 외교와 재정 분야에 그들이 추천하는 외국인 고문을 두도록 하였다.

일본은 재정 고문으로 일본인 메가타를, 외교 고문으로 미국인 스티븐스를 파견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재정과 외교에 본격적으로 간섭하였다.

 

  • 가쓰라·태프트 밀약(1905년 7월)

러·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은 일본은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서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 제2차 영·일 동맹(1905년 8월)

일본은 영국과 제2차 영⋅일 동맹을 맺은 후,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 포츠머스 조약(1905년 9월)

일본이 뤼순항을 함락하고 동해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파하는 등 전쟁의 승기를 잡자,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체결하였다.

제2조

러시아 제국은 일본 제국이 한국에 대해 정치와 군사 및 경제적인 우월권이 있음을 승인하고, 일본 정부가 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 조치를 할 수 있음을 승인한다. 또한 한국에 있는 러시아 제국 신민은 다른 외국인과 동일하게 취급한다. 러시아는 한국 영토의 안전을 위하여 일본이 군사적 조치를 취할 수 있음을 동의한다.

 

  • 제2차 한·일 협약(을사늑약, 1905년 11월)

일제는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고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을사늑약을 강요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일제는 우리 나라의 외교권을 빼앗았을 뿐만 아니라, 통감부를 설치하여 우리 나라 내정 전반에 걸쳐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초대 통감은 이토 히로부미였다.

 

  • 헤이그 특사 파견과 고종의 강제 퇴위(1907년)

일제는 을사늑약의 무효를 주장하는 고종이 헤이그에 특사(이상설, 이준, 이위종)를 파견하자, 이를 빌미로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순종은 연호를 광무에서 융희로 바꿨다.

 

  •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년 7월)

이어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체결하여 한국 정부의 각 부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내정을 장악하였으며, 대한 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실질적으로 한국을 지배하였다.

협약 내용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관해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제2조 한국정부는 법령의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친다.

제3조 한국의 사법사무는 보통 행정사무와 구별한다.

제4조 한국 고등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 행한다.

제5조 한국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 외국인을 용빙할 수 없다.

 

  • 기유각서

일본은 1909년 기유각서를 체결하여 사법권을 빼앗았고, 1910년 경찰권을 빼앗았다.

 

  • 한⋅일 병합 조약(경술국치, 1910년 8월)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통감으로 왔다.

1910년 8월 29일 한⋅일 병합 조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식민지가 되었다.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초대 총독이 되었다.

 

기출 문제 키워드

 

2024년 제70회 한국사능력검정시험 심화

 

한국사 시험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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